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독이다.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달래거나, 재울 때 몸을 가만히 두드리는 일을 말한다. '다독이다'라는 말은 '다'와 '독'을 발음할 때마다 혓바닥이 입천장을 가볍게 두드린다. 그것마저 자못 다정해 보여 입속으로 괜히 다독, 다독 발음해본다.
나는 자기 성찰과 자기 객관화를 잘하는 편이다. 심리적인 문제가 생기면, '일, 관계, 호르몬'으로 파트를 나누어 문제가 어디서 기인했는지 생각해본다. 고민이 생기면 해답을 찾을 때까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거나, 관련된 책을 읽기도 한다. 정 혼자서 해결이 어렵겠다 싶으면 상담을 받는다. 상담학과 출신이긴 하지만 이를 감안하여도 꽤나 많은 상담과 심리검사를 받아왔다.
그러나 위로는 성찰이나 분석과는 다른 영역이다. 나는 스스로를 다독이는 일에는 영 서툴다. 최근, 상담을 받으며 그 사실을 또 한 번 깨달았다. 선생님과 나는 예기불안(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선생님 - 불안이 올라올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나 - 미리 걱정해도 달라지는 게 없으니 그만 생각하려 했어요.
선생님 - 맞아요. 미리 걱정했지만 달라진 것도 없고, 크게 문제가 일어나지도 않았으니 괜찮다고 해주는 것도 좋겠네요.
그 말을 듣고 잠시간 할 말을 잊었다. 내가 말한 건 체념의 정서와 가까웠다. 어차피 터질 일은 다 터지게 되어있으니 미리 걱정해봤자 별 소용이 없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뉘앙스를 조금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괜찮아. 괜찮을 거야."하고 다독여주는 것 같았다.
선생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주세요. '네가 불안한 것은 너의 과거 경험 때문이야. 현실에서 걱정하고 불안해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잖니. 괜찮아, 잘 될 거야.'" 그 말이 너무나 다정했다. 그 순간, 나는 내게 이런 다정한 말을 해준 적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았다. 오히려 '지금 불안할 게 뭐 있어. 아직 아무 일도 안 일어났잖아! 그만 생각해.'하고 다그치는 것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하루를 시작하는 나에게 힘내라고 말해주는 일, 무사히 하루를 끝낸 나에게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일에 인색했다. 어쩐지 좀 낯간지러웠다. 참고 견디는 데 익숙했지만, 잘 견딘 나를 칭찬해주는 건 익숙하지 않았다.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이진 않았지만, 차가운 관찰자의 시선으로 나를 지켜보았다.
그래서일까. 너는 잘 해왔다는 말, 최선을 다했을 거란 말, 너는 좋은 사람이고, 이렇게나 많은 자원을 가진 사람이란 말. 그런 다정한 말을 들으면 속절없이 눈물이 났다. 다그치는 말은 때론 나를 상처 입혔지만, 다독이는 말은 지금껏 나를 지탱해주었다. 아니, 말이 아니어도 그랬다.
나를 있는 힘껏 다독여주는 사람의 존재도 나의 한 축을 지켜주었다. 전공 수업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아무 말 없이 10초 이상 껴안고 있으면, 행복 호르몬 세로토닌이 분비된다는 내용을 배웠다. 그걸 알게 된 후론, 너무 우울한 날엔 애인과 10초 이상 꼭 껴안고 있었다.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줘." 한 다음에 맞닿은 가슴팍에서 서로의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가슴께가 따뜻한 온도로 데워지면 진정이 됐다. 금세 행복해졌고, 다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내 필명인 '세로'도 그렇게 지은 이름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껴안으면 분비되는 세로토닌처럼, 내 일상에도 그런 따뜻한 순간이 자주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지었다.
지금의 나는 내 필명처럼 살고 있는 걸까? 나 자신을 다독여주며, 사랑하는 사람을 다독여주며, 결국은 행복한 일상을 일궈내고 있을까? 괜히 또 다독, 다독 발음하며 혓바닥으로 입천장을 두드려본다. 오늘도 수고했다고도 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