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저런 얘기 중에 지난번 선생님과 나눈 탁월함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탁월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는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더니 엄마는 이야기했다.
"딸아. 우리 모두는 탁월하단다. 다들 각자의 영역에서 잘하는 게 있지. 네가 탁월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부분은 아마 현재의 직업 때문일 텐데, 사실 살면서 그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야. 엄마도 그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어. 근데 아니더라. 탁월함은 직업 그 자체보단 그 일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달려있지. 엄마는 행복은 계속 확장되는 거라고 생각해. 나의 행복이 가족의 행복이 되고, 이웃의 행복이 되고, 세계의 행복이 되고 이렇게 계속 확장되는 거지. 그래서 엄마는 엄마 자신과 주변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려 해. 오늘 주문받은 꽃다발을 어떻게 하면 예쁘게 만들까, 어떻게 싱싱하게 잘 배달되게 할까, 어떤 걸 더하면 받는 분이 더 행복해질까, 이런 걸 고민해. 엄마는 이런 것이 탁월함에 가까운 거라고 생각해. 어떤 직업이 특별히 탁월한 게 아니라."
엄마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네 말처럼 목적지향적인 삶 이런 건 좋은 삶의 방향은 아닌 것 같아. 엄마아빠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고 그게 널 키운 방식이기도 해. 희소 너는 구직활동이나 면접을 많이 봐보지 않았기에 그런 게 어려울 수 있어. 근데 그건 안 해봐서 그런 거란다. 너는 이미 충분히 훌륭하지만 그 단계에서는 미숙할 수 있지. 그건 여러 번 해보면서 너 나름의 데이터를 쌓고 노하우를 만들어가면 돼. 앞으로 일할 날들이 길 텐데 그 긴 호흡에서 보면 지금의 몇 달은 아주 짧은 찰나일 거란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지난 30년 동안 부모님이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를 돌아보았다. 핀란드로 날아온 편지에서 느낀 것처럼 난 참 한결같은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그리고 지난 30년간 나를 길러낸 그 교육관이 나의 가치관에 녹아있었다. 이게 맞나 하는 의구심 어린 마음에 엄마는 마치 고성능 유리세정제를 뿌리듯 내 마음을 닦아냈다. 탁월함에 대한 엄마의 이야기는 맞는 말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꽃수저, 꽃집딸로서의 자부심은 우리 부모님이 '꽃집'을 운영하셔서가 아니라 꽃집을 '진심'을 다해 일구고 운영하시기 때문이다. J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대기업에 다녀셔가 아니라 그가 스스로 공부하고 고민하며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작은 일, 큰 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남들이 직업만 들었을 때 멋진 직업이 되냐 마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떻게 대하고 가치를 만들어 갈까가 중요한 거였다.
무언가를 꾸준히 잘 해내는 사람은 뇌의 aMCC라는 곳이 발달되어 있다는 영상을 보았다. 꾸준히 해서 결국 뭔가를 해내는 사람의 특징을 분석하는 뇌과학에 대한 영상이었다. 올림픽에서 신기록이 갱신하는 운동선수들을 보면 그 부분이 발달해있다고 한다. 영상의 썸네일에는 피겨 김연아 선수의 '그냥 하는 거죠'라는 유명한 인터뷰 장면이 삽입되어 있었다. 어릴 적 김연아 선수의 경기영상만 보면 눈물이 나곤 했다. 이 감정이 무엇일까를 한참 고민했었는데, 부러움란 결론을 냈었다. 누군가 몰입해서 성과를 일궈내는 모습을 보면 항상 감동받았다. 그런데 오늘 그 영상을 보니 담담하게 무언가를 꾸준히 해내는 나도 어쩌면 그 부분이 발달한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J에게 영상을 보내며 물었다. 나도 aMCC가 발달한 걸까? 응, 희소는 그게 좀 타고난 것 같아, 란 답이 돌아왔다. 전문가의 진단을 받은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연아와 내가 닮아 있다니! 어쩌면 나도 어떤 분야에서는 최고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쓰고 나니 어디 도덕책에 나올 이야기를 한 것 같지만 이런 생각정리가 나 스스로에겐 무척이나 큰 발자국이다. 요 며칠간 30년 동안 잘 풀리지 않았던 나란 사람을 정의하는 문장들이 몇 개 정리가 된 느낌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내 모습이 나는 좋다. 부끄럽고 부족한 모습이 당연히 있겠지만 나는 나를 객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언어로 정리하고 싶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를 도와준 주변 사람들의 말들이, 마음이, 눈빛이 따듯했다는 점이다. 어느덧 아침바람이 차갑게마저 느껴진 9월의 첫 월요일, 늦봄과 여름을 지나 가을을 마주한 오늘 나는 조금 더 또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