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텔에서 시작한 자취
본가에는 내 방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과 방을 같이 사용하였고, 한 공간에 애착을 가지고 머무르거나 꾸며본 경험이 전무했다. 어릴 때는 그게 불편한 줄도 몰랐지만 머리가 커가면서 조용히 책을 읽는, 혼자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생쇼를 하거나 엉엉 울어도 누군가 간섭하지 않을 나만의 공간을 꿈꾸기 시작했다.
내 방 마련의 꿈을 처음 이룬 곳은 고시텔이었다. 일대의 땅값이 비싼 편이어서 원룸의 보증금이 꽤 높았기에, 고시텔살이가 좋은 대안이 되어 주었다. 고시텔 방은 1평 남짓한 공간으로, 안에 샤워부스가 딸린 곳을 골랐다. 샤워부스를 제외한 공간은 침대와 책상 그리고 작은 옷장만으로도 꽉 들어찼다. 나름 방을 꾸며보겠다고 모든 게 다 있다는 매장에 가서 이것저것을 사 왔다. 네트망을 사서 책상 앞에 걸고, 네트망을 케이블 타이로 엮어서 선반을 만들었다.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겠다. 엄청나게 조잡했으니까.
이불은 꽃분홍 벽지 색깔에 맞춰서 강렬한 분홍색으로 준비했다. 동네에 있는 이불 가게에 가서 눈에 보이는 걸 대강 고른 결과물이었다. 공간을 꾸며본 적이 없으니 인테리어 취향이랄 게 없었다. 파란색보다는 노란색이 좋고, 노란색보다는 분홍색이 좋다는 게 취향이라면 취향이었다. 그러나 촌스러운 취향과는 별개로 꾸밀 수 있는 내 방이 생겼다는 건 신나는 경험이었다. 방안에 사진을 걸고, 일기장을 아무 데나 펼쳐놓고, 말린 꽃을 걸어놓으며 생애 첫 영역표시를 했다.
안타까운 건 그 이상의 진척이 없었다는 것이다. 고시텔에 사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그 공간을 싫어하는 마음이 커졌다. 고시텔에 정을 붙이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공용 공간을 쓰는 게 싫었다. 입주자들의 얼굴도 모른 채로 개인적인 공간을 공유한다는 게 어딘가 꺼림칙했다. 고시텔 공용화장실은 좀 으스스했다. 화장실 앞 커다란 전신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에 깜짝 놀라기를 여러 번이었다. 영화 <곡성>을 본 날은 화장실 가는 게 무서워서 억지로 볼일을 참았다.
공용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남들이랑 식기나 세척 도구를 같이 써야 하는 게 싫었다. 그렇다고 전용 식기와 세척 도구를 구비할 만큼 요리에 열성적이지도 않았다. 게다가 주방에서 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입주자가 있었는데, 쿰쿰한 냄새가 나는 무언가를 끓이곤 했다. 좁은 주방에서 모르는 사람과 부대끼는 것도 달가운 일은 아니어서 최대한 주방에 가지 않았고, 때문에 끼니는 항상 대충 때웠다. 주방 전자레인지에 편의점 도시락을 돌리고 누군가에게 쫓기듯 후다닥 방으로 숨어 들어가곤 했다.
두 번째 이유는, 고시텔 방 안에서는 할 수 있는 게 몇 없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블루투스 스피커로 노래를 틀어놓고 따라 부르기라도 했다가는 모든 입주자들이 튀어나와 항의를 했을게 분명하다. 평수가 작으니 할 수 있는 일의 제약이 큰 데다가, 좁은 곳에 갇혀있다는 느낌이 들어 갑갑했다. 그리고 심적인 문제와 월세에 대한 부담이 겹쳤다. 살림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채 점점 고시텔에 있는 시간이 싫어졌다.
결국 방을 빼기로 결정했다. 고시텔은 안전하고 개인적인 공간에 대한 나의 열망을 채우기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었다. 생활 반경을 1평 남짓한 공간으로 제한당하고, 남들과 부엌과 화장실을 같이 쓰면서 큰 소리를 내기도 어렵다는 건 확실히 오래 할 만한 경험은 아니다. 특히, 나같이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고,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며 에너지를 충전하는 사람에게는 말이다.
고시텔 생활을 해본 주변인들에게 물어보아도, 대부분 고시텔을 '어둡고 좁은 곳'으로 기억하곤 한다. '바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고시텔에서는 잠만 잘 생각이거나, 3개월 정도 단기간만 거주할 예정이거나, 고시텔이 아니면 도저히 자취를 할 여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고시텔살이를 추천하지 않는다. 만약 고시텔에 살기로 마음을 먹은 사람이라면, 적어도 햇볕이 잘 드는 쪽에 창이 나있는 방을 선택하시라. 그리고 주방, 화장실, 세탁시설 등 공용 시설의 위치 및 청결도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입주를 결정하길 바란다.
고시텔에서 원룸으로
두 번째 자취는 좀 더 본격적이었다. 4학년 막 학기만 남겨둔 상황에서 많이 지쳐있었다. 인간관계도,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것도, 본가에서 지내는 것도 다 힘겨웠다. 그때 이모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집 비는데 2주 정도 거기 가 있을래?” 이모가 사는 곳은 고층인 데다가 한쪽에 큰 창이 있고, 근처에 편의시설도 많았다. 싫을 리 없었다.
이모네 집에서 그야말로 베짱이 같은 삶을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 시리얼을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했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노닥이다가 라지 사이즈 아메리카노를 사 와서 노트북으로 글을 쓰기도 했다. 그때 알았다. '이게 바로 강 같은 평화라는 거구나!' 이런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전세 가격을 듣고 빠르게 포기했다.) 자취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그로부터 24일 후,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와 학업에 허덕이는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휴학을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서울로 올라가서 집을 보러 다녔다. 감당이 가능한 월세는 50만 원 선이었고, 그 돈에 맞추려면 적당한 곳은 신림이었다. 처음엔 지상층 원룸을 보러 다녔는데, 50만 원으로는 유흥업소가 있거나 아주 낡은 건물에만 입주가 가능했다. 딱 봐도 어리숙해 보이는 나를 호구 잡았던 건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서울에서 한 달 50만 원의 가치가 크지 않았다는 거다. 어쩔 수 없이 반지하 방을 보기로 했다.
반지하로 내려가니 확실히 더 나은 방을 보여주었다. 그중 지은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 크기도 적당하고 내부가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반지하치고 햇볕이 잘 든다는 말도 한 몫했다. 물론 채광이 좋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채광 좋은 반지하라니, 그게 무슨 화사한 검정색 같은 말인지. 내가 가진 돈으로는 이 이상 좋은 집에 살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덜컥 계약을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처음으로 고시텔이 아닌 집다운 공간에서 혼자 살게 되었으니.
입주한 집은 주방과 침실이 분리된 1.5형 원룸이었고 화이트톤의 깔끔한 디자인이었다. 체리 몰딩이 아니었고, 유치한 분홍 벽지가 아니었다. 뭣보다도 화장실을 혼자 쓰고, 주방도 나 혼자 썼다. 노래를 들어도 괜찮고, 너무 크게 따라 부르지만 않는다면 노래를 불러도 괜찮았다. 월세를 내고 나면 주 5 아르바이트를 하고도 빠듯했지만 마냥 좋았다.
이번에는 다이소 대신 이케아에서 가구를 마련했다. 화이트톤의 가구를 들여놨고, 침대에는 분홍색 대신 회색의 바스락거리는 이불을 두었다. 침대 앞에는 흰색 선반과 커다란 모니터를 두고, 누워서 예능이나 영화를 보곤 했다. 선반에 미니 선인장을 두었고 책상에는 눈꽃 조명을 달았다. 월세라서 커튼은 달지 못하고, 대신 패브릭 포스터를 달아 밖을 가렸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취향과 손길이 들어갔다.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요리를 해 먹으며 벅차게 행복해서 믿기지 않았다. 조용히 책을 읽으면서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를 듣는 순간이 행복하고 소중했다. 벌거벗고 방 안을 활보해도 괜찮고, 혼자만의 EDM 파티를 벌여도 나무라는 사람이 없으며, 와인을 마시며 반신욕을 해도 알코올 중독자라 폄하당하지 않고, 밥은 안 먹고 반찬만 먹거나 밥을 지나치게 많이 먹어도 흉볼 사람이 없었다. 가장 좋은 건 조용한 데다가 모든 곳에 내 손길이 닿아서 내 통제 하에 있다는 점이었다.
내 삶의 전반을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은 처음이었다. 집순이 친구가 자기 방에서 영화를 보면 '그 공간이 나만의 에너지로 가득 찬 기분이 든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나에게 영향을 주는 건 오직 나뿐인 공간에서 공간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온전히 나에게 맞춘 시간을 보내며,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주말 아침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토스트를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힘들거나 우울한 날에는 반신욕을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게 좋다는 것도. 혼자 있는 시간에 집중할수록 내 삶의 초점이 나에게 맞춰졌다. 친구를 자주 만나도 채워지지 않았던 공허함이 사라졌다. 내 공간은 나를 구원했다.
좋은 공간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사람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 알았다. 내가 공간을 변화시키듯, 공간도 나에게 흔적을 남긴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처럼 나에게 좋지 않은 공간과는 빠르게 이별하는 편이 좋다. 태어날 환경은 스스로 선택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내가 머물 공간만큼은 선별할 수 있다.
집은 나라는 생물이 살아가는데 적당한 온도와 습도를 조정한 '온실'처럼 여겨야 한다고 믿는다. 최대한 내 특성에 맞춘, 나만을 위한 공간. 그 공간 덕에 나는 변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를 위한 공간을 꾸미고, 가꿀 생각이다. 그건 내 삶을 방치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내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