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고, 어디로 가는가

Old course, St. Andrews, Edinburgh, UK

by 달을보라니까

몇 해전, 골퍼라면 한번쯤 생각해봤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의 올드코스를 다녀왔습니다. 가고 오는 길도 멀었지만, 올드코스라는 상징적인 이름에서 인해 이번 여행은 더욱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올드코스는 아무도 이곳이 무엇을 위해 사용될 것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만들어졌고, 그 이후에는 너무도 신성시되어 누구도 다시 손대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코스보다 월등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 아마도 올드코스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인것 같습니다. 그런 만큼 영원한 시간 속에서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는 낭만적이고 사변적인 곳이면서 동시에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해 철저히 상업화되고 물신화된 곳 입니다.


파괴되지 않은 중세를 보고 싶다면 에딘버러로 가라고 했던 여행 잡지 구절처럼 시내를 가득 채우고 있는 유물과 유적로 인해 이곳에는 마치 중세의 오후가 정지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들 보다 더 뚜렷한 역사성은 바로 이곳이 고전 경제학의 틀이 잡힌 곳이자 농민을 토지에서 유리시킨 종획운동enclosure movement의 근거지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온 사방 눈에 보이는 것은 언제나 똑같았을 것 같은 목가적인 풍경이지만, 그 이면에는 정치와 경제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시대에 따른 변화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은 충분히 역사적이고 목가적이면서도 매우 자본주의적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올드코스라는 희소자원을 분배하는 방법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오염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돈이 모든 판단의 최우선이었다면 올드코스는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올드코스는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돈을 쓰게하고, 시간이 많은 사람은 시간을 쓰게 합니다. 그리고 돈도 시간도 넉넉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매일 매일 추첨으로 티타임을 배정합니다. 뽑기에서도 실패한 이도저도 안된 사람은 당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줄을 서면 선착순으로 빈자리를 차지 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돈이 있거나 시간이 많거나 운이 좋거나 부지런하거나 넷 중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이곳에서 라운드 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은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회원제 코스들이나 백만원을 훌쩍 넘는 호텔 패키지를 사지 않으면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미국의 유명 코스들과 비교해 볼 때 놀랍도록 점잖고 세련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성숙이라고 혹은 인간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결국에는 각 개인이 지불 할 수 있는 최대의 금전적 혹은 비금전적 자원을 뽑아내는 지속가능한 착취의 파이프라인이기 때문이고, 찬 바닷바람을 맞으며 시멘트 바닥에서 밤을 새는 사람의 꺼칠한 모습은 피를 뽑아 주고선 영화관에 들어가는 가난한 연인들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한때 양치기들의 놀이였던 것이 누군가에는 의미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 의미를 찾는 수 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무거운 골프백을 끌고 에딘버러 공항에 내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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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코스 1번 홀 티박스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또한 가장 부담스러운 티박스일 것입니다. 티샷이 우측으로 흐르면 여지 없이 OB가 되고 좌측으로 가면 작은 도랑에 빠지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이 홀의 가장 큰 장애물은 영국골프협회 R&A 건물 앞에서 그것도 바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가고 소근대는 와중에 티샷을 해야 하는 부담감입니다. 마치 광장에 서 있는 것 같은 부담감입니다. 티박스 주변으로는 아직 올드코스 티타임을 얻지 못한 사람들과 이곳에서 라운드 했던 사람들의 기쁨과 기대와 아쉬움과 후회가 자잘 자잘 뒤섞인 속닥거림이 흘러갑니다. 앞으로는 페어웨이 가운데로 사람들과 자동차가 뒤섞여 지나가고 옆과 뒤에서는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스타터는 참으로 노련합니다. 중년의 그녀는 주변의 모든 것들을 압도하는 당당한 자세로 악수를 청하고 어디에서 왔는지 왜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러나 골퍼들의 신경이 흩어지지 않을 정도의 페이스로 이야기 하면서 모두가 제대로 첫 티샷을 할 수 있는 리듬과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이 멀리 올드코스에서의 티샷이 그동안 내가 해왔던 수많은 첫 홀 첫 티샷보다 훨씬 덜 부담스러웠던 것은 마치 구령 소리에 발을 맞추는 것 처럼 그녀가 만들어준 리듬을 탔기 때문입니다. 오후 4시가 넘어 시작한 라운드는 저녁이 되면 강해지는 뒷바람을 안고 있습니다. 실개천의 스코틀랜드식 표현인 Burn을 넘기려면 90야드를 캐리해야 하고 핀까지는 다시 30야드입니다. 바닷바람이 높은 탄도의 피치샷을 밀어줄거라 생각하고 피칭을 컨트롤해서 100 야드를 치기로 마음 먹습니다.


전반과 후반이 모두 클럽하우스에서 출발했다가 돌아오도록 설계된 대부분 골프코스와는 달리 올드코스는 전반 9홀은 모두 직진해서 나갔다가 12번 홀 부터 반대방향으로 거슬러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반은 뒷바람을 안고 가고 후반에는 맞바람을 거스르는 샷을 해야 합니다.


4번홀은 Ginger Beer라 불리는 약간 긴 410야드 파4 홀입니다. 지금까지의 홀들과는 다르게 중간에 살짝 솟아 있는 러프지역이 진행방향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티박스에서면 어디를 겨냥해야 할지 당황스럽집니다. 홀 중간에 있는 러프 지역을 넘겨보기로 합니다. 캐리로 220야드를 보내야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언제 다시 와볼지 모르는 코스에서 당장의 스코어를 위해 피해가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 핀까지는 160야드가 남았습니다. 평소라면 7번 아이언보다 긴 클럽을 택했겠지만 지금처럼 강한 뒷바람 생각하면 7번 아이언도 너무 크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7번과 8번을 들고 생각하다가 8번으로 조금 강하게 치기로 마음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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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 홀에서 길을 잃습니다. 11번 홀에서 티샷한 공이 7번 홀의 페어웨이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잘못친 10번 홀의 세컨 샷은 7번홀 페어웨이에 떨어집니다. 참 복잡한 홀입니다. 10번과 8번 홀이 그린을 같이 쓰고 있고, 다시 7번과 11번 홀이 더블그린이기 때문에 어느 지점에서는 네게의 핀이 보이기도 합니다. 티샷을 마치고 세컨 지점에서 한참을 살펴보고서야 내가 가야할 홀의 위치를 확신 할 수 있을 만큼 사실상 네개의 홀이 서로 마주치고 있습니다. 이들은 이 복잡한 구성을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만, 특이하다고 해야 할지, 인상적이라고 해야 할지 엉망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전반을 마치는 9번 홀 파4입니다. 지금까지 파 네개 보기 네개이니 잘하면 올드코스에서 70대 스코어를 기록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보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나중에 두고 두고 할 말이 많을 것 같습니다.


10번 홀에서 오늘의 첫 버디가 나왔습니다. 뒷바람을 타고 날아간 티샷이 깔끔하게 페어웨이로 떨어졌고 80야드 피치샷이 핀에 붙어서 의외로 너무 쉽게 버디가 됐습니다. 아까 9번 홀에서 잃은 타수를 만회하고 이제 4오버. 좋습니다.


후반에 들어서자 바람이 적군으로 바뀝니다. 거의 항상 두클럽 이상을 길게 잡아야 하는 앞바람이 부담스럽습니다. 게다가 14번 홀은 Long이라 불리는 인덱스 1의 523야드 파5입니다. 다행히 드라이버가 잘 나왔지만 가야 할 길은 300야드가 훨씬 넘습니다. 우드를 꺼내드는 내게 캐디가 손사래를 칩니다. 정면으로 치면 잘해야 러프이고 운 없으면 항아리 벙커에 빠지기 십상이니 10시 방향으로 칠 수 있는대로 최대한 길게 치라고 합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의 조언을 따랐지만 남은 길이 험하기만 합니다.


세인트 앤드류스 호텔이 정면에 보이는 17번 the Road 홀에 왔습니다. 많은 역사가 만들어진 홀입니다. 좌측으로 튀어나온 2층 높이의 호텔 부속건물을 넘기는 캐리 200야드의 티샷을 해도 투온이 쉽지 않은 436야드 파4입니다. 캐디는 굳이 무리해서 건물을 넘기려 하지 말고 좌측으로 피해 가라고 합니다. 전략적으로 티샷하면 보기는 쉽게 할 수 있다고.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잘해야 보기인 샷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호텔의 루프탑에는 나와 같은 목적으로 이곳에 왔을 사람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 홀에서의 티샷을 구경하고 있습니다. 박수를 치기도 하고 환성을 보내고 또한 긴 탄식도 나옵니다. 그 중에서 내것은 어느 것일까 싶어집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저곳에서 누군가에게 박수를 보내주고 싶습니다. 가끔은 욕심을 부리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열쇠라고 믿고 싶습니다. 그러나 열쇠는 또한 자물쇠이기도 합니다. 건물을 넘겼지만 힘을 받지 못한 내 공은 슬라이스 바람에 밀려 호텔 구석 어디론가 떨어졌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갑자기 오래된 미국드라마 로스트Lost의 주인공 케이트가 생각납니다. 살인혐의를 받고 쫓기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성실하고 인간적이었던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두번째 기회. 그러나 두번의 기회는 없습니다. 4온 2펏으로 마무리하고 올드코스의 마지막 홀 18번으로 갑니다.


스웰컨 다리를 건너 첫 티샷때 처럼 많은 사람들이 흥미롭게 쳐다보고 있는 18번 홀 그린에서 탭인을 하고 돌아서는 내게 몇몇이서 보내준 박수에 마치 토너먼트의 우승자처럼 모자 챙을 잡고 인사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에 내 기억에 어딘가 섞여 가라앉을 올드코스의 하루를 보내줍니다.


한편으로 기쁘고 흥분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허무하고 아쉬운 기분으로 벤치에 앉아서 이때를 위해 챙겨온 시가에 불을 붙힙니다. 그리고 누구나 한번쯤은 고민해 봤을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며 오늘은 좀 천천히 움직이기로 합니다.


짧은 북유럽의 여름 밤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