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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Aug 22. 2022

긴긴밤의 끝을 간신히 부여잡다

#5. 백지 답안을 낼 것만 같은 두려움을 안고서 

그때의 망설임을 아직 기억한다. 


학교 옆 엘리베이터 없는 4층 자취집. 나는 깜깜한 새벽에서 이른 아침을 알리는 어스름한 빛이 점차 밝아옴을 느끼며 초조해했다. 두어 시간 뒤면 헌법 기말고사 시작인데, 필수 세 과목의 시험 시간표가 아주 밀접한 시간대로 불운하게 엉키는 바람에 헌법은 시험범위를 한 번 끝까지 훑어보지도 못한 상태였다. 


자취집에는 거실이라고 할만한 정도는 아닌, 작은 부엌과 그보다 더 아담한 화장실이 있는 공간이 있고 그곳과 가까스로 분리된 침실 겸 공부방이 있었다. 


헌법책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면서 키워드를 적다가 바로 옆 침대를 힐끔 바라보았다. 


불현듯 잠시라도 눕고 싶다는 간절함과 졸음인지 피로인지 모를 고단함이 덮쳐왔다. 손과 머리는 시험범위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가기 위한 열망으로 바쁘게 움직였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조금이라도 자고 싶은 욕구가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누울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한 시간이라도 자려던 계획은 30분으로, 20분으로 점점 줄다가 결국 날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마침내 아침을 알리는 햇살에 샤워하고 시험장으로 향하기 전, 열람실에서 쓰던 컵에 물을 조금 붓고 네스카페 블랙커피 두 봉지를 진하게 탔다. 그 전날에도, 새벽에도 커피로 버텼으니 제발 채권총칙 끝날 때까지 버티게 해주세요. 마지막으로 주문을 걸듯 한약 같은 커피를 꿀꺽꿀꺽 들이켜고 9시부터 시작하는 <헌법> 시험장에 들어섰다.  


간절한 주문은 이 앞 시험에서만 효력을 발휘했고, 끝나자마자 10시 30분부터 치른 <채권총칙> 시험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채권총칙> 시험은 소위 객관식이라고 부르는 선택형과 주관식이라고 할 수 있는 사례형을 90분 동안 보는데, 선택형 시험지를 받아 든 순간부터 밤을 새운 여파로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 동기들과 답안을 맞춰볼 때 나는 선택한 답이 뭐였는지, 사례형은 어떻게 썼는지도 온전히 기억하지 못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법. 


학기가 끝나고 성적을 조회해보니 아이러니하게도 앞서 치렀던 <물권법>과 이 의식의 흐름대로 엉망진창 치른 <채권총칙>이 A+, 그나마 정신이 있을 때(!) 본 <헌법>은 B+가 나왔다. 그만큼 상대적으로 어려운 민법에 많은 학생들이 헤매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공부 욕심이 남다르며 중고등학교 학창시절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없는 특수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조금이라도 자려고 하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이다. 


로스쿨 이전까지의 삶에서는 나 또한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적당히 공부해서 성적표를 받아보면 '생각보다 잘나왔네' 싶은 경우가 많았다. 그 자리에서 더 올라가고 싶어 무리해본 적이 없다. 치열한 토끼 보단 느긋한 거북이로 그때그때의 성적에, 직장에, 나를 둘러싼 환경에 만족하며 살았다. 로스쿨에서 전혀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모르고서. 


법학은 방대하기 이를 데 없는 바다와 같은 학문이라, 로스쿨은 모두가 필연적으로 무리해서 공부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라는 설명을 앞에서 했다. 판례 문구며 법리를 정확히 이해하고 어느 정도 논리적인 답안을 쓸 수 있게 되기까지 너무나 막연하고 막막한 암흑의 동굴을 그저 묵묵하게 조금씩 내디뎌야 한다. 


그런 까닭에 그날 밤 나는 '더 잘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백지 답안을 낼 것만 같은 두려움에 잠시도 침대에 몸을 뉘지 못하고 희미해지는 정신을 애처롭게 붙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백지 답안을 낼 것만 같은 두려움'이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며, 성적의 높고 낮음과도 관련 없이 대다수의 로스쿨생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은 훗날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 백지 내면 어떡하지?" 


법대 출신으로 사법고시 공부 경험이 있고, 누가 봐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면서 꾸준히 성실하게 공부하던 친구가 로3 6월 모의고사를 앞둔 어느 날 무심코 뱉은 말이다. 같이 밥을 먹은 다른 동기와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며 우스갯소리로 넘겼고, 당연히 그 친구가 백지 답안을 내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내가 로3이 되고, 모의고사를 거듭하면서 안정적이다 못해 넘치는 성적을 받게 되고도 변호사시험 일주일 전까지 이 '백지 답안 낼 것 같은 두려움'은 그대로 엄습해왔다. 이 시험은 그런 시험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결코 알 수 없는, 특유의 불안을 끝까지 안고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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