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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곰기획 Mar 22. 2022

지금은 돈 대신 시간을 산 거고 저희한테 필요한 거죠

디자이너이자 유튜브 채널 '윤슬의숲' 운영자 김슬기, 나윤호 님 인터뷰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라고 시작하는 동요에서 옹달샘 맑은 물을 먹는 건 새벽에 일어난 토끼와 달밤에 숨바꼭질하던 노루다. 이 동요를 부르지 않는 나이가 된 후로 깊은 산속 옹달샘을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너무 멀고, 너무 높고, 말 그대로 너무 깊은 곳에 있어서. 그런데 우연히 TV에서 해발 650m 깊은 산속에 살면서 갈천약수를 길어 밥을 지어먹는 사람들을 보았다. 김슬기, 나윤호 님은 양양 읍내에서 30km 떨어진 구룡령에 집을 지었다. 그들을 만나러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고라니나 멧돼지가 튀어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겠다 싶었다. 마침내 도착한 집은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천장처럼 머리에 이고 있었다.


같은 대학에서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선후배 사이였던 슬기 님과 윤호 님은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양양으로 귀촌했다. 윤호 님 부모님이 이미 오래전 양양에 귀촌해 살고 계셨고, 서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는 일도 순조로웠다. 하지만 갑자기 주어진 시간 뭉텅이 앞에서 초대한 적 없는 불안이 찾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나 겪는 고민이라고 해서 내 몫의 그것이 덜 무거울 리는 없다. 힘든 시간을 겪었지만 두 사람은 귀촌을 후회하지 않는다. 서울에서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울에서 살던 것과는 다르게 살기 위해 이곳에 왔기 때문이다. "당장 조금 불안하고 걱정이 되더라도 버텨서 내성이 생기게 해야겠다"고 말하는 슬기 님의 얼굴은 아주 단단했다. 

     


우연히 두 분이 출연한 방송(EBS1 <한국기행> ‘눈 떠보니 구룡령’ 편)을 봤어요. 얼마 후에 인터뷰이로 추천을 받아서 신기하고 반가웠습니다. 두 분은 언제 양양에 왔어요?

나윤호: 2020년 5월 말에 왔어요. 아내와 저 둘 다 퇴사하고 집 내놓고 정리하고 왔어요.

김슬기: 나는 좀 먼저 퇴사했지. 저는 2020년 새해가 시작되면서 퇴사를 했거든요. 이제 그만 다녀도 되겠다 싶었어요. 정말 지옥 같은 야근을 했어요. 자율 출근제라 오전에 좀 늦게 출근할 수 있었다고 해도 퇴근하고 집에 오면 늘 자정이 넘어 있었어요. 


어떤 일을 하셨어요?

김슬기: 애니메이션 전공이어서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배경을 그리는 일을 했어요. 우연한 기회로 광고 기획을 비롯해 미디어 전반을 다루는 회사에 들어가게 됐어요. 콘티도 그리고 미디어 디자인도 하고 편집 디자인도 하고. 전부 일 하면서 배웠어요. 그런 걸 배우고 다시 입사한 회사가 끝판왕이었죠. 지옥의 야근을 하는. 전광판에 들어가는 영상 디자인도 하고 외주사 관리도 하고 온갖 일을 했어요. 저한테 안 맞더라고요. 제 역량을 벗어나는 일이고, 하면 하겠지만 책임감으로 하는 거였고요. 이 일을 하면서 계속 살 수 있는가 생각했을 때 답은 ‘아니다’더라고요. 그래서 퇴사를 했어요. 지금은 다시 애니메이션 일을 하고 있고요. 예를 들어 교육용 애니메이션 중에 숫자 1, 2, 3 이런 걸 배우는 콘텐츠가 있으면, 핑크퐁이나 뽀로로 캐릭터 뒤에 배경 디자인이 필요하거든요. 그런 작업을 하고 있어요. 


슬기 님이 퇴사를 할 당시에는 양양으로 오는 걸 결정한 건 아니었어요?

김슬기: 아무 계획도 하지 않았어요. 제가 먼저 퇴사를 하고 양양으로 가는 걸 결정한 뒤 남편도 퇴사를 한 거예요.


윤호 님은 어떤 일을 하셨어요?

나윤호: 아내와 저는 같은 학교 같은 과를 졸업했어요. 처음에는 광고회사에 다녔고 다음에는 영화 만드는 곳에서 일했어요. 3D 작업 같은 걸 했죠. 그 일이 너무 힘들고 환경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 대전으로 가서 군사 훈련 시뮬레이터 만드는 곳에서 일을 했어요. 육군, 해군 쪽에 장비를 납품하고 사후 관리하고. 그쪽 관련된 일을 계속하다 보니까 처음에 개발자였다가 나중에는 관리자가 되었죠. 대전에서 한 7년 정도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도 군사 시뮬레이션 타워 만드는 곳에서 일했어요. 



두 분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윤슬의 숲')을 찾아봤어요. 제주도 여행이 서울을 떠나 양양으로 가는 결심을 하는 계기가 된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양양에 지인이나 가족이 있었나요?

김슬기: 남편 부모님이 바로 윗집에 살고 계세요. 그런데 두 분도 양양이 고향은 아니고, 이곳으로 오신 지 20년이 조금 안 되었어요. 부모님도 연세에 비해 일찍 귀촌하셨죠. 당시 40대였으니까요. 


윤호 님은 양양으로 이주하기 전에도 부모님이 있으니까 자주 오가셨나요?  

나윤호: 한 달에 한두 번은 항상 왔어요.

김슬기: 결혼하고도 한 달에 한 번은 부모님을 뵈러 왔어요. 


그럼 귀촌하기로 결정했을 때 지역은 양양이 가장 자연스러웠어요?

김슬기: 언젠가는 가겠지만 부모님처럼 나이가 들었을 때라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죠. ‘나중에 50대쯤 되면 우리도 양양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제주도 여행을 갈 때가 제가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하는데 갑자기 일이 끊겼을 때예요. 프리랜서가 되고 나서 일이 끊긴 적이 없었는데 한 4개월 정도 일이 없는 거예요. ‘큰일 났다, 다시 회사에 들어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했는데 다시 취직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즈음에 살고 있던 집 계약 기간이 끝나서 갱신을 하거나 이사를 해야 했어요. 주변에서는 “결혼도 했는데 집을 안 사니?” 이런 얘기를 슬슬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저희는 전혀 관심이 없고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관심이 없으니까 정보는 당연히 없죠. 그래서 이사 갈 전세금이나 모으기로 합의를 했어요. 이렇게 소박하게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하면서 한창 여행 가고 싶을 때라서 제주도에 갔어요.


그게 슬기 님이 몇 살 때인가요?

김슬기: 서른셋인가? 최근에 제주도로 귀촌한 사람이 되게 많잖아요. 귀촌한 분이 하는 카페에 갔는데 그곳에서부터 남편 마음이 두근두근 했대요. 여행에서 돌아와서 진짜 뭔가 우당탕! 쿵쾅! 하듯이 일이 진행됐어요.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죠. 


‘봉인 해제!’ 같은 걸까요?

김슬기: 남편이 처음에는 좀 망설였어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으니까 양양 가서 뭘 할 수 있나? 돈을 벌어야 하는데 뭘 해야 하지? 집을 지어야 하는데 나는 지금 전구도 교체 못하는데? 이런 물음이 계속 이어지는 거죠.


유튜브에서 보니까 집 짓는 과정에 두 분이 굉장히 많이 참여를 했더라고요.

김슬기: 전구 같은 건 관심도 없고 항상 남이 했으니까 본인이 안 해도 괜찮았죠. 그래서 남편이 집 짓는 걸 배우러 목수 학교를 가겠다는 거예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까 목수 학교를 얼마나 다녀야 하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가 지금 결심을 했는데 학교에 다니면 “내년에 가자, 다음에 가자.” 이럴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회사를 그만두라고 했어요. 제가 뭐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괜찮을 것 같았어요. 일단 회사 그만두고 집을 짓고 나면 그다음은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어요. 다행히 상황이 도와줬어요. 진짜 일이 일사천리로 풀려서 서울 집도 바로 빠지고요. 제주도 다녀온 뒤 한 달 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다 털고 모아놓은 것도 없으면서 양양으로 왔어요. 집을 다 지었을 즈음에 진짜 통장에 300원 남아 있었어요. 인생에 처음 겪어보는 잔고. (웃음) 모든 걸 통틀어서 300원밖에 없는 거예요. 


집을 짓는 동안 일정한 소득이 없었던 것도 이유겠지만, 집을 지으면서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계속 생겨서 예산 범위를 넘어서기도 했겠어요.

나윤호: 네, 공사 기간 동안 비가 많이 왔어요.

김슬기: 아무래도 뭐든지 계획대로 딱 돈이 떨어지진 않잖아요. 그러는 중에 갑자기 저한테 일 의뢰가 들어왔는데 돈을 먼저 주겠다는 거예요. 그때 또 한 번 놀랐어요. 우린 집을 지을 운명이구나! 그걸로 막 쓰고 또 벌고 쓰고. 되게 다행이었죠. 그 일 아니었으면 진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텐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거죠. 그 일을 잘 끝내고 나니까 또 다른 일이 이어지더라고요. 


집을 짓는 동안 부모님 댁에 함께 사셨어요? 그 기간이 총 몇 개월 정도였어요?

나윤호: 짓는 것만 꽉 채워서 4개월 걸렸어요.


비가 많이 왔는데도 그 정도면 빠른 편이지 않나요?

김슬기: 거의 안 쉬고 작업했어요.


인터뷰를 하러 이곳에 오면서 집 공사가 정말 힘들었겠구나 싶었어요. 해발 650m 구룡령이잖아요. 집 짓는 일이 원체 보통 일이 아닌 데다가 여기는 읍내에서도 30k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니까요.

김슬기: 확실히 운반비가 더 들더라고요. 기준 운반비에서 저희 집까지 오면 “이만큼 더 주셔야 해요.”라고 해요. 

나윤호: 양양에서 조달했으면 자재 값도 엄청 비쌌을 텐데 다행히 목수님을 잘 만나서 경기도권에서 가져왔어요. 

김슬기: 되게 좋은 분을 만나서 알아서 주문도 해주시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을 해주셨어요. 

나윤호: 저희가 목수팀한테 4개월 동안 집을 지어달라고 계약을 해서 지은 게 아니고 지인 중에 되게 잘하는 목수 팀이 있었어요. 그 팀이 잠깐 3, 4개월 쉴 때 쉬지 마시고 같이 일 하자고 한 거예요. 가진 돈도 이게 전부라고 솔직히 얘기를 했어요. 그걸 보시고 목수 팀장님이 일단 본인 인건비는 안 받겠다고 하셨어요. 경력이 되게 긴 분이라 인건비가 좀 비싸거든요. 저희 사정을 아니까 본인 대신 팀원 목수 두 명으로 집을 짓고 그들 인건비를 잘 챙기라고 하셨어요. 팀장님은 왔다 갔다 하면서 봐주시고 목수 두 분이랑 저, 와이프 이렇게 네 명이 집을 지은 거죠.


정말 좋은 분을 만났네요.

김슬기: 솔직하게 “저희는 돈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하실 수 있으세요?” 이렇게 물어봤는데 오히려 그 말에서 ‘얘네가 나한테 간 보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얘기해줬고 젊은 애들이 집 짓겠다고 하니까 내가 도와줘야겠다.’ 이런 마음이 딱 드셨다고 해요.  



집 지으면서 윤호 님은 체중이 7kg이나 빠지셨다고요.

김슬기: 그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죠. 남편이 공사 현장에 갔다가 돌아올 때마다 반쪽이 돼서 왔어요.


너무 힘들면 살이 빠지는 게 아니라 내린다고 표현하잖아요. 슬기 님도 고생 많이 하셨겠네요.

김슬기: 주변에 식당이 없어서 식사를 직접 마련해야 했어요. 저랑 어머니가 함께 했는데, 매 끼니를 하면서 요리가 많이 늘긴 했죠. 

나윤호: 일하는 사람도 단순히 목수 2명이 아니었고, 만약 외벽 마감을 친다고 하면 전부 12명까지도 늘어났죠.

김슬기: 마치 잔치를 해야 할 대용량 음식을 만들었어요.


함바집을 여기에 차리셨군요. (웃음)

김슬기: 식사를 잘 챙겨야 한다고 들었거든요. 신경을 많이 쓰긴 했는데 그러면서 되게 많이 친해졌어요. 그분들도 힘들어도 많이 도와주셨고요. 


슬기 님은 프리랜서로 계속 일을 했고, 윤호 님은 회사를 그만두었으니까 양양에서는 새로운 도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거죠?

나윤호: 그렇죠. 그런데 저도 디자인을 전공했기 때문에 익숙해지면 같이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지금 아내와 같이 일하고 있어요. 의뢰를 받으면 나눠서 빨리 작업해서 넘기는 거죠. 평일에는 그 일을 하고 주말에 카페에서 일하는데 사실 돈은 얼마 안 돼요. 하지만 돈 자체보다 더 얻은 게 많아요. 양양에 아는 사람이 없었잖아요. 그런데 처음 귀촌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카페더라고요. 거기서 만나는 청년들과 마음이 잘 통해요. 성향이 비슷하고 귀촌한 사람들이라 같이 뭔가를 해볼 수 있는 기회도 생기고요. 모여서 밥 한 끼를 먹고 얘기할 수 있는 친구들이 생기는 거죠. 


양양에 와서 카페에서 일하기 전에도 아르바이트로 카페 일을 해본 적이 있었어요? 

나윤호: 아니요. 유튜브 보면서 연습했어요.

김슬기: 맨날 유튜브 보면서 “이거 이렇게 하는 거래.”라고 제게 보여줬어요. 

나윤호: 처음 일했던 논화리의 팜일레븐 카페는 워낙 손님이 많아서 하루에 한 100~200잔 커피를 만들었어요. 그만큼 커피 내리면 다 하게 돼요. (웃음)


하드 트레이닝을 하셨군요.

김슬기: 저는 좀 걱정했거든요. 남편이 다른 아르바이트는 해봤는데 카페 일은 안 해봤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남편 장점이 적응력이거든요. 빨리 배우고 적응을 잘하고 사람 대하는 걸 잘해요. 그래서 사장님도 되게 좋아하셨어요. 

나윤호: 손님 컴플레인에 대처를 잘하니까 좋아하셨어요. 그런 건 꼭 업계에서 오래 일했다고 잘하는 건 아니더라고요.


제가 듣기로 슬기 님은 운전을 안 하신다고 하던데, 불편하지 않으세요?

김슬기: 면허를 갱신할 때가 됐는데 지금까지 운전을 한 두 번 정도 했어요. 그것도 한 30초 운전했는데 내리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냥 직진을 했을 뿐인데 옆에서 보는 사람은 편하지 않은가 봐요.

나윤호: 이 친구가 우회전을 못해요. 좌회전은 할 수 있는데. 

김슬기: 그리고 제 키가 엄청 작지 않은데 운전석에 앉으면 뭔가 푹 들어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목을 빼고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또 내비게이션도 잘 못 보거든요. 지금 이 길에서 들어가야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남편이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그때 운전을 하래요.  


저도 운전이 익숙하지 않았는데 양양에서는 어쩔 수 없이 운전을 해야 하니까 처음에는 그게 부담이더라고요. 하지만 내가 운전을 하지 않으면 누구도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주지 않으니까 꾸역꾸역 했어요. 

김슬기: 맞아요. 지금 제가 지금 그래요. 


윤호 님은 카페에서 일하면서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만나기도 하는데 슬기 님은 상대적으로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거나 고립감을 느끼기도 하시나요? 

김슬기: 저는 혼자 있을 때 더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니에요. 혼자 있는 게 편하고 오히려 누군가를 갑자기 만나야 하는 상황이면 아침부터 막 심장이 두근두근 해요. 딱히 그 사람이 무서운 사람도 아닌데, 그냥 ‘아, 어떡하지?’ 이런 기분이 들어요.


그러다 약속이 취소되면 살짝 기쁘기도 하죠. 저도 그래요.

김슬기: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예요. 예전에는 낯을 많이 가려서 말도 잘 못했는데, 사회생활이란 걸 하다 보면 달라지더라고요. 지금은 남편이 제 성향을 잘 아니까 카페 일을 하면서 본인이 만나보고 이런 사람이면 제가 만나도 좋겠다 싶은 사람은 소개를 해줘요. 점점 저도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에 부담을 덜게 되었어요. 지금은 좀 편해진 상태예요. 적당히 혼자 있는 시간도 가질 수 있으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자연스럽게 만나고요.


그런 성향이나 지금 같은 환경이 프리랜서로 일하는 데도 잘 맞는 거잖아요. 저도 프리랜서로 일할 때 느낀 게 정말 일만 끊이지 않고 있으면 나는 죽을 때까지 프리랜서로 살 수 있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누군가가 나에게 일을 주지 않으면 가능하지 않은 구조에서 오는 근본적인 불안감은 지울 수가 없죠.

김슬기: 정말 운이 좋았던 게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할 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누가 제안을 해줬어요. 업계에서 일을 오래 해왔으니까 이런 사람이 있다더라 하고 알려져서 일을 시작했죠. 그런데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일이 딱 끊기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일이 없어서 안 오는 건데 저는 일이 필요하니까. 불안감이 컸던 게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게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더라고요. 집에 드는 돈도 크고 생활에 드는 돈도 많고. 오히려 여기서는 저희가 되게 적게 벌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돈 쓸 일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일이 없는 그 시간에 뭔가 다른 걸 조금 더 해서 일이 끊겨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한번 만들어보자 라는 생각이 생겼어요. 최종 목표는 일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 조건, 즉 시스템에서 벗어나는 거고요. 서울에서는 진짜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으니까 여유가 없었어요. 프리랜서이지만 회사에 안 갈 뿐이지 직장인처럼 일했어요. 지금은 내가 뭔가 해야 하는 게 있으면 조금 돈을 덜 벌고 일을 안 하고 그 시간에 시간과 노력을 써서 좀 더 멀리 내다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어요. 


인생을 크고 넓게, 멀리 볼 수 있게 된 거네요.

김슬기: 예전에는 진짜 코앞만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바로바로 마감을 쳐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죠.

김슬기: 그리고 그때는 금전적인 게 되게 크게 와닿았거든요. 지금은 좀 벗어났어요. 물론 돈은 없어요. 그냥 “돈 없다~ 그림 그려야지~”라고 받아들이고, 누워 있어요. (웃음)



개인 작업은 어떤 걸 하세요?

김슬기: 이모티콘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고, 만화 전공이니까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해요. 그런데 개인 작업을 하겠다고 생각을 한 게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은 이런저런 방향으로 콕콕 찔러보면서 하고 있어요. 제가 남들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 천천히 하고 있어요.


윤호 님은 한 직장을 7년 다녔다는 데서 뭔가 조직 생활을 상대적으로 잘 해내는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도 괜찮을까요? 그렇다면 오히려 월급이 매달 나오는 게 아닌 상황에 놓였을 때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아요.

나윤호: 저도 회사 다닐 때 작업실을 따로 차렸어요. 대전에서는 목원대학교에 작업실을 차렸고 서울에서도 근처에 작업실을 임대해서 사람들과 함께 작업했어요. 미술이 전공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회사는 돈 버는 곳이고 나의 창작 요구는 따로 풀겠다는 생각을 계속한 거죠. 그런데 주중에 회사 다니면 너무 피곤하고 주말에 놀고 싶고 열심히 일한 것에 대해 보상 욕구도 있으니까 나가서 돈도 써야겠고 뭐도 사야겠고 그렇잖아요? 결국 창작에 소홀해지는 거죠. 결국에는 그만두고 양양에 오게 된 건데, 여기 와서는 막상 제가 이 시간을 활용을 못 하겠더라고요. 이 시간이 불안으로 바뀌는 거죠.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되나? 나가서 뭐라도 해서 돈 벌어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압박에 처음에는 진짜 잠도 못 잤어요. 공황장애라고 생각할 정도로. 저도 살면서 처음 경험한 건데, 자려고 누워 있으면 우주 속에서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실제로 아내가 옆에서 제 손을 잡고 있지 않았으면 떠내려갈 것 같이 현실감이 없는 상태인 거죠. 


유체이탈하는 것 같은?

나윤호: 진짜 살면서 처음 느껴 봤어요. 그리고 잠을 못 잤어요. 하루 종일 계속 빈둥빈둥 왔다 갔다 하고, 할 게 많은데 방법을 모르니까. 2020년 말까지는 그렇게 보냈어요. 거의 좀비처럼 잠도 못 자고 왔다 갔다 하면서 괜히 예민해져서 막 화내고.


슬기 님이 옆에서 지켜보면서 마음이 안 좋았겠어요.

김슬기: 더군다나 저는 일을 하고 있으니까 그게 더 부담이었던 거죠. 가정 경제를 본인이 가장으로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나 봐요. 저는 양양으로 올 때도 남편에게 회사를 그만두라고 한 게 누가 됐든 한 명이 벌면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어요. 


돈 버는 사람이 가장이면 되는 거죠. 

김슬기: 네, 제가 벌 때도 있고 남편이 벌 때도 있고, 이걸 우리 둘이 살아가면서 경계를 좀 짓지 말자고 했어요. 한 명이 부담을 다 갖는 거는 너무 부당하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은 어쩔 수 없이 가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출근하고 퇴근하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한테 아침부터 저녁까지 월화수목금토일이 구분 없이 주어지는 건 되게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시간이 분절되지 않고 통째로 존재하니까요.

김슬기: 누워만 있어도 시간이 가는데 같은 공간인데 서로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그냥 슉! 가는데 남편은 시간이 천천히 가는 느낌을 너무 힘들어하더라고요. 진짜로 아무것도 안 하는데 피곤해하고. 어느 날 돌아봤는데 얼굴이 막 시커멓게 되어서는 뭔가를 째려보고 있고. 그때는 ‘아니, 자유를 줬는데 왜 스스로를 속박하는 거지?’라고 생각했어요.


불안이 좀 진정된 계기가 있었나요?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익숙해졌어요?

나윤호: 종교적인 게 계기가 되었어요. 원래 제가 무교거든요. 기독교도 불교도 관심 없고 오히려 제 자신을 믿고서 살아간다는 주의였어요. 아내는 기독교예요. 이 친구도 심리적으로 되게 불안전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종교를 믿고 나서 달라졌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기독교거든요. 두 사람이 의지를 많이 했어요. 서로 만나면 거의 4시간 동안 대화를 하기도 해요.


시어머니와 그렇게 긴 대화를 하는 게 정말 쉽지 않은데요.

나윤호: 두 사람은 되게 가까워요. 그런 걸 저는 이해를 못 했는데 제가 바닥으로 떨어져 보니까 자연스레 하늘을 보게 되더라고요.


의지할 곳을 찾게 되죠.

나윤호: 사람이 사람한테 의지할 때는 한계가 있고 결국에는 하늘을 보게 되더라고요. 그때가 2021년 초. 종교에 마음을 열고 편하게 얘기해보니까 많이 나아졌어요. 그렇게 한 1년 정도를 보내면서 좋아졌죠.


정말 다행이에요.

나윤호: 일주일에 한 번씩 어머니가 저희 집에 오셔서 셋이서 예배도 했어요. 예배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고 그냥 기도하고 각자 일주일 동안 느꼈던 걸 얘기하면서 공유하고 서로 위로가 되는 말도 해주는 게 전부였거든요. 그렇게 1년이 지나면서 마음이 많이 변했죠. 



디자이너는 원격 근무나 재택근무가 용이해서 디지털 노마드라든지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기에 그래도 나쁘지 않은 직업이라는 인식이 있어요. 한편으로는 시각적 자극이나 정보에 민감해야 하는 일이라서 대도시에서 너무 멀어지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김슬기: 정보나 환경이 주어진다고 해도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못 취하거든요. 오히려 지금처럼 인터넷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 기회가 더 열려 있는 환경에서는 큰 걸림돌이 아니에요. 전시회에 안 간다고 해서 트렌드에서 멀어진다 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하거든요. 그래서 거기에 속해 있지 않은 것에서 오는 불안감은 없고 오히려 무언가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지금 상황이 더 도움이 돼요. 꼭 다른 사람 걸 봐야 내가 뭔가를 만들 수 있다면 비슷한 걸 만들어내는 것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주관을 가지고 직접 생각을 해야 하고 스스로 판단해야 뭔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 유명한 걸 다 봐야 한다든지 그런 것에 집착을 덜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외부에서 영향을 너무 많이 받으면 뭔가를 만들 때 더 힘들더라고요.


레퍼런스만 많아지니까요.

김슬기: 맞아요. ‘이게 맞는 건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의심을 더 많이 하게 돼요. 

나윤호: 유행하는 그림책을 보면 더 혼란스럽거든요. 저희 개성이 강해져야 눈에 띄는 스타일의 작업을 하거든요. 저희의 내부에서 나오는 걸 그려야 개성이 잘 실리잖아요. 물론 필선이나 이런 쪽은 트렌드가 있으니까 흐름이라는 게 있겠지만, 저희는 개성을 실어서 한 점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라서 이 환경이 더 좋은 거죠. 좀 더 나다운 사진, 나다운 그림이 가능하니까요. 그리고 진짜 보고 싶은 전시회가 있으면 인터넷에서 정보를 찾고 차 타고 가서 보고 오거든요. 잠깐 가서 우리가 원하는 것만 보고 오고 그걸 또 녹여서 생각을 하고 그런 시간이 많아요.


2020년에 양양에 온 뒤로 서울에 자주 간 건 아닌가 봐요?

김슬기: 처음 1년 동안 집 보수나 마무리 때문에 좀 정신이 없었어요. 

나윤호: 작년 5월까지는 정신없었어요.

김슬기: 그 후에 한 번 두 번 정도 업무 미팅을 간 적이 있고 개인 볼 일이 있어서 간 적도 있어요. 


업무 미팅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작업 자체는 서울에서든 양양에서든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 미팅이라든지 대면 커뮤니케이션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을 때 클라이언트 쪽에서 좀 어렵게 느끼는 게 아쉬워요.

김슬기: 일을 의뢰받을 때는 제 포트폴리오를 보고 주시거든요. 그런데 계약서를 주고받을 때 주소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거죠. “여기는 도대체 어디냐?”라고. 한 번은 제가 작업 백업을 해야 하는데 용량이 너무 커서 안 되는 거예요. 업무 담당자가 원래 하던 분이 아니고 후임자여서 제가 어디 사는지 모르고 퀵을 보내겠다고 주소를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저 강원도예요.” 이랬더니 너무 놀란 적이 있어요.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어려워하거나 불편해하기보다 호기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양양에 산다고 하면 갑자기 업무 얘기를 하다 말고 “어떻게 하면 거기서 살 수 있나요?”라고 묻기도 하고요. 물론 미팅을 좀 자주 하면 좋겠다거나 일주일 하루는 사무실에 나오면 좋겠다는 조건이라서 일이 성사되지 않은 경우도 있긴 해요.


의뢰하는 쪽에서는 일주일에 하루지만 여기서는 오고 가는 걸 고려하면 하루가 아니죠.

김슬기: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일을 못 하게 된다고 좌절을 하진 않아요. 요즘은 화상으로 미팅을 하는 걸 상대방이 선호하는 경우가 많아요. 코로나 상황이 심각하니까 굳이 대면 미팅을 하지 않는 게 자연스럽기도 해요. 


윤호 님도 개인 작업을 하고 있잖아요. 두 분의 작업물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나윤호: 저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의 브랜드를 만드는 거예요. 회사 다닐 때도 그림만 그렸던 사람이 아니라서 디자인해서 제품 제작하고 판매, 전시하는 것도 다 했거든요. 그래서 그 시스템과 방법을 알고 있어요. 저희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sns나 유튜브 등 미디어를 통해서 소개하고 판매 사이트도 묶어서 같이 운영할 수 있게끔 하는 게 2021년도 초에 같이 구상했던 계획이에요. 그걸 차근차근 실행하고 있는 중이에요.

김슬기: 서로 스타일이 다르긴 한데 저희 둘이라는 브랜드 안에서 각자의 방향을 서로 존중하면서 운영을 해보자 이런 생각으로 하고 있어요.

나윤호: 둘이 합해서 하나의 브랜드가 아니고 한 브랜드 밑에 각자 독립 작업을 하는 거죠. 각자 판매하고요.

김슬기: 하나로 맞추려고 하면 회사 일처럼 강제성을 띠고 맞춰야 하는데, 저희 특징이 자유롭게 풀어줬을 때 잘 만들어내는 스타일이거든요. “너는 너 스타일대로 하고 나는 내 스타일대로 하고, 서로 보완점만 알려주면서 한번 만들어보자.” 이런 식으로 좀 열어놓고 작업을 하고 있어요. 저도 처음에는 스타일이 워낙 다르니까 좀 걱정을 했거든요. 이걸 누구한테 맞춰야 하나 이랬는데, ‘왜 맞춰야 한다는 생각을 할까?’라는 의문을 갖고 나니까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거예요.



두 분은 결혼 전부터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서 좀 덜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조직이 아닌 곳에서 동료로 일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적절한 피드백을 줄 수 있어야 하잖아요. 서로의 작업물에 대해 가장 먼저 리뷰를 하는 사람이고. 그때 관계 설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가족이니까 배우자니까 가까운 사람이니까 조심하게 되면 오히려 창작자로서 서로에게 안 좋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김슬기: 저희는 일부러 말하는 자리를 갖지 않고 생활에서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서로가 편안한 상황일 때, 예를 들어 차를 타고 어디 갈 때나 밥 먹을 때라든지. 회의하듯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이렇게 하면 싸우게 될 것 같아요. 반감이 생기지 않게 “어떻게 생각해?”라고 의견을 물어보는 식으로 얘기를 하다 보면 서로 좋은 방향을 알려주는 거니까요. 생각처럼 순탄하지 않을 때도 있긴 한데 그것도 과정인 것 같아요. 저희가 같이 오래 지내긴 했지만 이렇게 합심해서 같이 해보는 건 집을 짓는 일 이후로는 처음이니까요.


다른 팀원인 윤호 님의 의견도 들어볼게요. (웃음)

나윤호: 저도 유튜브 영상 만들면 아내에게 바로 보여주거든요. 이상한 거 있으면 바로 수정하고요. 아내의 눈을 믿기 때문에 지적해 준 것에 대해서 ‘왜 그러지?’라는 의문을 거의 안 가져요. 


본인 작업물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갖는 게 쉽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나윤호: 아내가 대학생 때도 되게 실력이 좋았어요. 후배 중에서 제일 잘 그린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거든요. 그때부터 아내의 피드백에 대해서는 항상 믿어요. 아내가 이상하다고 하면 이상한 거라고 믿기 때문에 바로 수정하죠.


귀촌이나 집짓기 등에 대해 주위에서 질문을 받으면 어떤 대답을 해주세요? 

김슬기: 일단 비추천을 한 적은 없어요. 방송 출연을 결심한 이유도 이래저래 고민만 하고 못 오시는 분들이 있고,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마음만 가지고 계신 분도 있는데 저희가 이렇게 살고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좀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용기를 내도 된다고. “너는 일할 게 있으니까 거기 갔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아니거든요. 저도 처음에 올 때 일 의뢰가 없으면 식당 일을 하든 청소 일을 하든 하겠다는 생각으로 왔어요. 지금 좀 편하게 일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하지만 저희도 사실 더 나은 조건이나 상황이라서 여기로 온 게 아니거든요. 저희 모습에서 용기를 얻을 수도 있고 대리 만족을 하는 분도 있을 테고요. 저희가 원하는 건 딱 그 정도여서 “절대 오지 마세요.”라는 얘기를 한 적은 없어요. 


두 분은 이주를 후회하지 않는 거죠?

김슬기: 네. 처음에 저희가 양양에 간다고 할 때 아는 언니가 저한테 청약을 깨지 말라고 했어요. 서울로 돌아올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청약을 안 깨면 집을 지을 수 없었거든요. 그런 조언을 해준 건 그 사람들에게는 이게 너무 큰 두려움인 거죠. 갔다가 혹시나 잘못돼서 다시 돌아와야 하면 어떡하지? 싶겠죠. 저는 어디에 가더라도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제게 묻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용기를 주죠. 

나윤호: 집 짓는 과정을 커뮤니티에 글을 써서 올렸어요. 질문이 진짜 많이 올라와요. “진짜 부럽다, 나도 가고 싶다.”라고 하는 분이 진짜 많아요. “진짜 가고 싶은데 사무직이라서 일할 게 없다.”라고 하는 분이 대부분이고요. 또 많이 질문하는 게 “물은 어떻게 쓰냐? 인터넷 들어왔나? 배달은 되냐?” 이런 거예요. 저희 집까지 택배는 안 와요.


그럼 택배를 아예 못 받으세요?

나윤호: 읍내에서 올라오는 길에 CU 편의점이 있어요. 거기까지 와요. 

김슬기: 꽤 멀잖아요. 거기까지 가지러 가야 해요.


여기서 왕복 30분은 걸리는 거리네요.

나윤호: 정말 급한 게 아니면 괜찮아요. 그리고 아버지가 거의 매일 왔다 갔다 하시니까 저희 걸 가져다주시고요.

김슬기: 여유 있게 받아도 되는 것만 택배로 주문해요. 차가운 치킨을 먹는 게 슬플 뿐이에요.


치킨도 편의점까지만 배달이 되나요?

나윤호: 치킨은 거기까지도 배달이 안 돼요.

김슬기: 포장해와서 먹죠.

나윤호: 읍내에서 30분 걸리니까 오면서 다 식는 거예요. 

김슬기: 그래서 읍내 지인 집에 놀러 가면 치킨 시켜달라고 해요. (웃음)  이런 것도 사실 직접 겪으면 다 괜찮은데, 오히려 두려움으로 망설이는 게 더 크죠. ‘여기 왔으면 뭐라도 해서 먹고 살 생각을 해야지, 왜 그렇게 생각해?’ 이렇게까지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진짜 시골에서 살고 싶다면 두려움을 버리는 게 우선이라고 봐요.

나윤호: 아까 아내가 말했듯이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이 환경이 너무 좋다면 누구든 올 수 있어요. 


서울에서, 도시에서 하던 일과 다른 걸 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너무 큰 거죠.

김슬기: 어떤 일이든 하려고 하면 또 많거든요. 지금 하고 있는 회사 생활, 편안한 일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람이 돈 쓰는 것만큼 나도 쓰고 싶다고 생각하면 못 와요. 확실히 서울에서만큼 벌 수도 없고 그만큼 쓸 수도 없거든요. 

나윤호: 그런데 저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공감하는 게 저도 못 놓았거든요. 마지막까지 못 놓고 있다가 아내가 “그냥 그만둬.”라고 해서 마음으로 확 놓은 거예요. 그전까지 계속 쥐고 있었어요. 한 해만 더 해볼까, 두 해만 더 해볼까. 포기를 못하니까 그렇죠.  


서울에서의 소득과 비교하면 얼마나 줄었어요?

김슬기: 3분의 1 정도예요. 그렇지만 서울에서 번 게 다 저희 돈이 아닌 게 집 대출을 비롯해서 다 나갈 돈이 있잖아요. 

나윤호: 지금은 저희가 돈 대신 시간을 산 거고 그게 저희한테는 좀 더 필요한 거죠.


지금 내 생활에 필요한 소득은 벌고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김슬기: 프리랜서라서 매달 소득이 다르잖아요. 그냥 그 달 상황에 맞춰서 ‘이번 달은 이렇네, 그럼 이렇게 살면 되겠다.’ 하고 맞춰서 살지 ‘이만큼 덜 벌었으니까 더 일해야 해.’ 이런 식으로 생각을 안 하려고 하고 있어요. 저희 어머니도 그렇게 얘기하시더라고요. “여기서 살면 그거에 적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네가 너무 힘들다. 얼마를 벌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는 거 자체가 너를 너무 힘들게 할 거다.” 그래서 지금은 주어지는 대로 살자고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편안해졌어요. 

나윤호: 주 5일 나가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있거든요. 저희가 일부러 안 하는 것도 시간을 갖기 위해서예요. 지금은 그 딱 그 시기라고 생각해요. 돈을 벌려면 당연히 저희 시간이 들어가거든요. 

김슬기: 미래에 대해서 너무 두려움을 가지면 여기 와서도 서울에서 살던 것처럼 살게 될 것 같았어요. 지금 당장 조금 불안하고 걱정이 되더라도 버텨서 내성이 생기게 해야겠다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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