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eday Jan 14. 2020

CH01. 바다의 계절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1월, 한 겨울입니다. 많은 지인이 서핑을 하지 못하겠다며 안타까움을 전해오지만 사실 서핑은 사계절 가능하며 심지어 동해의 파도는 가을부터 점점 커지기 시작해 겨울에 가장 힘이 좋고 큰 사이즈로 들어옵니다. 이건 비밀인데, 바다의 계절은 육지보다 두 개의 달 정도 늦게 찾아옵니다. 뜨거운 한 여름, 바다에 뛰어들곤 차가운 수온에 부르르 떨던 경험을 아마 다들 해봤을 거예요. 육지가 8월이라면 바다의 수온은 6월처럼 시원합니다. 아마 물과 땅이 데워지고 식혀지는 시간차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바다는 조금 천천히 계절을 맞이합니다.


서핑을 시작하곤 계절의 흐름이나 변화에 더 민감해졌습니다. 지금의 계절에 해가 언제 뜨고 언제 지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바다 수온은 어떤지, 요즘의 하늘색은 어떤지, 다음 계절이 어느 지역까지 왔는지, 이번 주말 바람은 어디서 얼마나 불어오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해가 뜰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서핑을 하며, 수온에 따라 슈트를 정하고, 바람에 따라 파도를 예상하며, 도시에선 통 보지 않는 하늘을 주말마다 찾는 바다 위에서는 원 없이 바라보기 때문이죠.


이 변화가 참으로 좋습니다. 사무실에선 문득 정신을 차려서야 아! 어느새 해가 졌네? 어느새 가을이다!라는 식이었거든요. 건물 속에선 계절이 멈춥니다. 늘 적정 온도 언저리에 머물러있죠. 과거 언젠가 택시 기사님이 봄에 피는 꽃의 순서를 줄줄 외우시는 걸 보며 감탄한 적 있습니다. 사무실에만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자연의 흐름이었죠. 하지만 이제 매 주말 바다로 향하는 나 역시 계절에 따른 변화를 술술 말할 수 있어, 가끔은 그 기사님을 떠올리며 그런 종류(?)의 사람이 되었단 사실에 스스로 감탄하곤 합니다.


사람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죠. 누군가는 아침 지하철 풍경 속 달라진 옷차림에서, 먹고 싶은 메뉴의 변화에서, 밤바람 온도의 변화에서, 매미 소리 대신 들려오는 귀뚜라미 소리에서, 옆구리의 시림 정도에서 계절을 느낍니다. 그리고 서퍼의 계절은 바다의 변화에서 찾아옵니다.



여름 


많은 분들에게 익숙한 바다의 계절 '여름'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해변에 사람이 많습니다. 많아도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많습니다. 까만 슈트를 입은 사람들이 물개 떼처럼  해변과 바다를 가득 메웁니다. 안전을 위해 서핑을 할 수 있는 레저존과 물놀이를 위한 해수욕존이 나뉩니다. 서퍼들은 레저존을 가두리장이라 부르는데요, 서핑을 즐기기엔 위험할 정도로 좁은 해변도 있습니다. 그런 곳은 처음 서핑을 배울 땐 강사들의 보호 아래 있어 직진 라이딩이 가능할 수 있으나, 라인업*에서 프리 서핑으로 파도를 잡아타고 나오기엔 영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두리가 시작되기 전 새벽 서핑이나 종료된 후인 선셋 서핑을 선호하게 됩니다. 레저존이 넓은 해변도 서퍼가 많아 바다 위 공간이 여의치 않습니다. 본디 서핑이란 하나의 파도에 한 명의 서퍼가 파도의 면을 따라 옆으로 달리는 것인데, 우스갯소리로 여름 바다에서 사이드로 달리면 그 사람이 잘못한 것이란 이야기도 나옵니다. 한산한 라인업이 간절해지는 계절입니다.


여름밤은 낮의 열기만큼 달뜬 청춘들이 바다로 몰려듭니다. 특히 조용한 어촌 마을이었던 양양의 이곳저곳은 서핑 체험을 위해 찾은 많은 사람들과 그들을 반기는 샵들로 인해 마치 보라카이처럼 반짝이고 흥으로 넘치죠. 이 많은 사람 중에는 원래의 목적대로 유흥의 소임을 다하는 이들도 많겠지만, 누군가는 오늘 나를 밀어준 파도를 잊지 못해 다시금 이곳을 찾고 그렇게 여름이 아닌 어느 계절에도 이곳에 남게 되겠지요.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환영합니다. 기왕이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면 좋겠네요.



여름은 태풍이 오지 않는 한, 양양의 파도가 가장 작은 계절입니다. 남쪽에서 파도가 올라오기 때문에 제주도와 부산의 파도가 좋은 날이 많습니다. 이때의 서핑대회는 모두 남쪽에서 열리고, 인스타그램 피드는 온통 남쪽 해변으로 가득하죠.


그러다 보니 기껏 찾아간 주말인데 물살의 일렁임조차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 날엔 햇빛도 어찌나 강한지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나 등골과 날갯죽지 같은 곳에서 땀이 흐르고, 그 찝찝함은 영 익숙해지기가 어렵습니다. 그럴 땐 보드를 들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꽤 멀리 나가 앉아 해변을 바라보면 사람들의 웃음 소리나 서핑 강사들의 구령 소리 같은 게 멀리서 날아오죠. 눈앞에 있는 광경인데 마치 몇 년 전 기억인 것처럼 아득합니다.


밤이 되면 누군가의 기타 공연이 열립니다. 띠링- 띠링- 띠링- 튕겨지는 기타 줄에 더러는 서늘한 온도가 음계에 실립니다. 그리고 바람이 붑니다. 기타 소리가 이렇게나 여름밤과 찰떡이었던가.. 수많은 여름밤을 살아왔는데 왜 나는 이제야 알았을까요.



파도가 올라오지 않던 작년 여름, 아침 7시부터 먼바다로 나갔습니다. 나의 첫 프리다이빙이었습니다. 일행에게 설명을 듣고 첫 시도에 덕 다이브*와 줄 잡고 내려가기를 성공했죠. 제주의 피, 해녀의 피라며 모두가 손뼉을 쳤습니다.


참으로 영문을 알 수 없습니다. 서핑을 하기 전엔 수영도 못해 제주도 출신이라 말하기 민망했던 나인데, 지금은 수영도 할 수 있고 심지어 프리 다이빙까지 시도하고 있다니 말이죠. 아마 바다에 뒹군 몇 년이란 시간 동안 물속에서의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덕분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것을 ‘물짬’이라 부릅니다. 물짬이 차면 서핑 실력이 는다던데, 나는 다른 것들이 느는 걸까요.


다이빙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너무 좋아 그대로 켜 둔 채 차를 세웠습니다. 노래에 맞춰 친구들과 춤을 추었어요. 파도가 없어도 행복했습니다. 예전엔 파도가 있는 바다만이 서퍼의 바다라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파도가 없는, 일명 ‘장판’인 바다는 서퍼의 우울함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파도를 넘어 바다가 되고 자연이 되자 여유가 생겼습니다. 파도가 없는 날, 나의 모든 놀이가 곧 서핑이라 느껴졌죠. 물론 파도 위를 달리는 서핑을 가장 사랑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괜찮을 수 있는 법을 배웠습니다. 행복의 범주가 늘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가만히 앉아 장판을 견디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죠. 파도 가뭄이 지속되면 파도를 찾아 남쪽으로 트립을 떠납니다. 어느 지인은 특정 해변이나 서핑 숍을 찾지 않고 항상 차에 보드를 싣고 다닙니다. 서퍼라면 언제나 파도가 있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죠. 무면허 서퍼는 눈물이 흐르지만 괜찮습니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그리고 파도가 있는 제주도가 있습니다. 무려 여름에는 해외와 같은 파도가 들어오는 중문해변이 있는 섬이죠.


중문은 물때에 따라 파도의 사이즈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를 확인하고 입수해야 합니다. 보통 이른 아침에 4시간, 조금 늦은 오후에 4시간을 타는 것 같습니다. 파도가 부서지지 않는 만조일 땐 잔디밭에서 낮잠 자기도 하고 근처 계곡에서 수영을 하거나 또 다른 바다로 놀러 가 시간을 보냅니다. 수영복 위에 대충 티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자연을 뛰놀다 보면 마치 자연인이 된 기분이지요.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마저 내게는 파도와 같이 느껴집니다.



SNS에 여름을 떠나보내는 글을 남겼더니 댓글이 달렸습니다. ‘여름은 아무리 길어도 짧다.’ 그래, 신기하죠. 지난겨울은 그렇게도 길더니 여름은 순식간입니다. 그 찰나의 쨍한 햇빛과 소란, 덥다가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여름밤, 왁자지껄함, 기타 소리, 시원한 맥주, 누군가는 꼭 터트리는 밤 해변의 불꽃놀이, 알딸딸했던 기분들이 자꾸 끝나지 않는 여름을 꿈꾸게 만듭니다. 태풍이 지나갑니다. 일출 서핑은 늦어지고 일몰 서핑은 당겨지는 여름의 끝입니다. 그렇게 영원히 더울 것만 같던 날씨도 잦아듭니다.



라인업 : 깨지지 않은 상태의 파도를 탈 수 있는 바다 한가운데.

덕 다이브 : 프리 다이빙 입수 기술. 한 번에 수직으로 깊이 잠수하는 방법이다.



18년 08월 17일


분명 엄청 졸렸는데 눈을 감은 지 두 시간 넘도록 잠들지 않는다. 창문을 열었더니 오랜만에 밤공기가 시원하다. 벌레 울음소리가 어젯밤에도 있었던가.


창밖을 보다 플래카드를 발견했다. <폭염은 재난입니다. 폭염 신고 및 문의 00) 000-0000> 어쩌면 여름 내내 붙어있었을 저것을 이제야 봤구나. 폭염 신고는 대체 어떻게 하는 것일까. 저곳에 전화해, 더워요. 살려주세요. 하는 걸까. 그러면 저들은 무엇을 해주나.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주시나. 난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면 좋겠다.


지난주 바다에서 가을 초입을 느꼈으나, 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움에 숨이 막혔다. 계절이란 한 번에 오지 않는 것이라, 아직 양양에 멈췄나 했더니 드디어 오늘 밤, 서울에도 가을이 도착했나 보다. 이러다 어느새 날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면 낮마저 완연한 가을이 되겠지. 계절 참 성실하다.


19년 08월 10일


여름밤이다. 바다가 북적인다. 잠들려고 누우니 창 밖으로 술에 잔뜩 취한 이들이 왁자지껄 지나간다.

나의 많은 흑역사도 양양 해변가의 여름밤에 흩뿌려져 있지. 아아, (망할) 청춘이다.




가을



바다의 소란스러움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습니다. 양양에 꽤 큰 파도가 들어와 팔꿈치나 가슴팍에 멍이 들고, 제주도 남쪽이 아닌 북쪽 면에 파도가 들어온단 소문이 돌기 시작하면 가을을 실감합니다.


과거 일기를 읽어보니 가을 양양에 파도 흉년이 든 적 있었네요, 확실하진 않지만 엘리뇨와 라니냐의 주기 변화에 따른 영향이란 이야기가 있더군요. 서핑은 지구의 흐름에서 태어났기에 그와 함께 변화합니다. 그렇게 지구 반대편의 작은 바람이, 작은 물결이 지구를 돌아 내 앞에서 부서지고 나는 그 위에서 함께 달리는 것이라니! 이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계절 중 서핑하기 가장 좋은 계절을 뽑으라 하면 양양 기준으론 가을인 것 같습니다. 바다에 앉아 파도를 기다리는 동안 적당히 시원해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고 곧이어 파도도 들어옵니다. 바다 반 하늘 반인 라인업에서 유독 하늘은 더 높아집니다. 선셋도 더 아름다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요. 이 멋진 계절엔 양양에서 수많은 서핑 대회가 열립니다.


 


내가 유일하게 참여했던 ‘17년 양양 서핑 대회’의 경우 700여 명의 선수가 출전했고, 관람객만 무려 3000여 명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서핑 대회가 열린다는 것과 그렇게 많은 인원이 참가한단 사실에 적잖이 놀랄 수 있으나, 사실 한국에서도 꽤 많은 서핑대회가 열립니다. 양양만 하더라도 죽도 해변뿐만 아니라 하조대, 대진에서 열리고, 제주도에선 이호, 중문, 쇠소깍, 부산에선 해운대, 송정 그리고 울산 진하 등 다양한 곳에서 대회가 열립니다.


아무리 서핑을 좋아한다지만 이 모든 대회를 쫓아다니긴 어렵죠. 나는 제주와 양양의 대회를 주로 다니는데, 3년 차가 된 17년이 되어서야 양양에서 첫 시합을 나갔습니다. “저 휴가를 내겠습니다. 사유는 서핑 대회 참가입니다”라고 했을 때의 묘한 기분이란.


경기는 일정 시간 동안 일정 횟수의 파도를 타고, 가장 최고점과 그 차점의 점수를 합해 결과를 내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시간과 횟수는 부문에 따라 조정합니다. 나의 경기는 10분 동안 다섯 개의 파도를 타는 것이었는데, 단. 한 개의 파도도 잡지 못한 채 예선 1차전에서 ‘광탈’했습니다. 결국 처음이자 마지막 시합 출전 경험이 되었는데요. 지금 생각해도 머쓱합니다.


사실 슬럼프에 빠져 ‘파도 놓치기’가 당시 나의 트렌드였기에 결과가 놀랍진 않았으나 속상하지 않을 순 없었습니다. 어떤 이는 내가 기본기부터 잘못됐다 했고, 어떤 이는 유명 선수들과 한 조여서 쫄았다고 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많은 지인 앞에서 10분이나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였죠.


그런데 신기하게도 속상함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서핑을 시작하기 전에 나였다면 실패에 대한 생각으로 우울함에 잠겨 몇 날. 며칠은 ‘이불킥’ 했을 텐데, 서핑 덕분일까요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요 ‘받아들이다’라는 감정 처리 방법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프로 서퍼에게 기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커다란 파도에 와이프 아웃* 되면 어떻게 하시나요.’ 서퍼는 대답했습니다. “인간의 힘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이 고통도 지나감을 알고 기다립니다.” 그 경지에 이르진 못했지만 그 기분을 조금은 체득한 날이었습니다.



나의 결과야 어떻든 당시 대회는 개인적으로 그동안의 대회 중 가장 즐거웠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아는 사람이 늘고 보는 눈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인들이 파도를 놓치거나 잡을 때마다 탄성과 환호를 지르고, 멋진 기술을 선보였을 때 진심으로 감탄하는 등 온 감정을 다해 시합을 즐겼죠. 만약 서핑 대회 참관 경험이 있으나 재미가 없었다면, 그 대회에 파도가 없거나 당신이 응원할 서퍼가 많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으나 나의 서핑은 관계가 풍성해지면서 더 즐거워지고 있습니다.



*인도 보드 : 통 위에 올려 그 위에 올라가 밸런스 운동을 할 수 있는 형태의 나무 보드

*와이프 아웃 : 서핑을 하다가 보드에서 떨어지는 것



18년 11월 01일

미국의 제니 저지 교수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란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진리나 아름다움 같은 것이겠지만, 최근에 뉴욕시에서 여름을 보내 보니 에어컨이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최근 한국의 현혜원은 “파도가 있는 주말”이라 강하게 확신하고 있다.


18년 11월 28일

이번 가을은 파도 흉년으로 마음이 흉흉했다. 인덕은 지갑에 나오는 것이란 우스갯소리 마냥 서퍼의 인덕은 파도에서 나온다. 지난 토요일 하루 좋은 파도 만났다고 며칠 째 실실실.


19년 10월 12일

가을 태풍이 몰려왔다. 어쩜 그렇게 방향을 잘 트는지 큰 피해 없이 양양에 좋은 파도가 몰려왔다. 이런 엄청난 시점에 난 발리에 있고, 발리는 파도 가뭄에 시들어가는 중이다. 젠장.



겨울


한겨울 양양의 해변은 고요하고 적막합니다. 장담하건대 지금 이 글을 읽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고요합니다. 자동차 소리도 사람 소리도 벌레 소리도 하다못해 어딘가 간판의 전기 돌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눈이라도 내리는 날엔 마치 죽어있는 동네 같죠. 시간엔 냄새가 존재하고 공기엔 질감이 존재합니다. 양양의 겨울밤에선 그을린 냄새가 나고, 서울의 것 보다 차갑고 쫀득거리는 공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냄새는 분명 누군가 나무를 때워 이 밤을 데우고 있는 것이며, 공기의 두터운 질감은 바다에만 머물지 않는 물방울이 허공을 채우고 있는 것일 거예요.


별이 쏟아지는 어둠 속에서 그 냄새와 공기를 헤치며 걷다 보면 모든 가게의 불이 꺼져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단순히 늦은 시간 때문이 아닙니다. 북적북적 이곳을 채우던 서퍼들이 따뜻한 햇볕과 끝이지 않는 파도를 찾아 잠시 양양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니, 겨울을 떠났기 때문이죠. 어느 날엔 바들바들 떨며 유일하게 문을 연 핫도그 가게로 들어갔는데, 난로 주변에서 대 여섯 명이 몸을 녹이고 있었습니다. 그 고요한 동네로 모여든 서퍼들이었죠. 우리는 어묵탕을 끓여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마치 펭귄인 양 서로의 온기를 느끼며 붙어 있었습니다. 핫도그 가게에서 말이이에요.



그렇다면 겨울엔 서핑을 쉬어야 할까요? 서핑 씬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서핑 실력은 겨울서 핑을 한 자와 하지 않은 자로 나뉜다.” 겨울에 들어오는 파도의 사이즈는 마치 산처럼 거대합니다. 라인업에 앉아 있으면 등 뒤로 파도가 “쿵쿵쿵쿵!!!!” 하고 부서지는데(과장이 아니에요), 물보라가 몇 미터까지 날아옵니다. 햇빛 좋은 날엔 무지개가 바다 위로 우수수 생겨납니다. 장관입니다. 두꺼운 슈트와 장갑, 부츠는 움직임이 어려워 마치 모래주머니를 얹고 달리는 것 같아요. 할리우드 영화를 봐서 알겠지만, 모래주머니는 주인공을 강하게 만듭니다.



겨울 서핑을 한다고 말하면 백이면 백 같은 질문이 돌아옵니다. “춥지 않아?”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할게요.


추워요.


영하의 겨울입니다. 당연히 춥지요. 다만, 바다 한가운데 앉아 코가 얼어갈 때,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생각을 하다가도 파도가 들어오면 패들*을 하고 라이딩을 하고 신이 나서 헤벌쭉 웃으며 다시 바다로 돌아가 앉을 만큼, 딱 그만큼만 춥습니다. 즉 이 정도의 추위는 내게 딱히 서핑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될 수 없단 뜻입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쓰고 있지만 바다 한가운데에서 소리를 지르며 바람에게 심한 욕을 하곤 합니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다로 향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겨울 파도는 힘이 좋고 라인업에 많은 서퍼가 떠 있지 않아 파도를 잡을 기회가 많습니다. 몸에 착용한 장비는 보온을 위해 두껍기 때문에 다른 계절보다 더 많은 근육과 힘을 써야 하죠. 추위만 견뎌낸다면 레벨 업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입니다. 차가운 바다에 떠 있는 서퍼들은 아마 머릿속으론 따뜻한 햇살이 비치는 어느 날, 슈트를 벗고 멋지게 파도를 가르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거예요. 몸을 따뜻하게 데우는 데는 희망만 한 것이 없는 법이죠.


두 번째, 좀 더 본질적인 이유로 우린 서핑때문에 삶의 축이 달라진 사람들이라 서핑을 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습니다. 해야 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른 것이에요. 따뜻한 난로를 쬐며 이야길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왜 자신이 서핑을 사랑하게 됐는지, 왜 욕 나오도록 추운 겨울 양양에 와있는지를 공유하곤 합니다. 이야기의 등장인물과 상황은 모두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우린 이 안에서 추구하고자 하는 삶을 찾았습니다.


서핑을 하기 전엔 모두 일상을 살아가며 결핍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의 경우엔 틀 밖으로 나가는 용기와 자유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은 해방감, 충만함, 느슨함 등 다양한 결핍이 존재했죠.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서핑을 통해 부족함을 채워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삶을 대하게 되었고 이는 현재와 미래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니 어찌 겨울이라고 서핑을 버릴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의 계절은 겨우 4개뿐입니다. 겨울이 1년 중 4분의 1이나 차지하고 있단 뜻이고, 추위로 저버리기엔 너무나 긴 시간입니다. 또다시 결핍된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기에 우리는 겨울에도 바다로 향합니다.



패들 : 파도를 타기 위해 엎드려 서양 손으로 물을 저어 나가는 기술



17년 11월 21일

어제는 첫눈이 내렸고, 난 바다에 가고 싶다.


17년 11월 12일

11월의 양양. 벌벌벌 떨며 새벽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사람들. 하루 종일 파도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 며칠 굶은 것처럼 고기를 들이붓는 사람들. 기꺼이 공간을 내주는 사람들.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다음 주에 봐요’라며 인사하고 헤어지는 사람들


18년 11월 05일

퇴수 시간은 당겨지고 서핑 후 무엇으로 시간을 보낼지에 대한 고민이 늘었다. 밤의 계절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둠이 더 진해진다면 겨울의 반은 깊고 어둡고 길고.. 무엇을 할까.. 그래. 양양의 고요한 밤을 빌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역시 만취다. 계절을 돌아 만취의 시간이 왔다.라고 잠재적 꽐라는 되내어본다.


19년 02월 24일

라인업에 앉아 파도를 기다리는데,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눈을 찡그리곤 해를 등졌다. 해가 뜰 때 동해에서의 서핑은 어느 계절에나 눈이 부시지만 난 알 수 있었다. 드디어, 겨울이 끝났다. 주위를 둘러보니 겨우내 함께 바다에 떠 있던 서프 버디들이 눈에 들어왔다.





3~4월이 되면 육지는 슬슬 따뜻해지고 꽃을 피웁니다. 하지만 바다는 계절을 늦게 맞이하는지라 수온이 아직 1~2월과 같이 차갑습니다. 남쪽나라인 제주와 부산은 조금씩 장갑과 부츠를 벗기 시작하지만, 양양은 북쪽에서 오는 스웰*을 받기 때문에 꽤 오래 장비를 착용합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차가운 물속의 우리를 달래주듯 공기는 점점 따뜻해지니까요. 겨우내 다른 나라로 떠났던 해변 가게의 사장님과 서퍼들이 한국으로 슬슬 돌아옵니다. 가게를 보수하고 여름 시즌 맞이할 준비에 마을이 분주해집니다. 죽어있던 마을에 조금씩 활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바다 위에도 아는 얼굴이 한 두 명씩 늘어나 반가운 인사를 많이 나누게 됩니다.



양양에서 봄의 파도는 귀합니다. 겨울의 영향이 아직 남아 큰 파도가 간간히 들어오지만, 여름이 다가오기 때문에 사이즈가 조금씩 줄어들거든요, 있을 때 열심히 타야 합니다.


이렇게 서핑에 대한 이야길 하다 보면 사는 것과 참 많이 닮았습니다. 세상에 똑같은 파도란 없기 때문에 그 유일한 파도를 타기 위해 최선을 다하거든요. 하지만 놓쳤다고 과하게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파도란 또 오는 법이거든요. 서핑을 통해 우리는 기다림과 기회에 대한 준비, 최선 그리고 내려놓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어느새 꽃이 피고 져버리는 봄은 금세 지나가 버립니다. 귀한 파도처럼 귀한 계절입니다.


스웰 : 파도가 무너지기 전 고조되어 이동하는 상태, 파도의 너울



17년 03월 26일

동상에 걸렸다. 3월. 부산. 임을 감안하여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입수함에 얻은 생애 첫 경험이다.

21세기 지식인답게 초록 지식 창에 찾아보니 정확힌 동상이 아닌 동창이란다. 동상은 피부가 썩지만 동창은 심해져도 물집과 궤양 정도다. 상식 1이 추가되었다. 이딴 식으로 상식적 어른이 되는 건가.


17년 03월 20일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지만, 한밤중 달리는 차 소리는 파도 소리와 분명 닮았다.


17년 03월 06일

짧은 대화의 끝. 봄 햇살에 속아 감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라는 인사를 들었다.



솔직히 말해 한국은 서핑을 하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 아닌 건 사실입니다. 1년 내내 따뜻한 기온과 멋진 파도를 갖고 있는 해외를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부럽죠. 하지만 내게 주어진 것에서 좋은 점을 찾아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입장에선, 한국 서핑 씬에서만 경험 가능한 바다의 계절과 그곳에서 보이는 풍경과 느낄 수 있는 이 감정들을 소중히 여겼을 때 우리만의 독특한 서핑 문화를 이루고 즐겁고 행복하게 서핑을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서핑을 더욱 멋있게 만들어주는 것 아닐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서문. 나는 파도를 타기로 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