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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pril Nov 30. 2022

아빠가 아프다

철부지 외동딸이 원치 않게 철학자가 되는 과정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다 퇴사하고 자취방에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2021년 7월, 늘 ‘밥 먹었냐, 청소는 하고 사냐’ 끌끌대며 잔소리만 하던 아빠가 의아한 말투로 “혈뇨를 본다”고 했다.


가슴이 쿵 내려앉은 나는 상처가 아물고 있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별 거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왜? 언제부터? 통증이 있지는 않지?”라고 물음을 쏟아냈고, 아빠는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고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을 했다.


내가 아는 아빠는 병원 문턱도 밟아본 적 없는 사람이다. 하나뿐인 딸내미 용돈도 못 주는 형편에 뭐라도 나오면 큰일이니, 건강검진이라곤 해본 적 없는 오랜 세월 술담배한 것도 생각나고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무엇보다 세상의 누구들처럼 아내의 살뜰한 잔소리나 자식의 꾸준한 관심 없이,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릴 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하는 성미에 혼자 전디고(아빠가 자주 쓰는 ‘견디다 방언) 말지, 오직 정신력만 단련했을 것이다.


아빠는 ‘혈뇨’ 신호탄 전부터 “소변이 자주 마렵다” “밤에 잠을 잘 못 잔다” 라고 부쩍 자신의 몸상태에 대해 말하곤 했다. 평소 산에서 두어바퀴 굴러 떨어져도 허허 웃고 그 아프다는 치통에도 얼음을 와작와작 씹으며 그냥 견디던 그런 사람인데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주말마다 등산다니고 오히려 다이어트가 필요한 상태에 무슨-이라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다가도, 교회도 안 나가는 땡신자 주제에 습관적으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것도 없는 아빠입니다. 다른 건 바라지 않으니 건강하게만 해주세요.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불편한 상황을 그 당시는 덮어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몇 개월 뒤 공무원 시험이라는 큰 과제가 남아 있고, 본가와 400km 떨어져 서울에 있는 데다가 공부하면서 편의점 알바도 나가야하고 모아둔 돈도 생활비로 야금야금 나가는 상황에 이래저래 선뜻 나서기가 어려웠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빠 병원엘 가! 돈은 걱정 말고.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얼른!”이 전부였다. 평생 혼자 병원에 간 역사가 없는 아빠에게 그 성격을 알면서 혼자 병원에 가라는 말이 최선이었던 게 지금와서 후회스럽다.


그리고 그해 여름 공무원 시험에 붙었고,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며 집에도 한 며칠 가 있어야지 하고 간단히 짐을 챙겨 본가에 갔는데, 3일 간 쉬다 와야지 했던 가벼운 상황은 2주 간 아빠 옆에서 상급병원을 예약하고 아빠의 상태를 살피며 눈물로 하루를 보내는 심각한 사태로 전환됐다.


1년 만에 2번의 개복(開腹), 도합 10시간 이상의 수술


2021년 8월 처음 아빠가 진단 받은 병명은 방광암이었다. 덩어리가 크고 뿌리가 꽤 깊어 방광을 아예 떼어내고 소장으로 인공방광을 만드는 대수술을 그해 10월에 받았다. 그리고 1년 동안 아빠 혼자 짐을 챙겨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항암 주사를 맞고 그렇게 나름대로 버텼다.


집앞 1차병원에서 처음 아빠의 몸상태를 말하고 복부 CT를 찍었을 때 의사는 힘 없이 옆에 서서 아무것도 모르는 눈을 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물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세요?”

-딸이요

“형제는 있으세요?”

-아뇨 저 혼자요

“아…”

-… …

“큰 병원에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뭐 드라마도 아니고 30여 년 인생 처음으로 이 같은 비극적인 상황은 처음이었다.

앞으로 일할 곳도 집과 멀리 떨어진 지역이고, 이 나이에 9급 신규로 들어가 처음 일을 배우며 이래저래 적응할 일이 구만리인데

환갑이 넘어서도 일하는 우리 엄마는 또 어떻고

나름대로 살아보겠다며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하루하루 분투하는 상황에, 우리 아빠가 암이라고?!

이걸 엄마한테, 또 주변 가족들에게 어찌 말하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아득했다.


그래도 하늘에서 땡신자의 생존형 기도를 가련하게 여기셨는지 방광 수술이 잘 됐다는 기쁜 이야기를 들었고, 아빠의 회복도 빨라보였으며 나는 걱정했던 입직과 동시에 휴직을 하지 않고 1년간 제법 툴툴대는 공무원으로 경력을 이어갔다.


얼마나 더 씩씩해져야할까


그러다 2022년 10월, 열심히 홀로 항암주사를 이겨내던 아빠가 복통이 있다며 억지로 밥을 먹고 있다고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 미주알고주알 어딜 갔고, 뭘 먹었고 친구처럼 수시로 카톡을 하는 아빠가 전화기 너머 또 낯설게 1년 전 그때 그 의아한 말투로 증상을 전했다.


당시 항암을 받는 지역병원에서 CT 촬영 결과 악성종양 의심 소견이 나왔고, 아빠는 자주 배가 찌르르르 하다며 복통을 호소했다.

그렇게 이번에도 ‘큰 병원’인 세브란스 암병원을 급히 예약하고 아빠는 이번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병이 꽤 진행돼 복막전이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함께


이날 연가를 내고 병원 진료에 동행한 나는 1년 전 그때와 다르게 울지 않았다. 착잡했으나 받아들였다. 그리고 저번처럼 수술하고 관리하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려고 했다.

이후 몇 번의 추가 진료와 수술 전 검사를 위해 직장에 양해를 구하고 하루 이틀 연가를 내 아빠 보호자 노릇을 했다. 이것도 전에 한번 해본 거라고 꽤 빠릿빠릿하게 임했다.


아빠는 진단 한 달 만인 2022년 11월 22일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코로나 시국에 상주보호자 1명만 동행이 가능해 내가 옆을 지켰고, 수술에 들어가고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의사의 호출을 받았다. 사진상보다 상황이 더 안좋아 개복 수술을 해야하고, 주변 횡경막이나 소장으로 만든 인공방광에도 전이가 돼 다 손 댈 수는 없다고. 이번에 문제가 된 우측 대장을 절제하고 추후 항암으로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작년 처음 아빠의 병명을 들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식은땀이 나고, 의사를 만나고 나오면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나왔다.


집도의는 이 말을 하기 전 내게 1년 전 지역 병원에서 다른 의사가 그랬듯 내게 똑같이 물었다.

관계가 어떻게 되냐, 딸이냐, 그리고 똑같이 한숨을 쉬었다. 그 표정과 말투, 상담실 속 숨막히는 침묵 속 에 전신에 힘을 잔뜩 주고 간신히 버텼다.

나는 애처럼 보이지 않으려고(이미 애는 아니지만) 담담하게 최선을 다해달라고, 이후 항암을 하면 되지 않냐고 (의사의 착잡한 표정은 애써 무시한 채) 잘 부탁드린다고 몇 번이고 인사했다.


아빠는 개복수술 후 무척이나 아파했다. 무통주사나 마약성 진통제도 효과가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고통 속에 낙상방지용 침대 사이드바를 있는 힘껏 쥐고 눈물 한방울 없이 버텼다.

평소 건장한 체격에 야외활동을 좋아하고 어지간한 불편함에는 기색도 없던 사람이 1년간 두 번의 개복 수술과 항암치료로 20kg이나 줄어든 힘 없는 몸을 음습한 병원 침대에 맡긴 채 얼마나 무력감을 느꼈을까

5인실 좁은 입원실에서 커튼을 두른 채 아빠는 신음하고 나는 괜찮아 괜찮아 하며 눈물을 먹었다.


다 지나간다, 언제나 그랬듯 앞으로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나 같은 땡신자의 기도에도 약발이 있나 아빠는 그래도 빠르게 회복했다.

한 이틀 괴로워하더니 이제 한 시간 이상 걷고 또 온갖 깔끔을 떨며 머리를 감고 주변 청소까지 한다. 내가 아는 아빠다. 이 정도면 됐다고, 평소의 아빠 모습에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감사하게 되는 날들이다.


큰 괴로움을 겪으니 사람이 철학적이게 된다. 삶과 죽음, 그 사이의 외로움에 대해 생각하며 인간은 결국 혼자이고 언젠가는 떠난다는 당연한 진리를 상기한다.

이미 스물 여섯살 때 나만큼 사랑하던 할머니를 하늘로 보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남자친구와 헤어졌으며 이제 나보다 먼저 생각하는 우리 아빠가 아프다. 상황을 맞닥뜨린 당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인데 시간이 약이라고 이것도 다 지나왔다.


지금 이 모든 상황은 언제나 그랬듯 다 지나갈 것이다. 빨리 떨치고 싶은 슬픔도 오래 붙잡고 싶은 기쁨도, 미처 생각지 않은 별다를 것 없는 일상도 다 그렇게 지나간다.


아빠가 아프니 철 없는 딸이 철학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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