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행복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언제, 어디서에서 행복해질지 공상하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앞에 있는 것을 무시하고, 행복은 인정사정없이 우리를 지나친다.’ - 우먼카인드 2호
해외여행 징크스가 있다. 그간 다녀온 해외여행을 돌이켜 보면, 여행지로 향하는 첫날은 전부 별로였다. 여행을 준비할 땐 설렘만이 자리하지만, 디데이가 되면 걱정과 불안이 몸집을 불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도 씻고 지하철을 환승할 수 있는 출근길과 달리, 공항은 여전히 긴장되고 낯선 공간이다. 혹시나 빠뜨리고 온 물건이 있지 않을까, 여권은 잘 챙겼나 주머니와 가방을 수없이 더듬어본다. 여행지에 가서도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돌발 상황을 걱정하며 바짝 긴장한다. 징크스는 내 걱정에 부응하기라도 하는 건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얼굴로 나타난다.
보라카이에 갔을 땐, 새벽같이 일찍 출발했지만 항공기 지연으로 밤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비행기 타고, 배 타고, 툭툭이 타고... 탈 것에서만 하루를 온전히 보내고 저녁엔 지쳐서 일찍 잠들었다. 나트랑에 갔을 땐 첫날 엄마와 살짝 다퉜다. 리조트 숙소 문이 고장 났는데(알고 보니 고장이 아니었지만) 리셉션에 도움을 청하는 과정에서 엄마는 남일처럼 한 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영어를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엄마는 "난 못해. 네가 말해."라고 했다. 즐기기보다는 고군분투하는 시간을 보내다가 허탈해졌다.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까지 온 거지...'
가장 최근 다녀온 해외여행지는 라오스였다. LCC 항공만 이용하다가 처음으로 FSC 항공을 이용했다. FSC항공은 Full Service Carrier의 약자로, 수화물 서비스와 기내식을 제공하는 항공기다. 탑승 전부터 기내식이 뭐가 나올지 기대됐다. 가장 기대하는 건 다름 아닌 기내식과 함께 나오는 맥주였다. 항공기가 이륙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승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음료는 뭘로 줄까?" 고민조차 하지 않고 외쳤다. "비어 라오(라오스 맥주)!"
비행기에서 마시는 맥주 맛은 끝내줬다. 기실 맛이야 어디서 먹든 비슷하겠지만, 음식은 누구와 먹는지, 어디서 먹는지가 식경험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가. 비행기 안에서, 여행을 떠나며, 3박 4일 간 회사에 가지 않는 자유를 앞두고, 맥주를 마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리 없었다. 그렇게 맥주를 홀짝이며 챙겨 온 이북리더기로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커피까지 한 잔 챙겨마셨다. 입국 수속부터 이동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여행 징크스도 이번만큼은 빗겨 나간 것 같았다. 예감이 좋았다.
픽업 서비스를 신청한 밴을 타고 왓따이 공항에서 방비엥으로 이동했다. 듣던 대로 길이 험했고, 운전자의 운전 실력은 배로 험악했다. 3시간 넘게 차를 타는 게 고됐지만, 이 정도는 예상 범위 내였다. 무사히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방비엥 시내로 나섰다. 순탄한 여행에 대한 만족감으로 기분은 최고조였다.
저녁은 '꽃보다 청춘 라오스 편'에 나온 '피핑쏨'이란 식당으로 골랐다. 들어가자마자 비어라오 맥주 640ml을 각 1병씩 시켰다. 맥주잔을 짠 부딪히고 목구멍 뒤로 콸콸 쏟아부었다. 비어라오의 힘으로 여행의 피로는 날아가고 설렘이 피어났다. 주문한 삼겹살 샤브샤브도 훌륭했다. 삼겹샤브샤브는 삼겹살과 야채를 육수에 데쳐먹는 요리로, 육수에 계란을 풀어 계란국 같은 맛이 났다. 삼겹살에 야채를 싸서 마늘을 섞은 매콤한 소스에 콕콕 찍어먹었다. 한국인이 많은 이유가 있었다. 완전 한국인 입맛에 딱이었으니까.
우리의 불운은 오직 자리 선정이었다. 맛있게 식사를 하느라 재앙의 전조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느덧 재앙의 그림자가 우리 바로 옆에서 넘실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딱 봐도 말 안 듣고 까불게 생긴, 우리나라 초등학생 정도 나잇대 남자아이가 테이블 근처로 다가왔다. 그리고 일행의 코 앞에서 발차기, 주먹질을 시전 했다. 인상을 썼더니 히죽 웃으며 허공에 사방팔방 주먹질을 하며 가게를 돌아다녔다. 그 이후에도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테이블에 와서 발차기를 하거나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의 부모에게 당신 아이를 주의시키라고 말했으나 성의 없이 아이를 제지하는 시늉을 할 뿐이었다.
남자애는 다른 손님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시늉을 하며 다니다가 또 우리 테이블에 왔다. 하필 그들 테이블 옆이 바로 우리 테이블이었다. 가깝고 만만하니 그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었다. 그는 우리의 관심을(비록 인상 쓰기일지라도) 몹시 즐기는 눈치였기에, 애써 그를 무시했다. 그랬더니 옆에서 팔 벌려 뛰기를 하며 계속 알짱거렸다. 안 되는 영어로 그쪽 부모에게 "당신 아들이 우리 식사를 방해하고 있어요. 그를 데려가서 돌보세요!"라고 말했는데 힐끗 보더니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가게 직원에게도 제지를 부탁해보았으나 미온적으로 대처하여, 식사를 멈추고 가게를 나왔다. 화가 나서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전조가 좋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마사지샵이었다. 시원하게 마사지를 받으며 피로와 기분을 풀 생각이었다. 그곳은 왜인지 한국인 중년 남성들의 핫플레이스였다. 여럿이 몰려와서, ‘쟤(마사지샵 직원을 지칭하는 말)는 내가 교육을 잘 시켜놔서, 이젠 마사지 끝나면 곧장 커피 대령하잖아.’라면서 직원을 기분 나쁘게 '얘'나 '쟤'로 호칭하고 거들먹거렸다. 게다가 마사지를 받을 때마다 으허어, 허으윽 하는 신음을 커다랗게 내서 듣기 싫었다. 방음이 안 되는 관계로, 여기저기서 신음 소리가 서라운드로 들렸다.(윤락업소가 아니었다.) 한 시간 내내 그들의 허세와 신음소리를 듣다가 나와야 했다.
'내가 상상한 건 이런 게 아닌데...' 기분이 한도 끝도 없이 저조해졌다. 내가 시간과 돈을 들여 설계한 여행은 이런 게 아니었다. 상상 속의 여행엔 까불거리는 꼬마가 없었고, 신음하는 누군가도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맥주를 먹으며 행복해하는 우리, 마사지를 받고 여행의 피로를 떨치는 우리가 있을 뿐이었다. 일행에게 말했다. "얼른 숙소나 가자." 숙소 침대에 누워서 휴식과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아무도 그는 내 말속에서 패잔병의 기색을 읽었나 보다. "숙소에 가자"도 아니고 "숙소나 가자"니.
"이대로 들어가면 아쉽지 않겠어?"
"시간도 너무 늦었고.. 얼른 쉬고 내일을 도모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기분이 안 좋은 채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한국 시간으로 이미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그 말도 일리가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상태로 숙소에 들어가면 이변이 없는 한 아쉽고 자책하는 마음으로 잠들 게 뻔했다. 내일을 도모하는 것도 좋지만 오늘을 이렇게 흘려보내는 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한 여행 첫날을 소생시키기 위한 방법이 뭐가 있을까? 일부러 천천히 걸으며 주변을 살폈다. 그때, 골목에 한 술집이 보였다. 좌식으로 되어있었고, 분위기가 조용한 펍이었다. '저기서 술 한 잔 할까, 아니면 숙소로 들어갈까.' 잠자코 시선을 두고 있자니, 어물쩡 고민하는 나를 알아채고 일행이 결단력 있게 말했다. "저기 가자." 그가 나를 끌고 펍으로 들어갔다.
펍 천장에는 아기자기한 알전구와 열기구 모형, 그리고 각 나라 국기가 달려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빨간 천이 덮여있고, 화려한 패턴의 테이블보가 한 겹 더 덮여있었다. 이국적인 정취가 물씬 느껴졌다. 밖으로 탁 트여있는 테라스 구조가 마음에 들었다. 길가가 훤히 보이는 좌식 자리에 앉아 비어 타워와 감자튀김을 시켰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간혹 오토바이, 술에 취한 여행객이 지나갔다. 덩치가 크지만 배는 홀쭉한 개들이 어슬렁 거리다가 다가와서 눈인사를 하기도 했다.
코에 들어가는지 입에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던 삼겹살 샤브샤브보다는 케첩과 마요네즈에 찍어먹는 오동통한 감자튀김이 훨씬 맛있었다.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이 바글바글해서 말소리를 억지로 키워야 했던 식당보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곳이 더 좋았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맥주를 마시며 거리를 구경하고 오늘 하루에 대해 이야기했다. 불쾌한 일이 있었다는 이유로 숙소에 들어갔다면 아쉬울 뻔했다. 이름 모를 펍에서 보낸 시간은 그날 하루 중 최고의 순간이었다.
'해외여행'은 아직도 거창한 일처럼 느껴져서, 어떻게든 행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오히려 행복을 압도할 때가 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긴 공휴일에 무얼 해야 잘 즐겼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다가 휴일을 다 보내고 마는 것처럼. 높은 기대감과, 먼 거리를 이동하는데서 오는 피로감, 여행을 어떻게든 잘 마무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오히려 기분을 망치곤 한다.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여행지 정보를 끊임없이 모으고, 여행을 하며 행복할 내 모습을 상상하고 기대했다. 그러다 마음 한편에서 '기필코 행복해야 돼. 누구보다 잘 즐겨야 돼.'라는 기합이 잔뜩 들어가고 말았다.
여행 중 모든 일이 다 좋을 수는 없다.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다. 하물며 타지는 어련하겠는가. 라오스는 처음 와보는 곳이고, 나를 불쾌하게 할 만한 모든 요소를 미리 예견하고 피할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복할 수 있는 찬스가 왔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뿐이다. 행복해진다는 건 골목에서 펍을 마주했을 때, 그 문턱을 넘어가 맥주를 마시는 일과 비슷할지 모른다. 비록 내가 기대하고 상상했던 모습의 행복은 아니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모습의 행복이기에 더 소중했다.
첫날의 깨달음 덕분에 나머지 일정은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뺄 수 있었다. 모르는 골목을 설렁설렁 걸어 다니고, 오토바이를 대여해서 현지인들과 같은 방향으로 달려보기도 하고, 일행이 혼자 블루라군에 갔을 때 숙소에서 반신욕을 하며 쉬기도 했다. 훨씬 마음이 편하고 즐거웠다. 해외여행 첫날의 징크스 같은 건 사실 없었다. 여행조차 어떻게든 잘 해내고 싶은, 기합이 잔뜩 들어 미숙한 초보 여행자가 있을 뿐이었다. 지금의 깨달음은 다시 희석되어, 또 해외여행을 떠나면 '역시 여행 첫날은 영 별로란 말이지!'하고 투덜거릴지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여행은 그제야 시작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