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 한 인생의 시작
치즈푸딩을 만든 건 계획된 일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는데, 이년 동안 세 번의 실패를 겪고 네 번 만에 겨우 치즈푸딩을 품었기 때문이다. 품으면 다 된 건 줄 알았지만 그녀의 심장은 때로 불규칙하게 뛰어 내 심장을 덜컥 얼어붙게 했고 몸집이 좀처럼 커지지 않아 내 걱정은 날로 불어났다. 매일 치즈푸딩의 안부가 궁금했다. 품고 있으면서도 그녀가 안전하고 온전하게 잘 있는지 알 수 없어 답답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치즈푸딩의 상태를 확인했다. 유난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내 나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만 39살, 한국 나이로 41살. 남들보다 많이 늦긴 늦은 나이었다.
보통의 임신 기간은 40주. 난 그보다 2주 빠른 38주에 치즈푸딩을 만나기로 되어있었다. 철학관에서 꽤 비싼 돈을 주고 좋은 날과 시간을 받아 누구보다 빠르게 제왕절개 일정을 예약했다. 모태신앙으로 천주교 신자이긴 하지만 치즈푸딩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팔자를 남겨주고 싶었다. 살아보니 마흔 살에도 엄마는 필요한데 늦은 나이에 낳는 아이라 내가 오래 함께 해주지 못할 것이 마음 아팠다. 되도록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지만 혹시 아프기라도 해서 그녀에게 짐이 될까 봐 걱정도 되었다. 때문에 꼭 좋은 팔자를 타고나게 해주고 싶었다. 대단한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니 힘겹지만은 않게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이유로 난 애초에 자연분만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떤 병원은 노산의 산모여도 자연분만을 권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나의 담당의 선생님은 제왕절개를 선뜻 허락하셨다. 치즈푸딩을 만나기로 예정된 날은 2024년 9월 9일이었다.
몹시 무거운 몸으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배가 불러오고 몸은 이상하리만큼 매일 많이 부었다. 특히 종아리와 발이 많이 부었는데 압박스타킹도 신지 못할 정도였다. 한 번은 친구와 차를 타고 가는데 압박스타킹이 숨통까지 조이는 것 같아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압박스타킹을 벗으려는데 혼자 힘으론 벗을 수가 없어 친구가 내 다리를 들고 압박스타킹을 벗겨내 주었다. 그것도 차 안에서... 아무리 친한 친구지만 이런 모습까지 보이게 되어 잠시 어색하고 민망했다. 또 코도 커지면서 코 주변의 혈관이 확장되어 얼굴이 내내 붉었다. 스스로도 못생겨 보이는데 남편이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어떨까 어쩐지 주눅이 들었다. 배가 다른 임산부에 비해 많이 나온 것도 아닌데 숨쉬기가 힘겨웠다. 똑바로 누워도 옆으로 누워도 숨이 찼다. 어느 날은 치즈푸딩이 밤새 까부는 바람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다시는 없을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물리적인 이유로 몸과 마음이 지치기도 했다.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해결될 것 같았다. 빨리 낳고 싶다... 마음속으로 자주 푸념했다. 나는 가끔 어떤 생각이 들 때 그 생각을 멈추고 속으로 퉤 퉤 퉤 세 번 침을 뱉는다. 두려움 때문인데 생각만 한 일이 종종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치즈푸딩을 만나는 일도 결국 그렇게 되어버렸고.
D-1. 다음 날이 디데이가 될지도 모른 채 나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친구들이 베이비샤워를 해준다 해서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먹자고 했고 겉바속촉 베이징덕과 신라호텔 망고빙수를 먹기로 한 날이었다. 임신 기간 동안 베이징덕이 얼마나 먹고 싶었는지 나는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오리고기를 먹으면 아기가 손가락 하나를 더 달고 나온다고 해서(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선뜻 먹을 순 없었다) 꾹꾹 참고 있었으나 초음파로 치즈푸딩의 손가락, 발가락이 다섯 개인 것을 확인한 이상 더 참을 필요가 없었다. 무거운 몸을 씻고 화장대 앞에 앉았는데 갑자기 명치가 아파왔다. 남편과 전날 투닥거린 이유로 신경성 위경련이 온 것 같았다. 그 며칠 전, 산부인과 정기검진이 있었는데 난데없이 혈압이 높게 나온 것이다. 안정을 취하고 두세 번 더 체크했지만 혈압은 계속 높게 나왔고 때문에 피검사를 해야 했다. 담당의 선생님은 혹시 검사 결과가 좋지 않으면 입원을 하거나 응급으로 아이를 낳아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평소 건강체질이라 자부했기에 속으로는 그럴 일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은 어쩐지 조급해졌다. 때문에 치즈푸딩의 방으로 꾸미고 싶었던 서재방을 서둘러 정리하고 싶었는데 그 과정에 남편에게 쏘아붙이며 말한 게 싸움의 화근이었다. 하지만 사십 년 넘게 살며 위경련을 겪는 게 한두 번인가. 위경련이 있어도 밥만 잘 먹고 일만 잘하고 잠만 잘 자던 나였다. 바람 한 점 없는 찜통더위 속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간간히 명치를 부여잡으며 약속 장소로 나갔다. 결과적으로 난 베이징덕도 10만 원이 넘는 신라호텔 망고빙수도 먹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심상치 않은 통증이었다. 밤새 앓았고 내 통증이 치즈푸딩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봐 두려웠다. 아침 9시가 되자 나는 자는 남편을 깨워 같이 동네 산부인과를 찾았다. 초음파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할 참이었다. 대기 중인데 담당의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다.
“정윤 씨, 괜찮아요?”
내가 괜찮지 않은 걸 어떻게 알았지? 속으로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위가 좀 아픈데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야 해요. 지금 당장요!”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에 겁이 나 덜컥 눈물부터 났다. 남편과 난 서둘러 집에 돌아왔고 입원과 혹시 모를 출산을 생각해 집히는 대로 짐을 챙겨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길, 두 번 정도 더 재촉전화를 받은 것 같다. 담당의 선생님을 만나러 진료실로 갈 줄 알았건만 나는 병원 도착과 동시에 남편과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분만실로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했다. 침대에 누운 채로 피와 소변을 뽑았다.
“아기 폐가 34주 차에 완성되는데 정윤 씨는 지금 33주에 들어선 차라... 일단 폐성숙 주사를 맞을게요.”
이대로 출산을 하게 되면 치즈푸딩의 폐는 온전치 못한 채로 세상에 나오는 건가? 모든 게 다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자꾸 불안해져서 울다가 멈췄다를 반복했다. 그러다 갑자기 의료진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느껴졌다. 큰 변수 없이 살아온 내 인생의 흐름대로라면 다행히 많이 심각한 건 아니라 입원을 하고 그대로 몸상태가 호전되어 예정대로 9월 9일에 제왕절개로 출산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난 병원에 도착한 지 40분도 안 되어 전신마취를 하고 정신을 놓은 채 수술실에 눕게 된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