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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ngFei May 22. 2024

자기 연민의 늪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으로

그런 얘기들을 한다. 내 주변도 다 시험관이야.

그래서 온통 성공한 얘기만 들리고 나도 뭐 바로 시험관 하면 바로 아이가 생길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았다.

불임 까페에 가입해서 정보를 좀 얻어볼까 했다가, 십여 차례 시험관으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의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고, 너무나 공감하면서도 너무나 우울해져서 까페를 탈퇴했다.


주변에 비슷한 상황에 있던 모든 친구들은 아이를 품에 안았다. 나만 빼고.

주변에서 뭘 했다 한다 그런 글을 보고 들으며 조용히 나도 따라하며 희망을 가져보고 있었다.

싱서방과는 여전히 자주 싸웠고 그래서 애는 무슨 애 이러다가도 결혼을 했으니 아이도 갖고 싶었다.

내 마음은 늘 복잡했다. 간절했지만 간절하지 않으려고 했고 간절했지만 간절해 보이지 않으려고 했고 간절했지만 아닌척했고, 이렇게 싸우는데 간절했겠니 라며 최대한 내가 안되보이지 않으려고 했던 거 같다.


만나는 지인들 마다 조급해 말고 마음 편하게 먹고…

정말 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다 욕하고 때려주고 싶었다. 내가 뭘 어쨌길래 다들 저 소리를 하나. 내가 그렇게 뭐가 조급해 보이나? 아무리 아닌척해도, 아니 난 조급하지 않은데!! 왜 맨날 저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설령 그렇게 보인다고 해도 꼭 그걸 말로 해야하는걸까? 그냥 결혼하고 시간이 어느 정도 됐는데 애가 없어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내가 시험관을 하고 있는 것도 말한 적도 없는데 어디서 들었나.

그냥 다 포기하니까 딱 생기더래. 맘 편하니까 그런가 봐. 할 만큼 다 해봤어? 한국은 성공률이 높데 한국 가서 해봐.

그 수많은 어쩌고 저쩌고를 내가 안들어봤으며 또한 그들보다 몰랐을까? 사람들을 만나는게 싫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내게 상처 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했고 가까이에 지내는 사람들은 지겹도록 내 눈물을 봤을 거다. 어쩌면 단 한번도 울지 않고 헤어진 날이 없었던 거 같다. 난 뾰족하고 예민하고 어둡고 자기 연민에 빠져 눈물로 세월을 보내는 그야말로 불쌍하기 짝이 없이 내 인생을 낭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 관련 일로 난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아도 만나면 속 깊게 내 얘기를 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너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이와 함께하는 그녀의 삶이 부러웠고 질투가 나는 때도 있었으며, 그녀의 단란한 가족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운적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사건이 있었고, 기분은 좀 나쁘지만 나를 이해해 줄 줄 알았던 친구에게서 나를 상처 주고자 맘먹은 듯한 말들과 비꼬는 말투에 심하게 상처를 받았으며 서로가 화해를 하려고 들수록 더 골이 깊어졌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그녀도 뭐 상황이 있었겠지만, 주변의 백명이 모두 그녀를 높이 사고 칭찬해도 단 한명 나는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화가 난다고 상대에게 상처가 될 말을 골라낸 듯 말을 내뱉는 그녀에게, 그녀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걸 알게 된 충격, 내 마음은 얼어붙었고, 거의 일년을 그녀와 관련된 악몽을 꿨다. 사실 그녀와의 사건은 나에게 아주 많이 힘든 일이었다. 그녀를 같이 아는 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그녀 얘기를 하지는 않았다. 한때는 내 베프였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친구였기에 그리고 여전히 그녀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크기에, 나랑은 멀어지지만 그녀를 욕하고 싶지 않았고 우리가 함께 알고 지내는 사람 또한 너무 많기 때문에 굳이 이런 얘기를 알게 해서 불편함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전엔 모두가 나를 만나면 그녀 얘기를 묻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나에게 그녀 얘기를 묻지 않는다. 그녀가 말했나 보다. 하지만 난 과거의 절친으로서 내가 그녀에게 지키고 싶은 의리를 지켰고, 그 사건 이후로 멀어진 친구들은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어차피 오래갈 사람들도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어쨌든, 거듭되는 시험관의 실패라고도 말할 수 없는 내 몸상태. 과배란을 하는데 난자 한 개도 채취할 게 없던 그런 몸. 호르몬 이상으로 온몸에 한기가 들어 냉장고 문조차 앞에서 열 수가 없었고, 헛땀이 나서 그렇게 추운데 계속 땀을 흘리고 있었다. 한의원서는 이 몸에 임신 어렵다고 했고 지금 시험관 하는 걸 말렸다.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게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었고 이제 나 빼고 다들 아이와 함께하는 단란한 삶을 살고 있는 게 부러워 미칠 지경이었다. 시술을 앞둔 어느 해 저녁, 나는 바닥을 떼굴떼굴 구르며 고통을 호소했고 화장실 바닥을 기어서 나오며 극심한 고통에 다음날 시술을 미뤄야만 했다. 아직도 그 고통이 기억난다.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할 수 있었던 그때의 그 고통. 그리고 그다음 해 나는 큰 수술을 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자다가 싱서방 손을 잡으며 나 진짜 이상해. 어디 아파. 조직검사 결과를 받기 전까지 암일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불안감은 내 인생을 돌아보게 만들었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11일간 가족의 사랑을 넘치게 느꼈다. 언니는 홍콩에서 병간호를 위해 많지도 않은 휴가를 써서 나게에 와줬으며, 싱서방은 그런 엄마와 언니를 위해 병원 바로 옆 호텔방을 잡아 쉬게 해 주고, 번갈아가며 나를 간호했다. 옆침대 당시 40대 중반의 여러 곳에 암이 전이된 해남 언니의 밝은 에너지와 삶의 태도를 배웠으며, 나도 인생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그 우선순위가 확실해졌다.그리고 무엇보다 발벗고 나를 도와줬던 친구 그리고 가까이서 멀리서 응원해주고 찾아와준 친구들.


더 이상 아이가 없음으로 인해 우울하고 어둡게 살지 말자. 내 인생의 모토가 무엇인가. 즐겁게 살자. 각자의 삶이 있는 거다. 내가 늘 하던 말이 아니던가.


그리고 몸을 회복하고 한번 더 시험관을 했고 실패했고, 싱서방과 약속했듯 우리는 더 이상 시험관을 진행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는 동네 산책하다 집 앞에서 아이와 웃고 있는 가족을 보고 동시에 눈에 눈물이 고인적이 있다. 그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런 삶을 원하고 있었던 거다. 나는 그보다 더 많이 표현을 하고 눈물을 보였을 뿐 그도 그동안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다독여주었고 아이는 포기했지만 우리가 함께하는 삶은 포기하지 않게 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끼리 즐겁게 행복하게 잘 살자.

우리는 더 단단해졌다.

물론 계속 싸우지만.. 이젠 이혼 따윈, 헤어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생겼고 서로를 애정하는 부부임을 깨달았달까..?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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