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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Mar 04. 2021

닐 암스트롱의 기분

2021 인천공항 개항 20주년 수기 공모전 출품작

달에 발을 내딛기 전, 닐 암스트롱은 무슨 기분이었을까?

꿈을 이룬다는 성취감이었을까, 아니면 전 인류가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우월감이었을까. 혹은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감정들의 복합적인 이름은 떨림이다. 확실한 건 암스트롱 본인만 알고 있겠지만, 이 떨림은 한 평생 지구에서만 살아온 나 같은 사람도 느낄 수 있다. 바로 인천공항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인천공항을 갔던 것은 고등학교 이 학년 때였다. 일본 오사카로 여행을 가기 위해서였다. 되새겨보면, 여행을 할 때보다 더 떨렸던 순간은 공항에서 출국을 기다리는 순간이었다. 첫 해외여행이자 첫 공항이었고, 첫 비행기였다. 십팔 년 평생 느껴본 적 없던 감정이 온몸을 휘감았다. 몇 시간 후면 일생의 전부를 살아왔던 세계에서 발을 떼고, 다른 세계로 몸이 옮겨져 있다는 사실이 당시 나에게는 몹시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출국 당일, 집안은 어린 조카들이 놀러 온 명절날처럼 어수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가족 중에서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이었다. 닐 암스트롱이 지구인을 대표하여 인류 역사에 큰 획을 그었듯, 내가 인천공항에 발을 디디고 출국을 기다리며 우리 집안에 큰 획을 그었다. 가족 모두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나를 기다렸다. 역사적인 도래를 앞두고, 나는 전 인류에 못지않은 화려한 인사를 받으며 조수석에 올라탔다.


  상기된 분위기 속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내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인천대교를 넘어가며 양 옆으로 보이는 광활한 바다는 햇빛을 받아 잘게 부서진 유리조각처럼 번들거렸고, 바다와 나 사이에 간극은 벌써 하늘 위를 날고 있는 듯한 기분을 자아냈다. 가족들에게 마지막 손 인사를 건네고 수많은 인파 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금도 첫 해외여행을 생각할 때 가장 기억의 남는 장면은 화려한 도톤보리 운하도, 교토의 고요한 대나무 숲도 아닌 출국 직전 인천공항의 모습이다.


  오 년이나 지났지만, 이날의 장면은 방금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생생하다. 여행지의 기억은 종종 어릴 적 읽은 고전 문학처럼 불투명하게 내용이 뒤섞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공항은 그렇지 않다. 처음 공항에 갔던 순간은 대부분 선명하게 기억날 것이다. 처음이었다는 사실 이외에도 기억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다른 나라를, 다른 사람과, 다른 계절에 여행해도 이륙 직전 공항에서 느끼는 감정은 놀라우리만치 비슷한 떨림이 존재했다. 인천공항에 올 때마다 우리는 그날의 감정을 몇 번이고 답습했기 때문이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올 때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흘러넘치던 밝은 에너지는 여행한 자리에 몽땅 떨어뜨리고, 차분한 기운만이 공항 전체에 엷게 퍼져있다. 우리는 각자의 수화물을 멍하니 집어 들 것이며, 각자의 방향으로 헤어질 것이고, 각자의 기억 속에서 지난 여행을 다르게 간직할 것이다. 딱 한 가지, 공항에서 느꼈던 떨림만은 모두가 같은 기억을 가져간다. 그것은 고속터미널이나 기차역에서는 받을 수 없는 고유한 기운이자 감정이다.


  예상치 못한 질병이 지구를 덮은 지도 일 년이 지났다. 슬프지만, 이 모든 것이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이자 불확실한 미래로 남아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인천공항의 모습을 그려본다. 체크인 시간을 놓칠까 봐 두어 시간 일찍 공항에 도착하고, 프랜차이즈 커피를 손에 든 채 면세점 곳곳을 둘러보고, 출국을 기다리며 하릴없이 허공에 시선을 던진다. 눈앞에 풍경 속에는 각국의 사람들과 그들의 특색이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다. 인천공항의 이런 무용한 요소가 나는 좋다. 무빙워크를 타고 가만히 있으면 흐르는 시간 위에 서있는 것 같다. 널찍한 창으로는 햇살이, 추억이, 떨림이 쏟아져 내린다.


  아마도 닐 암스트롱이 가장 떨렸던 순간은 달에 성조기를 꽂는 순간도, 지구를 바라보는 순간도 아닌 달에 발을 내딛기 직전이었을 것이다. 꿈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벅참, 곧 있으면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도착한다는 설렘, 혹은 죽음을 감수하고도 과감히 발을 내딛겠다는 자신감이었을지도 모른다. 비록 달에 발자국을 남기는 것처럼 거대한 업적을 이륙한 것은 아니지만, 젊음의 한 기록이 일본, 홍콩, 터키와 같은 이름으로 내 안에 들어있다. 눈을 감으면 여행의 추억이 이따금 차오른다. 그 이전과 이후에는 언제나 공항이 있었다. 어쩌면 지난 여행을 떠올릴 때 느껴지는 감정을 나는 인천공항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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