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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Oct 30. 2022

천장에 그린 요건사실, 그리고 변시

#17. 터널의 끝- 일상으로 덤덤히 돌아가다 

기적 같은 8모 성적을 받고 달라지지 않음으로써 바뀐 한 가지는 거주를 분리하려던 당초의 계획이다. 


형편이 빠듯하더라도 변시 100일 전 즈음에는 로스쿨 근처 원룸을 알아봐서 옮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고, 남편도 그러는 편이 좋겠다고 했다. 집에는 아기들이 있으니 아무래도 시험까지 바짝 달리려면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그런데 8모 성적이 말도 안 되게 잘 나오는 바람에 계획을 수정해서 그냥 이대로 쭉 가보기로 했다. 여전히 둥이 육아를 병행하면서 일주일에 두어 번 아기들을 데리고 근처 백화점, 공원 등지로 가족 나들이를 다니고 부족한 공부시간은 열람실에 늦게까지 머무는 날 여학생휴게실에 자면서 보충하는 로3 수험생이자 둥이 엄마의 이중생활. 다만 로스쿨의 마지막 학기인 만큼 남편은 파트타임도 그만두고 육아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통장 잔고가 조금이라도 늘어나는 일 없이 줄기만 하던 나날들이다. 


평일 3일 정도 집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 이른 귀가를 하는 날에는 남편과 함께 아기들의 저녁을 먹이고, 목욕을 시켰다. 8시 반에서 9시 정도가 되면 불을 끄고 거실에 둔 유아용 매트에 넷이 나란히 누웠다. 아기들이 잠들 때까지 그날 오전에 공부한 민법 요건사실이나 형법 전문법칙을 떠올려 깜깜한 천장에 그려보았다. 그러다 아기들과 같이 이내 잠들곤 했다. 


변시를 준비하면서 희망을 얻기 위해 다른 국가고시나 예전 사법시험 합격수기를 즐겨 읽었는데, 기억에 남는 수기는 민법에서 중요한 요건사실을 정리한 A4 용지를 넣은 파일을 욕실에 붙어 놓고 매일 샤워하면서 봤다는 어느 최연소 합격자의 경험담이었다. 순간 솔깃했지만, 약간의 멀티태스킹도 불가능해서 밥 먹을 때는 휴대폰도 보지 않고 밥만 먹고, 샤워할 때는 씻는 것에만 집중하는 단순한 일상에 요건사실을 출력한 A4 용지가 파고들 틈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대신 아기들과 누워 잠을 청하기 전 그날 공부한 내용을 떠올려서 천장에 펼쳐보는 연습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귀찮기도 하고, 뭘 공부했는지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아서 괴로워하다 차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 머릿속에 입력해둔 판례 키워드와 요건사실 등을 한 번 더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니 아기들을 재우면서도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것 같아 뿌듯해졌다. 


그즈음 열리는 교내 특강은 늘 맨 앞자리에 앉아 그 자리에서 흡수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들었다. 특강은 종종 하루를 꼬박 할애해야 할 정도로 길게 진행되는데, 고도로 집중해서 6시간 내지 8시간을 듣고 나면 완전히 기력을 소진해서 끝나고 집에 바로 가는 날이 많았다. 마음과는 달리 특강 자료를 세심히 복습할 시간은 바쁜 로3에게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특강을 듣는 동시에 이해하고 지나가면 그런 것들이 쌓여 실력이 됨을 경험으로 배웠다. 특강의 가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8모 성적의 수직상승으로 약간은 들뜬 기분으로 지낸 나는, 10모가 다가오자 10모 성적은 당연히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고 그러기를 내심 바라기도 했다. 10모 성적이 좀 내려가야 심기일전해서 실전인 변시에서 다시 치고 올라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가까운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별다른 감흥 없이 치른 10모 성적표를 받아 든 순간, 나는 또다시 흥분을 감출 수 없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미 8모 성적으로 충분히 보상받은 나에게 그 성적표는 더 높은 곳을 가리키며 이제 거기가 내 자리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공법, 형사법, 민사법 세 영역 중 한 영역은 전체 응시생 중 1등을 하기도 했다. 변시 전 마지막 지도학생들과의 식사 모임에서 지도교수님은 10모 성적 통계에서 내 성적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며 씩 웃으셨다. 


그런 기적 같은 성취들이 이어지면서 나는 평일 저녁이면 아기들을 목욕시키고 재우며, 예방접종 일정에 동행하고 가족 나들이를 가는 일상을 크게 변화시키지 않고 변시 직전까지 계속할 수 있었다. 1학년 때부터 해온 교내 배드민턴 동호회도 하는 날마다 죄책감 없이 꼬박꼬박 참석해 스트레스를 풀었다.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낀 것은 남편도 데려와서 같이 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다. 그럴 때면 집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남편에게 언젠가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고 언급하곤 했다. 




변시는 매년 1월 초순 5일에 걸쳐 시행되는데, 그 몇 주 전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스터디에 출석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데, 아기(1분 차이지만 굳이 순서를 따지자면 둘째)가 거실 창가에 서서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전신을 덮는 줄무늬 수면 조끼를 입은 아기는 자그마하고 보드라운 손을 창가에 뻗고 있었다. 새하얗게 덮인 세상이 얼마나 신기할까. 가만히 응시하는 아기의 뒷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나도 현관에 잠시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아기가 뒤를 돌아보려고 하던 찰나에, 서둘러 문을 닫고 나와버렸다. 평소와 같이 학교로 걸어가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즈음 면역력은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아기들이 어린이집에서 독한 감기에 걸려올 때마다 꼼짝없이 옮아 며칠을 앓았다. 조금 나을만하면 다시 목이 따끔거리는 통에 울상이 되었다. 한 달에 두세 번까지 감기에 걸리는 통에 아프지 않은 날보다 아픈 날이 흔한 지경이었다. 


목이 칼에 베이는 듯한 통증은 변시 직전 마지막 주에 기어이 찾아와 전력을 다할 태세를 가다듬던 로3 아줌마를 낙담시켰다. 5일을 남겨두고 과목별 총정리를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아픈 목을 붙잡고 제발 좀 낫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따뜻한 물을 마시고 또 마시다가 하루 저녁을 날린 적도 있었다.


변시 실전에서는 6모 때의 극심한 등 통증도, 8모 때의 혼미할 정도의 아픔도, 변시 직전 주의 지독한 목감기도 호전되어 지극히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전 일정을 소화했다. 아침 7시에 일어나 학교에 와서 10시부터 하루 종일 시험을 치르고 나면, 남편이 배달해주는 수제 샌드위치를 저녁으로 먹고 열람실에 남아 다음날 예정된 과목을 대비했다. 


자정에는 어김없이 남편이 데리러 와서 집에 가서 잠을 청했다. 시험기간에도 자기 전 잠들어 있는 아기들의 손톱을 깎고, 기저귀를 검사하는 건 나의 몫이었다. 어떤 날은 남편이 분명히 자기 전 아기들의 기저귀를 갈았다고 했는데도 기저귀를 들춰보니 대변이 발견되어 남편과 웃음을 참느라 혼난 해프닝도 있었다. 아기들은 자면서 똥을 싸기도 한다. 




막상 변시에서는 크고 작은 실수를 저질러서 모의시험 때와 같은 상승곡선을 이어가지 못했다. 10모 성적이 터무니없이 잘 나왔을 때부터 이미 들었던 불길한 예감이 적중한 것이다. 그렇다고 합격자 발표일까지 불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변시와 동일한 세 번의 모의시험을 치르면서 부단히 단련해온 내 몸과 마음이 '그 정도면 됐다'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변시가 끝나고 아기들의 두 돌이 다가와 남편과 아기자기한 생일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영화를 사랑해서 영화잡지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을 정도지만 몇 년 동안 가보지 못한 극장을 다시 찾고,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도 날을 잡고 마음껏 수다를 떨었다.       


다소 과감해보이는 결단을 내리는 데 인색하지 않은 편이다. 내신성적이 가장 잘 나온 기말고사 직후 고등학교를 자퇴한다든가, 서른이 훌쩍 넘어 안정적인 직장을 뒤도 안보고 그만둔다든가, 잠시 쉬러 간 외국에서 생긴 로맨스를 결혼까지 끌고 온다든가 하는. 마음이 내는 소리에 기울인 결과이고, 당시에는 주변인들이 만류해도 시간이 좀 지나면 내 선택을 믿고 지지해주었다. 


로스쿨에 들어가겠다는 결단은, 그 중에서도 가장 험난한 모험이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정신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바닥이 날 때 즈음 종점이 보이기 시작하고,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지난한 과정은 끝이 난다. 마침내 너무나 간절했던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진심을 담아 바꾼 카카오톡 인사말을 아직까지 바꾸지 않고 있다. 긴 터널을 지나 사회로 복귀한 나와, 둘러싼 모든 것에 감사하며-  


'Welc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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