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로 Feb 04. 2021

행복해도 괜찮아



우리 집엔 아픈 사람이 많았다. 고모는 대장암 말기의 시한부였다. 가정 과목 교사였지만, 몸이 아프다는 걸 알게 된 이후 교직에서 물러나 줄곧 집에만 있었다. 외출하는 건 병원에 갈 때뿐. 고모는 보통 집에 정물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모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나는 건 많지 않다. 그가 구워 주던 쿠키나 빵의 고소한 버터 냄새, 그리고 온몸이 결리고 아파서 신음하는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전부다.


고모는 매일 밤 나에게 안마를 부탁하곤 했다.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고모의 아픔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했고, 어느 날은 안마하기가 싫어서 입을 삐죽 대며 싫은 티를 냈다. 그런 나를 보고 고모는 몹시 화를 냈다. 며칠 동안이나 나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안마를 그만둘 수 있는 건 기뻤지만, 고모가 나에게 말도 걸지 않고 쌀쌀맞게 구는 걸 견딜 수는 없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사과를 하고 다시 고모의 몸을 주물렀다. 내가 고모에게 잘하는 모습을 보이면 집안 어른들은 기뻐했다. 기특하다고, 역시 네가 최고라고 얘기했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나의 하기 싫은 마음 같은 건 그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았으니까.


고모는 내가 중학교 2학년일 때 돌아가셨다. 아주 따사로운 봄이었다. 어느 순간 빼빼 말라서 도저히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 형상이 되었다가, 거동을 할 수 없어 요양원에 머물다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고모가 병상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았을 땐 몹시 슬펐지만, 막상 부고를 전해 들었을 때는 담담했다. 모두가 오랫동안 마음의 준비를 해왔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고모는 너무 오래 아팠다.


고모의 빈자리를 잊을 만큼 시간은 무색하게 흘렀다. 나는 어느덧 대학생이 되었다. 평소처럼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아빠가 대장암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역시 봄이었다. 여느 때와 같던 일상 속 장면에 비일상이 비집고 들어왔다. 위태롭게 지켜오던 일상이 부서지던 순간의 감각을 지금도 기억한다. 나락에 빠져 그 구덩이에서 영영 나오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빠는 항암치료를 하는 동안 급격히 건강을 잃었다. 주름이 늘어나고, 온몸이 왜소 해지고, 먹은 것을 자주 게워냈다. 몸의 고통은 인간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암만 성숙한 인간이어도 몸이 아프면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아빠도 그랬다.


하루는 아빠에게 친구를 만나러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내가 외출을 해도 되겠냐고 묻자, 아빠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었다. '아픈 아빠를 놔두고, 지만 좋자고 놀러 다니는 이기적인 기지배'라는 이유였다. 억울했다. 이번엔 고모한테 했던 것처럼 사과하지 않았다. 아빠는 절대 먼저 말을 걸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날부로 아빠와 약 3년간 서로를 못 본 체하며 절연하다시피 지냈다.


아빠가 완치되었을 무렵에는, 엄마가 유방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때도 우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불행 앞에서 철저하게 혼자였고, 지독하게 무기력했다. 엄마는 "나는 독하니까 괜찮다."며, 본인은 신경 쓰지 말고, 너는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복하게 살라고 했다. 본인은 그렇게 살지 못했으니, 너라도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면서 살라고.


고마운 말이었지만 이미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그때까지 내 인생에서 딱히 좋은 소식 같은 건 들려온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마음껏 불평하기엔, 아픈 당사자들에 비견하면 내 불행이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늘 가족들에게 행복을 빚진 것 같았다. 더 나은 미래보다는 지금의 무탈함이 깨지지 않기만을 조마조마하게 바라면서 지냈다. '그저 지금만 같길.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라는 게 내 유일한 소망이었다.


그런 나날들의 끝에 찾아온 건, 조금씩 더 나빠지는 일상이었다. 경제적인 문제와 성격적인 대립으로 집안은 늘 싸움판이었다. 빈말로도 화목하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학교에 가서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자주 울었다. 더는 견디기 어려웠고, 이대로라면 불행해질 일밖에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불행을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꼴이었다.


지켜보던 애인이 집을 나와 자취를 할 것을 강력히 권했다. 옆에서 응원해주는 사람 덕에 결심이 섰다.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원룸을 월세로 구했다. 하필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갔던 건, 진심으로 혼자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번잡한 관계와 고민과 멀어지고 싶어 학교도 휴학했다. 생활비는 자취방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주 5일씩 일하며 충당했다.


그 당시엔 자취를 시작하는 게 내가 처한 상황을 외면하고 도망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엄마의 한 친구는 집을 떠나 자취를 하는 내게, "아픈 엄마를 버리고 도망간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내 마음 깊숙한 생채기를 냈다. 차마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고, 스스로가 죄인처럼 느껴져서 한동안은 '나는 평생 행복하지 못할 것이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도 결국 나를 버려서 혼자가 될 것이다.'라고 믿고 지내기도 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당장 나도 살아야 했으니까.


자취는 그렇게 시작됐다. 그저 살기 위해서였다. 본가에서는 도저히 행복해질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행복해져 보려는 발버둥이었다. 나도 좀 행복해지고 싶어서, 행복해도 죄책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집을 나왔다. 내 삶은 서서히 변화됐다. 환경을 바꾼 것만으로도,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만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타인의 요구와 욕망에 부응하기 위해 억눌려 있던 자아가 서서히 움트기 시작했다. 내가 욕망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 기울일 수 있는 시간이었고,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나의 발버둥은 헛된 몸부림이 아니라,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도약이었다.


그때 집을 나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모르긴 몰라도 행복해지는데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게 분명하다. 그날 집을 나오기로 한 결정은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를 있게 만들었고, 이 글을 쓰게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장담할 수 있다. 세상에는 몸이든 마음이든 멀어지는 게 차라리 나은 관계도 있다. 그게 설령 가족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리고 더 확실한 건, 우리 모두에겐 나만의 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안녕하세요, 세로입니다.

브런치에 오랜만에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함께 들고 왔습니다.


그간 브런치에 올린 글 중 '방'을 주제로 한 글을 엮어서, <나만의 방이 필요해>라는 이름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브런치북으로 발행한 <내 인생에도 답안지가 있다면>의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생각하셔도 좋을 듯 합니다.


오늘 올린 글은 해당 도서의 프롤로그격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행복할 때마다 죄책감과 불안감을 느끼던 한 사람이 나만의 방에서 점차 스스로를 긍정해나가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언젠가 한 번쯤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었던 인생의 장면들을 책으로 엮으니 감회가 남다르네요.


2월 중으로 구체적인 소식 가지고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