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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방울 Aug 25. 2022

입덧 지옥, 로스쿨 지옥

#7. 과정의 절반에 다다라 두 생명을 품다

결혼과 로스쿨 입학을 거의 동시에 했다. 전자가 다소 급작스럽고 즉흥적인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면, 후자는 전 직장 퇴사를 염두에 두고 꽤 오래전부터 고민한 결과였다. 의도한 적은 없지만, 인생에 있어 중요한 이벤트를 연이어 맞이한 셈이다.


약간의 반항기는 있어도 착하게 자란 막내딸이 어느 날 뜬금없이 푸른 눈의 20대 청년을 호주에서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선포했을 때, 아버지는 놀란 눈으로 조심스럽게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내비치셨다.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단언컨대 저렇게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소력 있게 외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래도 머잖아 결혼은 하되 대학은 마치고 오게 하라는 조건부 승낙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궁극적으로는 자식이 스스로 내리는 결정을 언제나 믿어주시기에.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까지 나름 명문으로 손꼽히는 대학을 무기한 휴학하고 대형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유유자적 반백수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호주에서는 아주 흔한 패턴이다.


그래서 최종학력이 '고졸'인 남편이 '대졸'이 되어 나에게 오기까지의 기간이 로스쿨 과정의 절반이었고, 그때까지 내 삶은 여느 동기들과 다르지 않았다. 오로지 법학의 바다에서만 헤엄치고 신음하면서 어떻게 하면 변호사시험에 미끄러지지 않고 붙을 수 있을지에만 골몰하던 시간들.




2학년 1학기 기말고사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여성으로서  달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그날'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다.  미묘한 두통이 찾아왔다. 예정일로부터 닷새가 지난 , 지도교수님과 마주쳤을  나는 이상한 직감으로 교수님에게 제일 먼저 털어놨다.


"교수님, 저 아무래도 임신한 것 같아요."

    

임신 테스트기를 해보기 전인데, 임신해본 적도 없으면서 그런 느낌이 묘하게 드는 것이었다. 같은 성별의 비혼인, 근교에 자기만의 집을 짓고 멋지게 사는 교수님은 활짝 웃으면서 축하의 말을 건넸다. 열 살 차이, 쿨한 언니 같고 때로는 섬세한 소녀 같으면서도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지도교수님과 나는 죽이 잘 맞아 속 깊은 대화를 스스럼없이 나누곤 했다. 스승의 날 선물은 평생 보낼 생각이다.


그날 저녁 해본 테스트기는 단 번에 선명한 두줄을 가리켰다. 자체로도 힘겨운 로스쿨 과정의 한가운데에서, 더구나 성별이 여성인 학생이 기혼이랍시고 임신을 계획했을 리는 없다. 0.1%의 가능성이 현실이 됐달까.   


당장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기에 임신이라고 해도 따로 시간을 내서 병원을 찾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렇게 2-3주를 버티던 중, 얕은 두통은 헛구역질로 증상이 바뀌었다. 급기야 <회사법> 시험을 보러 가다 화장실로 달려가 아침에 먹은 것을 게워냈다. 입덧 지옥의 시작이었다.


가까스로 기말고사마치고, 학교에서 가까운 산부인과를 찾았을  예상한 대로 의사는 임신이 맞다는 소견을 밝혔다. 그러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코멘트를 덧붙였다.  


"어, 잠깐만. 아기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네요."

"??"


의사는 아기들 심장이 잘 뛴다며 쌍태아 임신진단서를 즉시 발급해주었다. 가족, 친척, 친구 누구도 쌍둥이를 가진 적 없고, 쌍둥이인 친구조차 없는 나는 아기가 둘이라는 진단이 낯설기만 했다. 남편도 가족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twins'임을 알려주자 너무나 기쁘고 해맑은 어조로 "둥이를 갖기를 꿈꿨다(물론 영어로)"며 호주에 계신 부모님께 임신 소식을 전했다.


그 뒤로 겪은 입덧의 고통은 말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다. 무리하게 술을 마셔 필름이 끊긴 다음날의 가장 지독한 숙취 증세와 그나마 가깝다. 숙취는 해소제를 마시고 쉬면 점차 정상적인 컨디션으로 되돌아가지만, 입덧은 끝 모를 메스꺼움과 수시로 올라오는 구역질로 인해 도무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컨디션이 수개월 지속된다.


그 시기 내가 가장 공감한, 입덧의 고통을 덧댄 표현은 "차라리 쓰러질 정도로 맞고 의식이 없어졌다가 애가 태어날 때쯤 깨어나면 좋겠다"는 온라인 쌍둥이 카페 어느 회원의 하소연이었다.


종류가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입덧과 변호사시험 중에서, 만약 반드시 한 가지를 선택해서 다시 해야 한다는 상상하기 싫은 가정이 주어진다면, 나는 (로스쿨 과정은 이미 마쳤다는 전제 하에) 미련 없이 변호사시험을 고를 것이다. 이건 이후 태어난 아기의 사랑스러움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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