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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eday Jan 14. 2020

CH.02 바다의 인상

바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도시에서 지내왔던 것과 같은 시간이나 날씨도 이곳에선 다르게 느껴진단 것입니다. 시간의 속도와 형태 온도 같은 것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다가오죠. 어쩌면 많은 계절과 많은 시간을 바다에 온전히 집중하며 보냈기에 이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던 걸지도 모릅니다. 서핑을 하기 전엔 보지 못했던 이토록 많은 하늘의 색이라니.. 결국 더 오랫동안 서핑을 할수록 우리는 깊게 바다에 빠져듭니다.


인상파 화가 모네가 왜 하나의 장소를 그렇게도 여러 번 그렸는지 서핑을 하며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아침, 낮, 해 질 녘, 밤, 비 오는 날, 눈 오는 날, 햇빛 쨍쨍한 날, 바람 부는 날 그리고 안개 낀 날들이 같은 장소를 각각 아름답게 만듭니다. 아마도 그림으로 옮기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을 거예요.


바다의 인상, 그 아름다운 단편들을 모아봤습니다.

남열해돋이 해수욕장

# 이른 새벽, 해가 뜨기 30분 전, 우리가 바다에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간입니다. 아무도 없는 바다에 처음으로 입수하는 기분은 정말 이상합니다. 이렇게 넓은 바다를 차지하는 건 쉽게 찾아오는 기회도 아닐뿐더러 다른 서퍼들이 파도를 확인하기 위해 나를 보고 있을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분은 잠시일 뿐, 어느새 파도에 집중하다 보면 해가 떠오릅니다. 파도를 보느라 일출을 놓쳤습니다. 해가 뜨는 동해에서의 아침 서핑은 언제나 눈이 부십니다. 온몸으로 해를 맞이합니다.

남열해돋이 해수욕장

# 만약 제주에서 너무 이른 새벽에 눈을 뜬다면 중문 해변을 가보길 추천합니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그 길 초입에 서면 내리막 끝에 바다가 펼쳐지고 소실점 끝은 깎아지는 절벽입니다. 그리고 그 위, 커다란 달이 둥둥 떠있는 채로 주변이 밝아옵니다. 분홍 빛과 보라 빛이 묘하게 섞인 하늘에 동그란 달이 떠있던 어느 보름날의 아침을 나는 여전히 기억합니다.

# 아침 8시를 조금 넘긴 시간, 라인업*에 앉아 서쪽에 걸려있는 달을 보았습니다. 아침인데 아직도 하늘에 있구나.. 그러고 보니 해는 일출도 일몰도 모두 또렷한데, 달은 뜰 때도 질 때도 햇빛에 가려 그 모습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늘 달은 하늘에 문득 떠있습니다. 연말 연초가 오면 해는 마중과 맞이를 받는데, 달은 그런 인사를 받아본 적 없을 거란 생각에 다다른 난 2.4미터 파도가 뒤를 덮쳐오는 와중에 어쩌면 외로울지도 모르는 달의 기분을 생각했습니다. 

죽도해변

# 모두가 활발한 한낮의 바다는 라인업도 조금 소란스럽습니다. 좁은 서핑 씬 덕분에 바다 라인업엔 보통 익숙한 얼굴이 많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면 파도를 기다리는 사이 안부를 묻거나 방금 탄 서로의 파도를 칭찬해주죠. 그러다 파도가 들어오면 대화를 순식간에 단절하고 패들*을 시작합니다. “아 그래서 내가”까지만 이야기하곤 대화가 끝나버립니다. 파도를 타고 돌아오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뒷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정말 크고 좋은 파도가 들어오면 사람들은 인디언처럼 소리를 지릅니다 “호우!!!” 파도가 깨지는 위험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소릴 듣고 패들 아웃*을 하고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파도를 잡습니다.

# 해질 무렵, 필터인 양 물든 바다 위에서 모두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현실감 없는 이곳은 고요합니다.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평화가 몰려옵니다.

죽도해변

# 밤이 되면 모두가 둘러앉아 손에 맥주 한 캔을 들고 오늘 파도는 어땠는지, 어떻게 해야 서핑을 더 잘할 수 있는지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눈을 반짝이며 단 하나의 열망을 공유하는 그 시간, 가끔 인디언의 모닥불이 떠오른다고 하면 과할 수 있겠으나 정신은 유사하지 않을까요.

죽도해변

# 라인업*에 앉아 있는데 비가 후드득 내립니다. 바다 위에서 맞는 비는 땅의 것과 다릅니다. 말 그대로 흠뻑 젖어 마치 바다도 공기도 하늘도 나도 하나가 된 것 같죠. 경계 없는 물의 공간 그 어디에 떠 있는데, 저 멀리 해무가 끼고 그 사이로 삐죽 절벽 끄트머리가 보입니다. 


# 비가 오는 어느 날, 어김없이 입수를 준비하는데 지나가던 분이 물어봅니다. “비가 오는데 들어가요?”. 어떤 날엔 이런 이야기도 듣습니다. “비가 오니 서핑하기 더 좋겠네요”. 음… 비는 그러니까..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만..

죽도해변

# 눈이 내립니다. 아침 바다엔 눈이 소복하고 서퍼들의 발자국이 바다를 향해있습니다. 발이 푹푹 빠지는데, 어디까지가 눈인지 모래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라인업에 앉아 해변을 바라보면 하얀 세상이 내가 있는 이 바다와 전혀 다른 곳 같습니다. 눈이 눈앞을 가립니다. 

베트남 다낭 해변

# 해무에 휩싸인 중문에서 서핑하는 그 기분은 마치 구름 속에서 바람을 타는 것 같습니다. 분명 현실 세계는 아니라는 것이 나만의 정설입니다.

발리 꾸따 해변

# 어느 날, 하루 종일 서핑을 하고 근처에 텐트를 쳤습니다. 밤이 되자 고기를 구워 먹고, 서핑 이야기를 나누고, 누군가의 디제잉에 맞춰 춤을 추고, 술을 마시다 잠이 들었죠. 5시쯤 되었을까요, 해도 뜨지 않았는데 “꼬끼오!!!!” 하고 닭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올 참이라 겨우 눈을 뜨고 나갔더니 일행 중 한 명이 스케이트를 타고 공터를 돌며 닭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파도가 오니 일어나라는 알람입니다. 후... 이렇게 서핑으로 인해 사람이 자연과 동화될 수도 있구나. 인간임을 포기하고(?) 야생의 습성대로 살아가는 것, 얼마나 건강한 삶의 방식인가요. 이 건강한 미친놈(?)은 그날 우리에게 꽤 많은 욕을 들으며 바다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이런 독특한 사람들은 서핑 씬에 넘쳐납니다. 이런 사람이 서핑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서핑을 좋아하면 이렇게 되는 것일까요. 이따금 혼란스럽습니다.

죽도해변

# 어느 해의 마지막 만월이 뜬 밤이었습니다. 수평선 끝부터 죽도 해변까지 노오란 달빛이 길을 이뤘습니다. 저 수면 위를 밟고 걸어가면 지구의 끝에 도착할 것 같았죠. 달의 표면이 뚜렷했지만, 사진엔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 날 우리는 지구의 바다에 서서 달의 바다에 대해 이야길 나눴습니다. 조상들이 토끼를 떠올렸던 어두운 부분들은 운석의 충돌로 인해 생겨난 크레이터(구멍)로서, 고요의 바다, 비의 바다, 추위의 바다, 풍요의 바다 등으로 불린다고 합니다. 즉, 수많은 바다가 양양 겨울 바다 위에 떠있는 것입니다.

제주 용머리해안

바다가 아니더라도 하나의 장소에서 다양한 시간과 계절을 집중하여 보내는 것은 그 장소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방법입니다. 자연을 찾아가지 못하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카페나 회사의 구석진 자리의 창가가 될 수도 있겠죠. 공간에 대한 풍성한 기억이 많아질수록 우리의 삶도 조금은 더 풍성해진다 믿습니다.


라인업 : 깨지지 않은 상태의 파도를 탈 수 있는 바다 한가운데

패들 : 파도를 타기 위해 엎드려서 양손으로 물을 저어나가는 기술

패들 아웃 : 큰 파도에 말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먼바다로 패들 하여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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