마광수를 기억하며
어떤 일 년은 누군가에게 세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곤 한다.
2017년은 바야흐로 격변의 해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2017년을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포항에서 꽤 큰 지진이 일어났고, 그 여파로 수능이 연기됐다. 첫 여성 대통령이 탄핵됐고, 그와 연계된 수많은 지하의 것들이 지상으로 올라오던 해였다. 당신은 어떻게 기억하시는지? 나에겐 시대를 앞서간 로맨티스트이자 자유주의자, 故 마광수 선생이 스스로 세상을 저버린 해로 기억한다.
내가 마광수 선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그가 타계한 2017년 9월 5일이었다. 평생 문단과 학계에서 외톨이로 지내던 그는, 정년퇴임 후 더욱 우울증 증세가 심해져 결국 세상을 등졌다. 저마다 그를 다르게 기억할 것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몇몇 사람은 “마광수가 누구야?” 하며 갸우뚱거릴 수도 있다. 혹자는 “아, 마광수…”하며 눈살을 찌푸릴 수도, “아, 마광수!”하며 옛 기억을 더듬어 볼 수도 있는 일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는 선생을 누구보다 솔직했던 문학가이자, 시대와 불화했던 자유주의자로 기억하고 있다.
마광수 선생은 1977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시인으로 등단했다. 79년에는 홍익대학교 조교수로 임용되며 교수로서 생활을 시작했고, 84년에는 시인 윤동주를 분석하여 국문학자로서 큰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우리가 교과서에서 본 윤동주 시의 해석 대부분은 마광수의 연구다). 외에도 소설가, 화가, 시대를 앞서간 로맨티스트. 그를 지칭하기 위해선, 한두 어절로 끝나는 몇몇 단어들로는 결코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기본적으로 ‘글쟁이’였다고 생각한다. 많은 구설수에 얽혔음에도―가장 유명한 즐거운 사라 필화 사건*― 한평생 쓰는 자의 자세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말에도 그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묵묵히 원고를 적어 내리는 일상을 보냈다. 『가자, 장미여관으로』, 『즐거운 사라』,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등 그가 세상에 남긴 저서는 약 100여 권에 육박한다. 수많은 파문을 남기고 떠난 그였지만, 나는 그의 이름도, 단 한 권의 저서조차도 알지 못했었던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도대체 어떤 글을 쓰신 분이지?’하는 마음이 들었던 나는 서점으로 향했다. 20여 분쯤 지나자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그의 책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저어, 저희 서점에는 이 책 한 권 밖에 없는데요.”라는 말과 함께 건네받은 책은 그의 유고 소설집 『추억마저 지우랴』가 전부였다. 100여 권의 저서와 한 권. 이는 마광수 선생의 삶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아 오래 들쳐봐야만 간신히 찾을 수 있는 사람. 누구보다 자유로웠지만, 자유롭지 못했던 그의 삶은 그 속에 어떻게든 반영되어 있었다.
한평생 그는 쉽고 명료한 문장으로 ‘지식인들의 이중성’을 비판했고, ‘성(性)의 해방’과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목소리를 냈다. 이중성이 없는 사회야말로 건강한 사회라는 것이었다. 욕망에 솔직하고, 그것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성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해소될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 전반에 깔린 공통된 정서였다. 선생은 말했다. “밤이면 우리나라처럼 유흥 문화가 발달한 나라가 없는데, 낮에는 모두가 마광수를 욕 한단 말이야. 이게 이중성이지.” 더불어 그는 문학계의 지적 허영을 강하게 비판했다. “진정 좋은 글은 쉽게 읽히는 글이다. 그런데 어렵게 쓰여야만 좋은 작품이란 평을 받는다.”라며 비판하던 그의 말은 내가 창작을 하는데 가히 큰 깨달음이 되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면―특히 비판적 시선을 담은 에세이는―, 나는 그의 신랄한 통찰에 절로 경탄한다. 더불어 그 글이 80년대나 90년도에 적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시대적인 착상에 얽혀있는 우리의 현실에 절로 아연해지고 마는 것이다. 마광수 선생도 생전 인터뷰를 통해 이와 비슷한 얘기를 건넨 적 있다. “한 여학생에게 메일이 왔는데, 내 저서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읽고 문화 충격을 받았답니다. 이게 20여 년 전에 나왔는데, 이렇게 얘기한다는 건 한국 사회가 하나도 안 변했다는 거죠.”
나의 가치관의 8할은 그에게서 배웠다고 한들 과언이 아닐 것이다. 철학자 강신주는 일찍이 시인 김수영에 대해 “저희 아버님께서 제 몸을 키워주셨다면, 김수영 시인은 제 정신을 키워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저서에서 밝혔는데, 나에게 마광수 선생은 그런 존재였다. 해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를 때 언제나 ‘선생님’라는 호칭을 뒤에 붙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 수요일(9월 5일)은 마광수 선생님의 기일이었다. 수소문 끝에 그의 묘소를 다녀왔다. 그가 평생을 대뇌였던 붉은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선생님을 뵈러 가는 버스에서 마주한 이정표의 이름은, 놀랍게도
장미로.
내가 선생님을 뵈러 갔을 때, 그의 묘소는 교외 호수처럼 고적했다. 정숙히 인사를 드린 나는 한 시간 가까이 그의 묘소를 지켰고, 다시 한 번 짧은 묵념을 드리고 나서야 돌아설 수 있었다. 사진 속 그의 얼굴은 보는 이로 하여금 슬프도록 생긋했다. 세상의 채도가 두 단계 내려간 느낌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혹여나 그를 기억하는 기사가 있을까, 하며 들어간 포털사이트도 냉랭하리만큼 한적했다. 매해 그날에 일어난 일을 기록해둔 기사 한 줄이 전부였다. 그때 나는 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도통 잠에 들 수 없어 그의 시집을 꺼내 들었다. 그중 몇 번을 대뇌였던, ⌜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 머리를 집어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버렸는가?⌟라는 시.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이 시는 그의 삶을 오래도록 생각해보게 한다.
말벌이 뱀의 머리 위에 앉아 침으로 계속 쏘아댔으므로
뱀은 아파서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복수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뱀은 구르는 수레바퀴 밑에 자기 머리를 집어넣어
말벌과 함께 죽어버렸다
뱀과 말벌과의 관계는
나와 문학과의 관계
현실과의 관계
나를 괴롭히고 고민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들과의
관계와도 같다
그러나 나는 죽음이 두려워
현실이라는 거대한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서글픈 존재이다
과연 나는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적을 깨부숴버릴 수 있을까
과연 나는 말벌과 함께 죽는
뱀의 우렁찬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그의 작고 소식이 일렀던 2017년 9월 5일 무렵은 그와 관련된 기사와 칼럼이 물밀 듯이 올라왔다. 선생을 기억하는 많은 글들을 보았다. 판매량이 저조하던 책들은 그제야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다. 죽음만이 세상에 내던질 수 있는 마지막 복수라고 그는 생각했던 걸까.
누군가를 추모한다는 것은 지나온 삶을 진심으로 존중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용감했던 사나이 狂馬. 나도 그와 같은 삶의 태도를 지니리라. 지난 일 년은 선생의 책들을 거침없이 탐닉하며 보내던 세월이었다. 그렇지만 먼 훗날. 지금 읽은 그의 책을 살포시 꺼내어 보았을 때, 그의 글이 촌스럽다고 말하고 싶다. 더 이상 마광수는 낡았다고. 그의 말은 구시대적인 담론이 되어버렸다고. 시대는 그의 앞질러간 문학을 넘어, 보다 솔직한 세상으로 나아가길 빈다.
* 1992년 출간된 소설 『즐거운 사라』가 음란물 혐의를 받으면서,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기소된 사건. 강단에서 강의를 하던 마광수 교수를 긴급 체포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외설을 명목으로 작가를 체포한 최초의 나라가 한국이다.’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결국 그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6월을 선고받았다.
** 마광수 소설집 『발랄한 라라』에 수록된 단편 ⌜자궁 속으로 사라지다⌟의 문장 ‘세상의 채도가 두 단계 올라간 느낌이었다.’를 변형 후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