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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게 Aug 06. 2021

자존감 낮은 여자가 연애를 하면 위험한 이유


 다섯 살까지 말을 떼지 못했던 나는 방문 학습지 ‘한글나라’ 선생님 덕에 입이 텄다고 들었다. 더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연년생 육아가 힘들거라 생각한 부모님이 나를 지우려 했고, 병원에 가기 전날 이 사실을 알게 된 할아버지가 부모님을 설득시켜서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살면서 "네가 태어나지만 않았어도", "너를 낳지 말았어야 해"라는 말을 듣진 않았지만, '네가 태어나서 기뻐', ' 존재만으로 행복해'말을 는 부모님은 결코 아니셨다. 당신의 자식이기 위해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다.

 

 대기업근무하시는 아버지 덕에 항상 백화점에서 장을 보고, 늘 비싼 브랜드 옷을 입었던 기억으로 크게 부족한 것 없었는데도 부모님은 돈 때문에 매일 싸웠다. 주식이 폭락하거나 매도한 주식이 급등하면 "너 때문에 망했다"말이 오갔,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방을 나가지 못할 때면 쫄쫄 굶거나 먹다 남은 생라면을 씹어야 다.


 사소한 이유로든 일단 갈등이 촉발면 그때부턴 서로의 태도 때문에 더 큰 싸움이 된다. 그 집에 살아야 했던 나는, 매일 반복되는 부모님의 말다툼에 섞인 감정들을 오롯이 견뎌야 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다 나처럼 사는 줄 알았다. 이쁜 옷은 입지만, 이쁜 말을 듣기 위해서는 이쁜 짓을 해야 하는 줄 알았다.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말은 대부분 묵살되므로 집에선 거의 말을 하지 않았 때문에, 밖에서도 친구 말에 맞장구를 치는 법을 몰랐다. 누가 쳐다볼까 봐 버스 벨도 못 누를 정도로 소심했던 내가 대학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은 상당했다.     

 

 각기 다른 색깔로 물들인 희한헤어스타일과 사투리의 향연도 볼만했지만, 온갖 모임에서 새내기라는 존재만으로 어디서든 환영받는 ‘내’가 신기했다. 이런 신세계는 1학년 때뿐일 거란 생각에 일 년 동안 집에 일찍 들어간 날은 손에 꼽았다. 동아리와 학생회에서 집에서 받지 못한 소속감을, 돈독한 친밀감을 그 자리에서 느끼고 싶었는지도.

  

 제일 충격인 건 동기의 집에 갔을 때였다. 여섯 식구가 방 두 칸짜리 집에 산다는데, 평소 통화할 땐 다정함이 넘쳤고 집에 갈 땐 항상 간식을 사 갔다. 조금만 힘들어도 잠수 타던 나와는 달리, 항상 당당했던 그 친구의 집에는 유머와 배려가 넘치는 가족이 있었다. 화나면 남 탓을 하는 우리 집 풍습을 닮은 나와 달리, 늘 어른처럼 배려하면서도 여유가 넘치는 이 친구의 단단한 자존감은 이 가족들에게서 나오겠지.     


 그때 알았다. 이상한 나라에 ‘내’가 있다는 걸. 돈이 있어도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을. 돈 때문에 싸우니 오히려 행복의 걸림돌이라 생각했다. 행복하려면 돈이 아니고 성적도 아닌, 사랑이 필요한 거였어. '사랑이 차고 넘쳐서 내게도 사랑을 줄 사람이 필요한 거였어!'


 이렇게 생각했던 내가 자존감을 찾는 방법은 연인에게 받는 사랑으로 내 가치를 확인받는 거였다. 2000년대 초반엔 자존감이란 단어를 몰라 내게 문제가 있는 줄 모르고 외부에서, 즉 다른 사람에게서 끊임없이 사랑을 찾았다. '네가 최고야', '네가 없으면 안 돼'라 해주고 사랑을 속삭이며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 바른말, 상처 주는 말 하는 친구들 다 필요 없어. 한 사람과의 관계에 매몰된 나머지 다른 역할을 망각해버린 연애 찬양론자. 그게 내 세계의 전부였다.   

   



 내 연애는 늘 불안했다. 상대의 기분에 따라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기분파라면 더더욱 위험하다. 냉탕일 때는 감정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못하는 지옥길을 걷지만, 온탕에 있을 땐 천국이라 그 행복을 놓치기 무서워서 목욕탕을 쉽게 나오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위험한 물건을, 그놈의 '거지발싸개 같은' 추억 때문에 놓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예민하신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어린 내가 그대로 나이만 먹어, 상처 주는 말에도 맞서지 못하고 타인의 기분에 좌지우지되는 감정 꼭두각시. 소심하지만 착하지 못해 늘 화가 나 있었고, 누구를 만나든 까칠했다. 친구 사귀기가 어려웠고 연애도 불안정했지만, 문제는 항상 남들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그럴싸한 연애 상대에 금방 마음을 뺏겨 늘 '이번엔 운명'이라 생각했다. 진짜 어른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시시한 연애만 반복하다 종내는, 번지르르한 말만 하는 사람을 의지하다 못해 스스로 일어서는 힘조차 잃어버렸다. 이런 사람은 가스 라이팅의 대상이 되기 쉽고, 빠져나오기는 더더욱 어렵다. 나는 그걸 깨닫는데 십 년이 걸렸다.    

       

 연애찬양론자에서 이제는 나를 믿어보기로 한다. 내가 바로서야 좋은 인생을,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나를 추스르고 자존감 도둑들에게서 뺏겼던, 널브러져 있던 자존감을 조금씩 그러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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