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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초지현 Apr 20. 2023

적금을 깨고 나온 여행

"정말 해지하시나요? 두 달 뒤 만기인데 지금 해지하면 원금정도만 찾으실 수 있으세요"

"네~해지해주세요!"


대학입학 후 아르바이트와 과외로 시작한 돈벌이는 10년 넘게 쉼 없이 반복되었다. 앞만 보고 달리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일을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너무 지쳐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적금 중 하나를 해지해서 그 돈으로 여행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두 달 뒤에 받게 될 이자 때문에 또 주저하게 되면 다시 마음먹기 힘들 것 같아서 눈 찔금 감고 사고(?)를 쳤다.


제일 처음으로 계획한 것은 부모님과의 세부여행이었다.

한 번도 동남아를 가보지 못한 나는 그 당시 신혼여행지로 부상하던 세부에 부모님을 모시고 갔다.

각 팀에 한 명씩 가이드가 붙었는데 우리 가족의 가이드는 현지인들과 자꾸 마찰이 생기는 능글족이었다.

그로 인해 엄마의 기분이 계속 저조한 탓에 하루종일 엄마가 아무것도 안 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아빠랑 둘이서 호핑투어를 하고, 나 혼자서 스쿠버다이빙을 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현지 강사에게 교육을 받은 후 신혼부부들이 줄지어 기념사진 찍는 하트모양의 포토존에서 나 혼자 브이하고 찰칵! 저기서도 혼자 찰칵, 여기서도 혼자 찰칵. 뭔 사진은 그리도 찍는 건지.

강사들과 현지인들이 자꾸 묻는다. 왜 혼자냐고, 신랑 어디 있냐고.

그래서 난 결혼하지 않았고 부모님과 여행을 왔다고 여러 번 얘기해야만 했다. 그 당시에는 신혼여행지에 부모님과 여행 오는 것이 드물었나 보다고 지금 끄덕거려 본다.


스쿠버다이빙으로 만난  세부 바다는 황홀했다. 강사와 둘이서 아래로 내려가기를 반복하다가 햇빛이 더 이상 들지 않아 어두운 심해를 바라봤을 때 경이로우면서 무서웠다.

수면가까이에서 손잡고 기념촬영하는 신혼부부를 위로 보고, 아래로는 검은 심연을 바라보며 그 어느 중간쯤에 있는 나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대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역시 그대를 들여다본다.(니체/선악을 넘어서)






겨울에 간 세부여행 아빠에게는 무척 만족스러웠던 것 같다. 마지막 날에는 돌아가기 싫다고 하실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난 한국에 가야 했다. 몇 주 뒤에 예약해 놓은 싱가포르 가야 했기에.

싱가포르에서 제자 한 명이 어학연수를 하 있었다. 가이드해 줄 테니 어서 오라고 매번 연락이 와서 못 이기는 척 그다음 여행지를 싱가포르로 잡았다. 일주일을 계획하고서 머물 호텔을 알아보는데 왜 그리 비싸던지, 세부에 비할 수 없는 물가에 헉했다.


여러 검색 끝에 한국인이 하는 민박을 찾게 되었고 아침식사로 한식을 해준다고 해서 그 민박에서 지내기로 결정하고 예약했다. 싱가포르에 자리 잡은 한국인 부부가 자신들의 집에 남는 방 2개를 한국에서 오는 여행객을 위해 운영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직접 가서 만나 뵈니 좋으신 분들이라 안정감은 덤으로 얻고 숙박비는 절반정도로 절약할 수 있었다.  

창문으로  내려다 본 수영장(지금봐도 설렘)



선택한 숙소에는 입주자 공용으로 쓰는 수영장이 있어서  아침식사 후 가서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으며 소화시킨 후 수영을 하고 점심때쯤 외출을 하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전 숙소 앞으로 제자가 찾아왔고, 함께 싱가포르 MRT를 타고 곳곳으로 다녔다. 아마 혼자 다녔으면 복잡한 노선에 어디에도 못 갔을 텐데 가이드와 친구역할을 해주는 제자가 있어 든든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올 즈음이라 거리는 트리와 갖가지 조명으로 꾸며져 있었다

민소매 옷을 입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는 건 거운 겨울을 만나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내리는 비를 피해 가까운 가게로 들어가 피자와 아이스비어를 마시기도 하고, 비첸향(싱가포르 육포)을 먹으며 발바닥이 뜨거워지는 거리를 거닐기도 했다.

우기라서 그런지 더운 공기 속에 스콜이 왔다 갔다 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부리는 싱가포르의 날씨였다. 여행자인 나는 그 변덕마저 사랑스러웠다.

저 건너편은 해가 있는데 내가 있는 곳은 세차게 비가 내린다. 그 비속서 마시는 살얼음이 덮인 아이스비어는 행복이었다.




한 번씩 싱가포르 숙소 앞의 카페에서 먹었던 카야토스트와 진한 커피가 그립다.

가이드를 자청한 제자를 기다리며 정오의 햇살이 비치는, 에어컨 나오는 시원한 그 카페에서의  시간이 그립다.


 낯선 곳에서의 여행자는 온전히 그 시간만 즐기면 되었다.

나에게 부여된 책임에서 등 돌리고 있어도 되는 그곳에서 더 달콤한 자유를 느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무 달콤한 것도 오래 먹으면 속이 달이듯이 여행도 너무 오래되면 그 자유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러므로 잠깐동안의 달콤함을 진하게, 밀도 있게 내 인생에 담아둔다. 언제든 콕 찍어 맛볼 수 있게.


오늘처럼 이렇게 콕 찍어 맛보며 힘들었던 하루에 설탕가루 뿌리듯 미각을, 생각을 마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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