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스물을 갓 넘겼을 것 같은 앳된 얼굴. 짧게 올려친 머리 아래 가늘고 긴 목. 호리호리한 몸매와 하얀 피부는 청년이라기보다 소년에 가깝다. 아직 짬밥이 오래되지 않아 언뜻언뜻 어색하게 구경꾼들을 의식한다. 작업 동작도 민첩하다기보다는 수련공의 풋내를 물씬 풍긴다. 허름한 티셔츠와 발목이 드러난 붉은 바지 때문에 그들에게서 얼떨결에 끌려온 겁먹은 소년병이 연상된다.
능숙하고 노련한 숙련공 아저씨들과 한 팀을 이뤄 조수 역할을 한다. 에밀 쿠스트리차 영화에서 본 듯한 육중하고 튼튼한 몸매의 중장년 숙련공들이 힘든 주 작업을 거의 전담한다. 그들은 강도 높은 작업도 익숙하고 여유 있게 해치우며 중간중간 담배도 피우고 옆 동료와 툭툭 치며 껄껄 웃기도 한다. 팀 당 하나씩 작업용 용광로가 있는 두 평 정도 되는 공간에서 유리제품을 만들어 다음 라인으로 넘긴다.
오후 세 시면 하루의 작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그들을 볼 수 있다. 아마 천 년쯤은 반복되었을 노동의 후계자들이다.
얼굴만 보면 액션 영화에서 우크라이나 특수부대 출신 용병으로 나올 것 같은 분 @시퀀스
모젤 글라스 팩토리 쇼룸 / 관광객들은 쇼룸과 공방 패키지 투어를 한다. @시퀀스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에 있는 모젤 글라스 팩토리는 소박하고 단정한 외관, 유리조각이 설치된 아담한 정원을 갖추고 있다. 주택가와 멀지 않아 투어코스 관광객들 뿐 아니라 유모차를 끌고 오는 주민들도 많다. 쇼룸에는 작은 액세서리부터 아랍의 부자들이나 쓸 법한 거대하고 호화로운 물담배 용품들까지 영롱한 아이템들로 가득 차 있다. 흔한 관광코스로 지나칠 수도 있는 이 곳에서 세계적인 글라스 팩토리는 공장을 공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과시한다.
노동도 관광상품의 일부가 된 모젤 공방 @시퀀스
관광객의 시선은 그들이 만드는 유리제품의 제조공정에 맞춰진다. 노동자들은 무대처럼 최적화된 높이의 단 위에서 수백 년 동안 반복해온 노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관객은 그들의 손 끝에서 불꽃처럼 타오르는 움직임뿐 아니라 사용하는 도구와 성형되어가는 유리의 상태, 가마 속 불과 열기까지 생생하게 관람할 수 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쇼룸이 제품을 전시한다면 이 곳에선 유리를 만드는 노동과 시스템을 전시한다.
루틴처럼 일정 시간에 진행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관광객들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관람객의 시선 위쪽으로 땀 흘리고, 서로 의논하고 가끔 마음에 안 드는지 찡그리며 골똘히 궁리하는 일터의 모습이 보인다. 철저하게 수작업과 도제 방식으로 운영된다. 2인 1조로 작업하며 기술을 전수하는 방식도 고대와 같다. 둘 사이에는 대략 20여 년의 나이 차가 보이는데, 그게 최고의 숙련공이 되는 시간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한눈에도 정말 오래 썼을법한 묵직한 철재 기구나 장비들이 한쪽에 잔뜩 놓여있어서 시간을 뛰어넘는 풍경을 완성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유리공장 @시퀀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젤 공방의 도구들 @시퀀스
유리성형기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유리를 연마해서 자른 후 납땜하는 스테인드 기법은 채색을 거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만든다. 스테인드라는 말이 얼룩진, 알록달록한 의미인데 실패하면 얼룩이고 성공하면 알록달록해져서 붙인 이름일까.
중세의 연금술사나 집시들은 버너나 토치를 쓰는 램프워킹 기법으로 유리를 만들었다. 그래서 버너 워킹, 토치 워킹이라고도 불린다. 가스와 산소가 혼합된 토치는 1250도 정도가 되는데 지금도 파이렉스 유리나 인형, 소품을 제작할 때 이 방법을 쓴다. 캐스팅 기법은 내화 석고몰드를 사용한다. 다양한 형태와 색감, 질감을 표현할 수 있고 원형을 형틀에 넣고 유리를 주입해서 8~900도의 가마에서 소성한 후 냉각시킨다.
B.C100년 경 시리아에서 취관이 만들어졌다. 그 덕분에 1000도 이상의 액화 상태의 유리 불기 기술, 블로잉 기법이 가능해졌다. 모젤 공방은 가장 정교하게 발전한 블로잉 기법으로 제작이 이루어진다. 일단 원심력을 이용해서 쇠파이프 끝에 유리를 녹여 묻힌 후 입으로 공기를 주입하는 전통적인 방법이다. 온도에 따라 유리의 상태가 천천히 변화하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긴 대롱을 입으로 불면서 끝에 매달린 유리 덩어리를 끊임없이 돌려야 한다. 그래야만 완벽하게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다.
굉장히 여유 있어 보이지만 작업 중 이 분의 몸통은 들숨과 날숨의 엄청난 혈전을 벌인다. @시퀀스
1250~1500도에 용해된 유리의 시뻘건 덩어리에 순전히 인간의 육체로 생명을 불어넣는다. 기술과 재능, 인간의 날숨에 따라 형태를 창조하는 데에 거의 한계가 없다. 유리의 조색은 다른 전문가들의 몫이다. 어떤 색의 유리로 어떤 제품을 만들지는 철저하게 매뉴얼에 따라 작업이 이루어진다.
유리는 언제나 당대의 기술과 경제적 수준을 반영했다. 알폰소 무하 공방도 체코에 있는데 그만큼 이 지역은 14~5세기부터 유럽의 대표적인 유리 생산지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카를로비 바리의 동화
숲 속의 신비로운 사슴 @픽사
카를로비 바리는 프라하에서 자동차로 1시간 남짓 걸린다. 14세기 이 곳은 왕의 전용 사냥터였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4세가 보헤미아 국왕도 겸하고 있었다. 중세의 영지란 농지 외에는 생산성이라곤 없는 유휴지가 대부분이었는데, 왕궁과 가까우면서도 - 당시 교통상황이라 해도 반나절, 최소 하루 안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 - 도시 외곽의 끝없는 들판과 울창한 숲이 펼쳐져 상류층의 취미생활에는 최적지였을 것이다.
그 날 사냥에서 왕의 화살에 사슴 한 마리가 쓰러졌다. 사냥개들이 몰려가고 왕의 일행도 전리품을 찾아 쫓아가는데, 그들의 눈 앞에서 사슴이 비틀비틀 일어나더라는 것이다. 사슴은 달려드는 사냥개들을 피해 비틀거리며 도망쳤다. 샘물가에 다다르자 물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어리둥절한 사람들 앞에 잠시 후 사슴이 물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슴은 상처가 씻은 듯이 나은 것처럼 꼿꼿한 자세로 왕 일행을 힐끗 보고는 (후광도 비치지 않았을까.) 숲 속으로 달아났다. (전지적 필자 시점)
이제 사냥은 중요하지 않다. 알고 보니 그 샘물이 온천수여서 상처를 치유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험한 신비의 온천수를 숲 속의 동물들만 누리는 게 말이 되겠는가.
왕은 카를로비 바리에 대대적인 온천개발을 지시한다. 아마 최초의 개발도시가 아닐까. 농경지 주위로 마을이 생기고 그런 마을들을 잇는 위치에서 상거래가 시작되면서 도시가 발달하는 일반적인 루트와는 다른 것이다. 온천을 개발하고 성을 짓고, 왕의 행차에 필요한 수행원과 식솔들, 군사들이 머무를 숙소를 짓는다. 그들을 위한 서비스업종이 뒤를 이어 유입된다. 사냥터는 세계 최초의 온천도시로 변모해서 유럽 상류층들의 연례 방문지가 되었다. 아마 왕의 수입도 수백 배 늘어나지 않았을까.
잠깐, 그만 이성을 찾아야겠다. 사슴의 신비로운 동화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럼 왜 이 이야기는 아직도 구전되어 내려오는 걸까? 영지에서 온천이 발견됐다. 왕은 온천탕을 만들어 휴양지로 쓰고 싶다. 그럼 만들면 되는 일이다. 무엇 때문에 사슴이 필요하겠는가. 자금을 동원할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당시의 카를 4세는 중부 유럽의 광활한 영토를 소유한 부유한 황제였고 그의 사치를 말릴만한 세력도 없을 때였다. 추정해보면 사슴 이야기는 온천의 치유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마케팅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유럽의 왕족들이 오고 싶어 안달이 나도록, 그래서 왕의 금고로 엄청난 돈이 쏟아져 들어오도록 말이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보의 귀재가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는 자본과 권력이 있으면 무조건 성공하는 부동산 디벨로퍼의 첫 사례일 것이다. 중세 말기에 시작되어 르네상스를 거치며 만들어진 도시라 디즈니 동화 속에서 많이 본 느낌의 건물들로 가득 차 있다. 공주들이 살 법한 그런 아름다운 건물들과 거리,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이 휴양도시는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를 개최한다. 동유럽의 칸느 영화제를 표방하며 에밀 쿠스트리차를 배출하기도 했고,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으로 대상을 받았던, 우리와는 나름 인연이 깊은 도시다.
카를로비 바리 전경 @픽사
적합한 토양과 생산 루트
그만큼 이 지역의 토양은 유기물과 석회 성분이 풍부해서 유리를 만드는 데에 질 좋은 원료를 조달할 수 있는 것이다. 모젤의 디자인 총괄 쟈부렉 루카스는 지금도 유리의 원료부터 세계 최고의 품질을 보유한다고 자부한다. 유리산업에 관한 한 체코(당시 보헤미아)는 중세시대부터 서유럽보다 훨씬 앞선 수준이었다. 모래뿐 아니라 다른 유기물 자원도 풍부했다. 특히 동방 지역과 흑해, 지중해, 서유럽을 아우르는 원거리 무역의 길목에 위치한 덕분에 기술과 물자, 제품의 이동에 유리했다. 유리산업과 맥주산업은 같이 발전한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노동강도가 높은 극한직업이라 일을 마치면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체코의 맥주는 정말 다양하고 저렴하면서 맛있다.
블로잉 기법으로 만든 앤틱 유리에 연결용 납 선을 이용해서 견고한 구성이 가능해졌는데, 이는 스테인드글라스 양식의 기본형태이다. B.C 2500년 이집트에서 시작된 납땜이 유리조각들을 연결해서 창문을 만들기까지 거의 3천 년이 걸린 셈이다.
5세기가 되면 이 유리창문은 서아시아에서 점차 서유럽의 중심으로, 기능을 넘어선 미적, 종교적 영역으로 진화한다. 그 과정에서 유리의 크기와 색채, 투명도에 대한 극한의 탐닉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