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방울 무리가 왼편 호숫가에서 햇볕에 반짝이며 내 앞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 핸들을 잡고있던 왼손을 뻗어서 방울 하나를 손바닥에 안았다. 오후의 에코파크 호수가 아름다웠고, 누가 만든지 알수없는 비누방울도 마찬가지였다. 자전거 핸들을 잡고있던 그 사람이 뉴진스 멤버중 하나였다면 꼭 청량감이 폭폭 폭죽 터지듯 터지는 광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방울진 거품을 바라보고 하나씩 터뜨리며 하늘을 누비는게 누군가의 일이라면, 나의 일은 거품을 터뜨리는 만큼 구름 아래로 내려앉는 일이다.
사실 방금 쓴 '방울진 거품을 바라보고 하나씩 터뜨리며 하늘을 누빈다'는 부분은 사실 거의 필요가 없는 문장이다. 여기서부터는 실질적인 거품을 넘어서 은유적 거품으로서의 거품을 얘기해보자. 뉴진스의 버블검은 그러니까 이제부터 논외다. 버블 경제의 그 버블이 이제부터 얘기할 버블이다. 흔히 뒷담화에서 그사람 순 거품이라고 말할때의 거품이 지금부터 얘기할 거품이다. 거품을 터뜨린다. 거품을 죽인다. 아마도 시작은 처음으로 건축 디자이너라는 가슴벅찬 포지션으로 나에게 오퍼레터를 보내준 그 회사에 퇴사 메일을 보내던 그날이었을 것이다.
어느 부자가, 미국 어느 부자 동네에, 꽤나 부티나는 건물을 증축한다던 그 부스스한 프로젝트가 그렇게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었다. 거품이 터지고 나면 앞서 말했듯이 터진 거품의 체적만큼 가라앉는게 있다. 그렇게 가라앉아 도달한 곳이 콤튼 근처의 한 공사장이다. Compton. Straight out of 콤튼. 그 콤튼. 힙합을 좋아하던 예전 회사 동기가 말하던, 한가닥씩 한다는 래퍼들이 살던 슬럼가라는 그 콤튼이 그 콤튼이었다. 공사장에서 나의 일은 당연히 공사 인부다. 컨스트럭션 크루, 무급 컨스트럭션 크루. 저소득층에 주택을 공급하는 활동을 하는 NGO의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방울이 터진뒤 내려간 곳에는 먼지가 자욱하다. 현장 감독인 마크는 공사 자재를 쌓아놓는 창고의 먼지를, 모터로 바람 뿜어내는 기계로 겉어내고 있었다. 그 짙은 모래안개 속에서, 유압장치로 박아넣은 못을 충분히 표면 아래로 박아넣기 위해 빌렸던 핀 하나를 다시 마크에게 돌려줬다. 마크는 먼지 속에서 다스베이더처럼 나타나서 핀을 돌려 받았다. 마크가 몇일전 공사중인 주택의 실시도면을 PDF로 공유해 줬을때에도 버블이 하나 터지는 소리가 뽁 하고 났었나.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비누방울을 터뜨리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어느 부자를 위해, 어느 부자동네에, 꽤나 부티나는 건물을 고쳐짓기 위한 실시도면을 부스스하게 그리고 있었을 뽁.
오늘 내 왼손으로 터뜨린 에코파크 호숫가의 비누방울은 뭔가를 가르쳐준다. 거품을 뽁 하고 터뜨리는건 뭔진 몰라도 무엇인가를 넘어서는 일이다. 넘어서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다. 넘어선다는 말이 더 높이 오른다는 말과 항상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넘어서 더 깊이 내려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누방울을 만드는것도 재밌지만 하늘하늘 날아가는 방울들을 터뜨리는 것도 그못지 않게 재밌다. 풍선검을 부는것도 마찬가지다.
풍선검을 불때 우리는 대체로 더 큰 풍선을 불어나간다. 적당한 크기의 풍선만 반복해서 부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풍선껌은 한계점을 넘어 터뜨리는게 재미다. 터질듯 말듯한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면서 풍선껌을 불고, 결국 터져버린 껌을 다시 씹는다. 피자도우처럼 골고루 씹어 다진다. 다시 씹는건 한번더 풍선검의 한계를 시험하기 위해서다. 의미없는 한계에의 도전과 의미없는 폭발이 이렇게 계속된다. 이렇게 진지할 일이 아니지만 그게 바로 풍선껌의 진실이다. 풍선껌으로 불어놓은 풍선이 터진다. 거품이 터진다. 방울이 터진다. 별일 아니다. 다시한번 풍선을 부는데 거창한 용기가 필요한건 아니다. 뉴진스의 버블검 뮤비를 한번더 보기로 한다. 나는 정말로 뉴진스 팬이 된건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