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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Aug 24. 2022

느림보 글씨의 최후

#6. 변호사시험 CBT 도입이 진작 됐더라면

글씨체가 독특하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자기만의 손글씨체가 정립되기 시작하는 중학교 무렵에서부터였던 것 같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내가 쓴 메모나 필기를 본 사람들은 꼭 한 마디씩 한다. 좋게 말하면 '귀엽다', 반대로 말하면 '초등학생 글씨 같다'는 평이다.


쥐는 방법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한글 배울 때 받아쓰기도 정규 교육에서 남들 하는 만큼은 했던 것 같은데 유독 내가 쓰는 글씨는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고 지나치게 또박또박 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멋지게 흘겨쓰는 어른 글씨체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장점은 크기가 크고 또렷해서 알아보기 쉽다는 것이고, 단점은 힘이 많이 들어가고 느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느리다'는 한 가지 특성으로 인해서, 나는 공부할 시간도 부족한 로스쿨 생활의 짧지 않은 기간을 느림보 글씨체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도 연구하고 노력해야 했다.




소위 객관식이라고 부르는 선택형을 제외하면 변호사시험의 대부분은 수기로 작성하는 사례형과 기록형으로 이뤄진다. 배점 비중도 전자보다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높다. 널찍한 크기의 답안지를 받고, 문제지를 펼친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된다. 변호사시험을 치르는 5일(중간 휴식일 제외하고 4일) 동안 채워나가야 하는 답안지는 60쪽이 훌쩍 넘는다.


그즈음 사법고시 2차 응시 경험이 있는 동생이 진두지휘하는 사례 스터디에 들어갔다. 그는 정해진 시간 안에 채워야 하는 분량을 알려주면서 일단 시간을 줄여서 써봐야 한다고 조언해주었다. 동기들과 사례형 기출문제집에 나온 모법답안을 베끼는 연습부터 시작했다.


"어디까지 썼어요?"


타이머가 울리고, 답안을 보여주자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내가 쓰던 답안지의 다음 페이지를 가리켰다.


"여기까지는 쓰셨어야 해요."


실제 변호사시험에서 채워야 하는 분량은 문제를 읽는 시간을 포함해서 1시간에 4면 정도인데, 나는 문제지의 모범답안을 그대로 베끼는데도 절반밖에 쓰지 못한 것이다. 같이 베낀 다른 동기들은 적어도 3면 정도는 채웠다. 아직 훈련을 덜해서 시간 안에 다 채우기는 힘들어도 다른 동기들처럼 3면까지는 진출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의미였다.


법을 공부하고 싶고 변호사가 되고 싶어서 로스쿨에 들어왔을 뿐, PC가 널리 보급되다 못해 첨단의 첨단을 걷는 요즘 시대에 말도 안 되는 분량의 답안지를 일일이 손으로 채워나가야 하는 시험방식을 미처 알지 못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로스쿨 진학은 '무식해서 용감했던' 결정이었다는 탄식이 절로 새어 나왔다.


심란한 마음에 '느린 글씨체 극복 방법' 따위를 검색해보다가 이미 사법고시 시절부터 신림동에서 유명세를 탔다는 <백강 고시체>를 주문했다. 그 책에서 알려주는 대로 깔끔하면서도 빠르게 쓸 수 있다는 글씨체를 따라 써보기도 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20년 써온 글씨체를 하루아침, 아니 몇 달에 걸쳐서라도 완전히 바꾸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백강 고시체는 포기하고, 거기에서 힌트를 얻어 몇 가지 자음을 획을 줄여 단순화하는 것으로 전략을 바꿨다. 이를테면 ㅎ과 ㅈ, ㅊ, ㅆ, ㅍ을 쓸 때 나름대로 획을 연결함으로써 지나친 또박또박에서 탈피하고자 했다. 배경에 넣은 사진은 그렇게 변신한 이후의 내 글씨체를 엿볼 수 있는 로3 시절 메모의 일부이다.


변신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지만,  메모를 봐도   있듯 나의 글씨는 여전히 크고, 상대적으로 느렸다. 있는 힘껏 힘을   글자  글자 쓰는 통에 손목을 혹사시키고 부리부리함만 자랑하는 형국이었다.   


하드웨어를 더 이상 향상시키기 어렵다면 소프트웨어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


그 뒤 나는 크고 작은 교내 시험과 로3부터 본격적으로 치르는 세 차례의 전국 법학전문대학원협의회 모의시험을 거쳐, 문제 사이 여백과 문단 간격을 최대한 여유 있게 띄우고, 부족한 분량은 핵심 키워드 위주로 서술하는 노하우를 익혔다.


그리고 언제나, 문제를 읽자마자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직관적으로 답안을 써내려 나갔다.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문제를 읽고 나면 답을 어떻게 쓸지 고민하며, 일부 글씨가 빠른 이들은 간략한 목차를 메모하기도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뭐라도 적기 시작해야 그나마 양이 차 보이는 답안을 낼 수 있었다.


그런 까닭에, 조금만 생각했더라면 쉽게 떠올려 쓸 수 있었던, 키워드를 줄줄이 외우고 있던 최신판례 문제가 변시 실전에 떡하니 등장했을 때 나는 그 찰나의 시간을 갖지 못해 전혀 엉뚱한 답을 쓰고 나오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불 킥할 노릇이었다.


 "자기 글씨가 느리다고 고민하는 분들이 많은데, 대부분은 요건사실 암기가 덜 돼서 그런 겁니다."


학원가의 유명 민법 강사가 방학특강차 학교에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맞는 말이다. 실제로 주변을 봐도, 나의 느림보 글씨 고민에 많은 동기들이 "어머 언니, 나도 그래요"라며 공감해주었지만 로스쿨 생활을 통 털어 진정 나만큼이나 물리적으로 글씨가 느린 사람은 딱 한 명 봤다.


가지런한 필기가 돋보였던 그 동기는 글씨 크기가 크지 않아 답안지를 얼기설기 채우기가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이르면 2024년에야 CBT가 도입된다는 소식이 야속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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