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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May 12. 2021

외할머니와 립스틱

우리 할머니는 흑설탕 캔디 같은 걸 한 손 가득 꼭 쥐어보신 적이 있던가

그러니까 할머니에게 립스틱을 사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아이러니하게도 5 5, 어린이 날이었다. (*글의 할머니는 전부 나의 사랑하는 외할머니를 칭한다.)


어린이들을 위해 주어진 휴일을 만끽하고 있을 때였다. 5월의 하늘은 쾌청했고, 바람은 시원하고 부드러웠다. 이맘때만   있는 연둣빛의 초록 나뭇잎이 흔들리는 모습은 싱그러웠다.


 모든 풍경이 보이는 카페의 야외 테라스 자리에 앉아 [나의 할머니에게] 읽었다. 책에 포함된 단편, [흑설탕 캔디] 읽고   이전에 읽었을 때는 들지 않았던 생각 하나가 문득 들었다. 좋아하는 백수린 작가의 다른 단편집에서  번이고 읽은  있는 작품이었는데도 말이다.


이전에는 분명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오는 파리의 어떤 건물  앞에서 흔들리는 할머니의 고운 백발 단발머리와 발목에서 흩날리는 플로럴 스커트' 마음을 빼앗겼다.


그러나 그날은 달랐다. 소설 속의 난실 할머니가 아주 어린 시절 언젠가 손에   있는 '흑설탕 캔디' 마음에 와서  박혔다. 그리고 문득 우리 할머니에게 '흑설탕 캔디' 같은  쥐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할머니는 흑설탕 캔디 같은    가득  쥐어보신 적이 있던가?' 사실 생각이라기보다 의지나 다짐 같은 것에 가깝겠다.


평생을 남편, 딸들, 손주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우리 할머니. 그런 할머니에게도 작지만, 빛나고, 달디  어떤 , 그래서 이것만큼은 내어주지 않고 손에  쥐고 있고 싶은 물건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겠나.


 생각이  순간은, 내가 겪지 않은 100년에 가까운 할머니의 삶이 (나는 평생에 걸쳐도 완벽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대신 억울하여 울컥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립스틱 생각했다.


, 아르마니, 디올, 샤넬, 입생 로랑...  고민 없이 브랜드를 줄줄   있는 . 나는 이미 많이 가진 . 그러나 그중 어느 것도 밑바닥이 보일만큼 써본  없는 . 사용을 위해 사기보다 '산다' 행위, '사는 순간의 기분' 자체로 나에게 의미 있는 . 어쩌면 가장 만만해서 친구들에게도 자주 선물하는 .


작고, 말갛고, 반짝이고, 고급스러운, 손에 쥐고 있으면 기분이 좋은 .


그렇지만 할머니에게는  번도 선물한  없는 . 우리 할머니는 가져보지 못한 .



출처: 다산책방, 입생로랑 / 우리의 여자 어른에게 선물하고 싶은 입생로랑 립스틱



어린 시절 나는 시골 할머니 댁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혼자 기차, 버스를 타고  적도 있다.) 손주들  가장 많은 시간을 할머니 댁에서 보냈기 때문에, 할머니의 가장 많은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엄마보다 아주 조금  나이가 많았던 할머니는 보통의 시골 할머니보다 훨씬 고우셨다. 늘씬하고 키가 컸고, 예쁜 옷가지를 좋아하셨다. 우리 할머니를  적도 없는 학교 친구들에게 자랑할 만큼, 당시 나에게는 그게  자랑거리  하나였다.


나의 아름답고 젊은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 손에 흙이 아니면 물을 묻히고 계셨지만 시장이나 병원에 가시기 전에는  곱게 화장을 하셨다. 밭에서 그을린 피부를 하얗게 덮고, 눈썹을 중년의 여배우처럼 그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붉은 립스틱을 바르셨다.


할머니의 조촐한 화장대 위에는 립스틱이 두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노란색 케이스의 초록색 립스틱이었다. 분명 립스틱은 초록색인데 어째서 그토록 새빨간 색이 나오는지 신기했다.


 신기한 초록색 립스틱이 사실 시장에서 파는    짜리라는 것을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영상 '시장에서    립스틱 5 원어치 리뷰' 보고서야 최근에 알았다.


 "웃기지 않냐? 주황색을 발랐는데 핑크색이 자꾸 나온다"라는 박막례 할머니 말이 이토록 두고두고 기억나게  줄이야.


출처: 박막례 할머니 유튜브 '시장에서 산 천원립스틱 5천원어치 리뷰'


그래서 할머니에게 립스틱을 선물하려고 한다.


주황색을 바르면 핑크색이 자꾸 나오는 시장 립스틱이 아닌, 주황색을 바르면 주황색이 예쁘게 묻어 나오는 백화점 립스틱.


노란색 투박한 케이스가 아닌 화려하게 빛나는 고급스러운 케이스의 립스틱.  번도 꺼내 바르지 않더라도 손에 쥐고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작지만 값비싸고 어여쁜 립스틱.


아마 할머니는 손녀가 서울 백화점에서 사 온 외우지 못할 외국 브랜드의 립스틱이 귀하고 귀해 한번을 꺼내 바르지 못하겠지. 저 TV 아래 서랍장 한 귀퉁이에 소중하게 넣어두겠지. 그리고 서랍장에 눈길이 닿을 때마다 코끝이 몇 번이고 찡하겠지.


"이게 무신 립스틱이라고?"  번이고 되물어보시우리 할머니 손을  잡고 알려드려야지.


입.생.로.랑하고 ㅇ과 ㄹ을 최선을 다해 발음할 할머니의 입술이 벌써부터 그립고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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