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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리러브 Oct 27. 2023

가을밤, 붉은 달을 보며 문득 든 생각

이제 막 갓 태어난 것 같은 말간 달을 보며

저녁을 먹고 아이들과 축구공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밤바람은 선선했다. 땀이 흘러도 고일 틈 없이 스르르 바람 속에 스며들 것 같은 날씨였다. 첫째는 축구공을 높이 차고 싶었고, 둘째는 패스를 하고 싶었다. 둘의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다. 공의 높이가 달랐다. 첫째가 차올린 공을 받아 패스를 하기엔 둘째의 키가 작았고, 발이 아닌 머리를 써야 하는데 기술적 난도가 높어야 가능한 그림이었다. 결국 공을 멀리 굴러갔다. 높게 올랐다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지면서 첫째의 기세를 싣고 대차게 굴러갔다. 이럴 땐 둘째의 킥보드가 요긴하게 쓰인다. 바퀴를 구를 때마다 오색불빛이 번쩍이는 킥보드를 타고 아이들은 서로 공 쪽으로 향하겠다고 난리였다. 하지만 문제는 킥보드는 하나. 첫째가 계속 끌고 다니자 둘째가 소유권을 주장했다.


"내 거라고, 내놔"


둘째의 킥보드가 맞다. 그렇긴 하다. 요즘 두 발자전거까지 마스터한 6살 둘째는 사실 킥보드를 잘 안 탄다. 하원할 때도 버스를 탄다. 장롱면허인 나는 걷기가 좋은데 아이는 졸음 가득한 눈으로 내게 기댄다. 그리하여 킥보드를 끌고 다닐 기운이 없는 경우가 많아 잘 타지 않게 되었는데 최근 첫째가 종종 타기 시작했다.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이다. 그런데 이제 축구를 하러 갈 때도 킥보드가 쓰이다니. 원래도 용도변경을 자유롭게 해 왔던 아이가 놀랍진 않지만.


킥보드는 마치 달탐사 로봇처럼 아이가 조종하는 곳으로 가서 공을 끌고 온다. 두 바퀴와 긴 손잡이가 달린 앞코 쪽을 이용해 공을 끌고 온다. 그게 재밌어 보이는지 둘째는 공이 멀리 굴러가기만 하면 한 마디 한다.


"내가 갈게. 기다려"


그런데 간이 운동장에 아이들인 늦은 밤인데도 축구를 하고 놀았다. 둘째는 놀이터에 가자고 했다. 우리는 놀이터로 향했다. 그때 예전에 도서관 수업에 만난 엄마를 만났다. 둘째와 동갑인 여자아이는 샤뱡샤방 드레스를 입었고, 조용히 사뿐사뿐 나비처럼 날아오르며 놀고 있었다. 형제의 기행은 여기서 시작했다. 첫째는 놀이터에 설치된 집모양 구조물에 창을 응시했다. 이제 그 구멍은 농구골대로 활용된다. 축구공은 농구공으로 용도가 변경됐다. 공을 구멍 안에 넣으려면 높이 던져야 한다. 첫째는 여러 차례 시도했다. 둘째도 해도겠다고 아우성이었다. 둘째의 공은 구멍 높이까지는 어찌 됐든 올라갔지만, 안으로 적중하진 못했다. 첫째는 여러 차례 시도 끝에 드디어 골을 넣었다. 공주 드레스를 입은 여자아이도 신났다. 자기도 해보겠다고 발을 동동거렸다. 조용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에너지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근묵자흑 근주자적이라 했던가. 늑대 같은 형제를 만나 야생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 같았다. 둘째가 내 얼굴을 두 손으로 이그러 뜨리니 웃기다고 깔깔댔다. 이런 아이들과 같이 있으면 절로 몸을 움직이게 된다. 첫째는 땀에 흠뻑 젖였다. 한 여름, 이글대는 태양 아래서 논 것처럼 뒷목을 타고 땀이 줄줄 흐르고 있다. 둘째는 자기는 땀이 안 났다며 내가 와서 만져보라며 헉헉댔다. 사실 오늘 갑자기 발목이 접지른  것처럼 아팠다. 통증이 계속되어서 일단 임시방편으로 파스를 붙였다. 약간의 삐끗함은 남아있었고, 걷기도 불편했지만, 아이들이 나가자고 해서 일단 나왔다. 그래, 나오니까 좋다. 나오니까 이렇게 편하구나.


나는 두 아이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가 내키지 않은 일을 하는 이유는 이 아이들에게 좀 더 다양한 경험을 해주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 뭘까. 나는 어린 나의 마음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일을 하면 할수록 타인을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쏟고 있고, 돌아오는 건 돈뿐이라는 것을. 돈은 소중하고, 많이 벌고 싶고, 나는 많이 벌고 싶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나를 소모하는 방식의 돈은 벌고 싶지 않다. 우리가 올 겨울에 가고 싶은 제주도도, 내년에 가자고 약속한 호주 여행을 위해서도 나는 좀 더 돈을 벌어야 하는 게 맞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다. 그렇지, 지금을 즐겨야 내일도 있는 건데. 결국 나는 다짐했다. 현실의 또 다른 경계를 넘어서기로.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 열린 문을 닫고 앨리스처럼 새로운 문을 찾아나서야겠다고.


그때 샤랄라 드레스 입은 여자아이가 손끝으로 달을 가리켰다. 이 날따라 달은 유독 붉었다. 이제 우주에서 갓 태어난 것 같은 말간 얼굴로 똘망똘망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우렁찬 소리를 지르며 놀고 있는 두 아이와 또 다른 현실의 문을 두드리려는 나 사이에 붉은 달이 있다. 달은 붉게 상기된 표정으로 어둠 사이를 비집고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빛은 어둠을 지나 저 끝에 있다던 말을 떠올린다. 빛이 찾아오면, 어둠은 걷히고, 붉은 달이 다시 빛에 가려질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볕에 몸을 내맡긴 채 기다린 기지개를 필 것이다. 쭈욱~~ 내 몸을 최대한 늘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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