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 부치는 안녕
우리 할머니는 셈이 밝고 통찰에 뛰어났다.
집안의 가장 웃어른이기도 했지만 그 남다른 판단력 때문에 집안의 모든 문제는 할머니의 손을 거쳤다. 석사에 박사까지 원 없이 공부한 자식 손주들도 삶이 막힐 때면 맡겨놓은 답지를 펼치 듯 할머니에게 달려왔다. 할머니는 가끔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상공부 장관이 되었을 거라 했다'는 소리를 했는데 온 식구가 '그러고도 남지...' 맞장구치는 것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할머니는 봉건적 사고방식을 채 떨치지 못한 시대에 태어났다. 고명딸이라 집에서 꽤 귀히 여겼지만 여느 소녀들 이상의 삶을 누릴 수는 없었다.
열아홉에 시집을 왔다. 시집 살림이 넉넉하고 신랑감이 얌전하다니 그만하면 다행이었다. 시할머니에 시부모, 시동생들까지 줄줄이 꿰어진 큰 살림이었지만 큰며느리의 숙명이란 으레 그런 것이라 여겼다. 첫아들을 얻고 백일을 좀 넘겼을 무렵 6.25 전쟁이 났다.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떠났고 다시 만났을 때 몇은 죽고 없었다.
자동차를 몰 정도로 넉넉했던 살림은 거덜이 났고 굶주리고 무력한 식구들만 남았다. 콩가루가 되었어도 뛸 줄 모르는 게 양반이라 시장으로 공장으로 돈 되는 데라면 가리지 않고 뛰어다니며 벌린 입에 숟가락을 떠 넣은 것은 할머니였다. 투정과 좌절을 일삼으면서도 처마 밑으로 부지런히 기어들어오는 이들을 거두고 챙긴 것이 할머니였다.
그 덕에 우리 집엔 항상 손님이 넘쳤다. 작은 아빠, 작은엄마, 사촌들은 오면 몇 밤씩 자고 가는 게 기본, 최소한의 가족모임이라도 작은할아버지, 큰고모 할머니, 작은 고모할머니, 의정부 할머니, 수유리 할아버지, 무슨 아저씨, 무슨 아줌마 등등 다 모이면 삼사십 명이 금방 그득했다. 마당에선 연신 고기를 굽고, 부엌에선 큰 그릇에 담긴 음식들이 줄을 지어 나왔다.
우리 할머니는 키도 손도 발도 다 작았다. 그러나 눈과 귀는 컸다. 결혼 전에는 홑꺼풀에 작은 눈이었다는데 어느 날 쌍꺼풀이 생기더니 눈이 커졌다 했다. 나는 할머니가 꼭 신이 눈과 귀를 키웠다는 옛이야기 속 주인공처럼 여겨졌다. 더 많이 보고 들으라고 뚝딱뚝딱 도술을 부려 눈과 귀가 쑥쑥 자라나는 모습을 상상했다. 모인 어른 중 할머니가 가장 작았지만 모두가 할머니의 눈과 귀에 들어있었다. 모두가 할머니의 손을 거쳤다. 가장 높고 중요한 곳에 콕하고 찍힌 점 하나마냥 할머니는 우리의 중심이었다.
할머니가 빠진 가족모임은 할머니의 장례식이 처음이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생경하여, 할머니가 앉았을 자리에 대신 놓인 사진을 볼 때마다 울었다. 아흔네 해나 무겁게 눌려온 삶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는데 어디 한 곳 꺼지거나 솟아오르지 않고 멀쩡한 것에 부아가 치밀었다. 내 마음에라도 구멍을 내야 했다. 딱 할머니만 한 크기의 구멍을 뻥. 할머니가 내 턱 밑에 올만큼 작았기에 다행히 얼굴은 뚫어지지 않고 간신히 웃고 있을 수 있었다. 껍데기만 남아 텅 비어 휘청이는 속을 감추기에 벙벙한 상복은 안성맞춤이었다. 상처를 회복하려는 본능으로 내 몸은 계속 물을 내었다. 새 살이 다 차오를 때까지 눈으로 코로 얼마나 더 물을 내야 하는지 아직은 가늠할 수가 없다.
우리 할머니는 아침으로 커피와 토스트를 즐기고 나와 동생에게 간식으로 버터와 설탕이 충분히 들어간 프렌치토스트를 만들어 줄 정도의 신여성인 동시에, 성경에 붙들려 살던 크리스천이면서, 사람을 만나면 무슨 띠, 몇 월 생인지를 묻곤 손가락 마디를 단번에 꼽아보는 육십갑자 이론가였다.
어떤 모습도 한치의 어설픔 없이 어울렸기에 나는 이 부조화간의 괴리를 겅중겅중 오가는 할머니의 삶이 더없이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보였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려서 큰 병을 앓아 다리를 저는 내 사촌동생이 있는데 할머니는 그 아이가 뱀 달에 태어난 쥐라서 어쩔 수 없다 했다. 소위 말하는 사주팔자인데 오랜 시간을 살아온 관록과 경험, 어깨너머로 주워 들었다는 얕은 지식을 모아 만드는 우리 할머니 식이 있었다. 생년월 (일까지는 할머니가 미처 다 못 배웠다 했다)을 들으면 손가락 마디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중얼중얼 조합하곤 툭하니 뱉는 결론인데 매번 너무 그럴듯했다.
쥐가 뱀굴에 던져졌는데 어찌 멀쩡하기를 바랄 수 있겠나! 잔뜩 도사린 독사 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쥐를 상상하면 다리 하나 물린 걸로 끝난 것이 천만다행이다 되려 감사한 마음까지 솟을 정도였다.
솔직히 나는 가끔 할머니가 하나님을 믿으며 어찌 저리 미신 같은 사주팔자를 읊는가 의아했는데 이만큼 자라고 보니 그것이 할머니가 고난을 받아들이는 방식이었구나 이해하게 되었다. 일면 체념하는 듯싶지만 분노와 안타까움을 삭이고 견디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을 셀 수 없이 죽음에게 내어주고, 싸워 이길 수 없는 비극을 넘어오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입은 갑옷 같은 것이었다는 걸.
할머니의 사주팔자 이야기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하기에 전래동화 듣는 것 마냥 재미있다. 호랑이는 야행성이라 밤에 나야 제대로 기운을 펴고, 소는 꼴 먹는 시간 외엔 일을 열심히 해야 하며, 뱀은 겨울잠 자기 전에 잔뜩 먹고 뜨신 굴에 들어앉는다는 둥 모든 캐릭터가 어찌나 생생하고 그럴듯한 지 이야기가 절로 살아 움직였다.
옛이야기가 으레 그렇듯 이 이야기의 끝에도 교훈이 따라붙는데 '그래서 사람은 자기 분수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타고난 내 몫이 아닌 것을 탐하며 진을 빼거나 남에게 죄를 지으면 안 된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며 만족해야 한다.
사주 맹신자라면 아마 부적을 쓰거나 굿을 해서라도 안 좋은 상황을 모면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에게 사주는 어디까지나 진단. 현재에 감사하기 위한 사실 확인 일 뿐이었다.
아픈 손자를 위해 할머니는 매일 기도하고 성경을 읽었다. 힘든 투병생활을 버틸 수 있도록 어마어마한 병원비를 감당하고 병이 낫고 난 이후에도 먹고 살 방법을 마련해주려 분주했다.
할머니 장례식에 정말 많은 목사님과 교회분들이 다녀가셨는데 모두 오실 때마다 그 동생을 불러 너의 건강을 위해 할머니가 얼마나 기도하셨는지 굳이 확인해주고 가셨다. 그때마다 나는 콱 깨물린 쥐를 안타깝게 떠올리던 할머니의 눈빛과 그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들고 읽던 성경을 떠올리며 그 부조화가 어찌나 시큰한지 눈을 데굴데굴 굴리느라 혼쭐이 났다.
아빠는 호랑이, 엄마는 말, 나는 돼지, 내 동생은 소, 할머니는 용이었다. 할머니는 큰 동물은 큰 동물이 지키는 달에 나야지 작은데 비집어 들어가면 힘들다 했는데 우리 가족은 대충 다 큰 동물이라 꽤나 잘 어울린다 생각했다.
십이간지 중 용은 본래 별종이다. 다들 땅에 발붙이고 사는데 저 혼자 하늘에 갔다 바다에 갔다 온갖 영험함을 발휘했다 하지 않나.
한참 춥더니만 할머니가 돌아가신 딱 그날부터 발인하는 순간까지 거짓말같이 날이 풀렸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내내 크고 밝은 보름달이 밤을 밝혔다.
용이 승천하는 날이니 그럴만했다.
옛이야기 속 용은 죽어서도 굳이 곁에 머물며 여기저기 지키겠다 하던데 할머니는 이미 다 했으니 이제 그냥 하늘에 가서 살면 좋겠다.
크고 푸른 용답게 크게 기지개 한번 펴고 온갖 귀한 것 다 움켜쥐고 높이 높이 올라가면 좋겠다. 가서 영국 신사 같았다던 할아버지도 만나고, 짚신을 동네 제일로 곱게 삼으셨다던 할머니 아버지도 만나고, 사주풀이 가르쳐주던 할머니 동생도 만나서 마저 재미있게 배우면 좋겠다. 큰 어른 노릇일랑 여기 다 두고 새각시로, 손 고운 고명딸로 그렇게 살면 좋겠다.
할머니 내 얘기 다 들었지?
그러니까 잘 가.
그리고 우리 또 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