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는 전쟁의 시대다. 물론 전쟁이 없는 시대가 어디 있겠냐마는, 중세는 시작과 끝이 유일신들의 전쟁이기 때문에 특별하다. 민족마다 지역마다 수많은 신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신을 지키기 위해 싸웠고 신이 승리를 안겨줄 거라고 믿었다. 어떤 신이든 적을 섬멸할 것을 요구한 것도 다르지 않다. 그 신들이 두 유일신 아래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서쪽에서는 기독교가 유일한 정신적 구심점이자 권력의 최정점으로 자리 잡았고 동쪽에서는 이슬람이 그랬다.
그렇게 평정을 끝낸 두 문명은 마침내 경계를 넘어 두 유일신의 이름으로 격렬하게 충돌했다. 711년 이슬람이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뒤부터 1500년대까지 거의 800여 년간 이어진 싸움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어느 쪽도 상대를 정복하지 못했다. 그 대신 각자의 구역에서 최고 존엄의 확고한 반열에 올랐다. 권력과 경제, 문화 그리고 정신까지 이후의 역사는 모두 이 지점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하위 카테고리에서 벌어진 무수한 살육의 깃발은 언제나 신의 이름으로 휘날렸다.
신의 가호를, 신이 우리를 지키신다, 신에게 영광을, 신의 뜻으로
주문을 외며 그 탐욕과 살육이 정당하기 위해서 신은 더욱더 완벽하게 숭배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세는 엄청난 자본을 동원해 신을 마케팅-해야-하는 시대였다.
어느 시대나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 중세 역시 여러 관점들이 있는데, 그 속에서 대략 일치하는 건 고대 로마제국이 300년대에서 500년대까지 중세로 이어지는 과도기를 거친다는 점이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하고 크고 작은 왕국들이 난투전을 벌이는 중에 이슬람과 바이킹이 몰려온 10세기까지 중세 초기는 한 시대의 형태가 갖춰지는 시기였다. 그 이후가 중세의 전성기로, 짧지만 풍요로운 시대가 지나간다. 그리고 14세기 흑사병을 기점으로 15~6세기까지 후기-르네상스 포함-로 본다. 제국이 분할된 3세기 이후 동로마제국은 나름 동방지역의 패권을 장악하며 천년을 지속했다. 비잔틴 문화 속에서 그리스 로마의 유산을 지키고 멸망 후에는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되어 르네상스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니 고대문화는 단절된 게 아니며 암흑시대는 더욱 아니라는 데에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이슬람의 유럽 이베리아반도 정복(711)으로 중세가 시작되고 동로마제국 정복(1453)으로 중세가 저물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들의 전쟁에 인용하기 매우 적절한 관점이다.
이 시기의 기후를 보면 재미있는데 로마의 전성기에 가장 기온이 높았고 쇠망기에 가장 기온이 낮다. 그 후 500년 동안이 8천 년 만에 지구가 따뜻해졌다는 중세 온난기다. 이때 농작물 생산이 늘어나 식량사정은 좋아졌는데, 해수가 녹고 유빙이 줄어들면서 바이킹이 대거 남하하게 된다. 노스맨, 데인족으로 불리운 그들은 배에서 내려 마을을 습격하고 말을 약탈해 이동하는 식으로 곳곳을 유린했다. 그들의 전투력과 기동성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 풍요와 야만의 시기 위에서 중세의 꽃을 피우며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2천 년 간의 기후 그래프는 인류가 언제 살만했고 언제 고단했는지 보여준다.
인간을 움직이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단연코 생존이다. 동물이 먹이를 찾아 헤매듯 인간도 언제나 생존을 위해 움직였다. 시작은 아시아의 초원에서 시작됐다. 스키타이, 타르타르, 코사크, 훈족 이 전설적인 무시무시한 기마 부족들이 먹이를 찾아 서진하자 러시아 남부의 평원에 살던 게르만 기마 부족 고트족이 밀려나 제국의 국경까지 남하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앞부분, 눈이 쌓인 숲 속에서 팔다리를 내놓고 전투를 벌이는 로마군을 기억할 것이다. 그곳이 전성기 시절 로마의 속주 게르마니아 국경지대이다. 당시 막사에서 아들의 손에 죽은 아우렐리우스는 실제로는 5 현제 중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로마군을 개혁하고 전투에도 직접 참여한 황제였고 도나우강 인근에 출몰하는 게르만족을 수없이 패퇴시켰다. 게르만이 포로가 되면 대개 노예로 팔았는데 그는 제국 내에 정착하게 해 주고 심지어 이탈리아 지방에도 살 수 있게 했다. (물론 그들은 반란과 소동으로 갚았지만.)
이들은 로마제국의 힘과 위대함에 경외감을 가지고 로마의 일원이 되려는 열망이 있었다. 그래서 황제의 허가를 받아 정착촌을 건설하고 살았다. 로마의 동맹으로 로마가 주는 직위와 명예를 누렸고 관습과 전통에 복종했다. 게르만 기병대는 허약해진 군대조직의 중심이 되어 로마 갈리아 군단의 반란(335~338)을 격파하는 등 제국을 방어하는 주력이 되었다. 그들은 지도자와 병사들 간에 특별한 유대관계로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의 조직이 로마군 내에 확산되었다. 이것은 군대가 황제보다 장군에게 충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중세 봉건제의 형태가 여기서 발견된다.)
로마는 다시 국정을 추스르고 군대를 개혁하는 한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한다. 제국이 분할되어 동서로 나뉘었고 영토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 시기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통해 국가의 통합을 꾀하려 한 것 같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인정하고 337년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제1제자인 바오로(사도 바울)의 무덤 위에 기념관cella memoriae을 세웠다. 이를 확장하여 거대한 대성당이 지어졌다. 황제는 죽기 직전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3년 후, 그리스도 탄생 380년 만에 로마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다. 300년 넘게 이어진 박해와 탄압이 드디어 끝난 것이다. 로마의 주교를 교황Pope이라고 칭했다. 로마의 주교는 사도 베드로의 직계 후계자로 아주 중요한 지위를 가졌기 때문이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순교했기 때문에 로마는 가톨릭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하지만 불과 15년 뒤에 제국은 동서로 완전히 분리된다.
문제는 로마(속주 총독)가 고트족 정착촌을 착취하고 완전히 제압하기 위해서 각 부족장들을 말살하려고 한 것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바바리안이 이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족장의 장자를 인질로 끌고 가 로마인으로 키운다. 세금 문제로 갈등이 불거지고 질서가 무너지자 부족장을 처형하고 그 아들을 꼭두각시 족장으로 앉히려한다. 로마인이 된 줄 알았다가 배신감을 느낀 주인공이 저항을 시작한다. 그는 분열된 부족들을 이끌고 배운 대로 로마군을 박살 내면서 첫 시즌이 끝난다.
강성할 때는 격퇴시켰을 야만족들을 로마는 이제 당할 수 없게 된다. 하드리아노 폴리스에서 발렌스 황제가 직접 지휘한 로마군은 고트족에게 거의 전멸했다. 황제와 2만 명의 친위대, 주요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했다. 제국을 지키는 최정예부대가 사라진 것이다. 당시 고트족은 일가족을 다 데리고 이동해서 난민 부대라는 조롱을 당했는데, 이런 시각이 로마군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특히 황제는 고트족을 진압하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전쟁과 긴 행군에 지친 군인들은 안중에 없었다.
여기에 고트족은 영리하게 시간을 벌어 지원군을 끌어모았다. 게르만 기병의 승리라는 전술적 평가도 있지만 당시엔 로마군도 기병이 있었다. 진용을 갖추기도 전에 전투가 시작됐을 때 양쪽의 보병과 기병들은 비슷한 전력이었다. 그때 고트족 지원 기병대가 나타나 흔들리는 로마 보병의 측면을 파고들어 격파했다. 이 기병전술은 새로운 게 아니었다. 알렉산더 대왕도 수십 배 많은 페르시아 대군을 그렇게 완패시켰고 포위 섬멸전의 교본이라 할 칸나예 전투가 500년 전에 이미 있었다. (로마와 카르타고 2차 포에니 전쟁)
고트족은 이제 로마와 대등한 관계가 되었다.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하자 그들은 제국 내를 활보하며 유린하기 시작했다. 476년 훈족 오도아케르가 황제 로물루스를 쫓아내고 제국을 멸망시킨 건 더 이상 놀라울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