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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표고 Apr 23. 2024

위대한 유산

   나에게 명절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외할머니의 음식이다. 할머니는 직접 빚은 손만두, 며칠을 끓여 맑고 진하게 우러난 국물이 일품인 갈비탕, 색색이 고운 전들 뿐만 아니라 식혜와 수정과까지 담그시곤 했다. 할머니의 요리는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데도 간이 너무나 적절해서 입맛이 없을 때도 나도 모르게 한 그릇 더 주세요를 외치게 만들 정도로 훌륭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할머니의 손만두를 가장 좋아해서 초등학생 꼬마일 때도 찐만두를 앉은자리에서 10개는 해치우고는 다른 사람이 남기지 않나 기웃거릴 정도였다.



  외할머니의 요리를 먹고 자란 엄마는 훌륭한 손맛을 물려받은 것은 물론, 잘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분이었다. 내가 4살 때부터 내내 일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매끼 다른 국과 반찬을 상에 올리셨고, 우리에게 집밥을 제대로 먹여주고 싶은 마음에 집과 가까운 곳에 사무실을 얻을 정도로 밥에 진심이셨다. 도시락을 2개 싸가던 고등학교 3년 내내, 점심 도시락과 저녁 도시락의 반찬이 달랐고 아이들은 내가 도시락통을 열면 환호하며 달려들곤 했다. 엄마의 밥은 내게 자부심이었고, 나는 밥상을 보며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곤 했다.



  5학년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란 아빠는 허기진 어린 시절을 보내서 일까 식탐이 꽤 있으신 편이었고, 항상 식사시간을 매우 즐기시는 분이었다. 무뚝뚝하고 엄격한 아빠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는 때가 식사시간이 유일했다고 할 정도였고, 엄마에게 다정하게 애정표현 하는 게 서툴렀던 아빠의 최고의 사랑 고백은 맛있다를 연발하며 그릇을 싹싹 비워내는 것이었다. 엄마는 아빠의 마르지 않는 음식 칭찬이 좋아서였을까, 아빠가 공깃밥을 추가하실 때 가장 행복해 보였다. 엄마 아빠는 늘 식사 시간이 끝나면 “오늘도 물장수 상이네”라면서 소스도 거의 남지 않고 싹 비워진 식탁을 보며 허허 웃곤 했다.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을 떠올리라면 식사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식탁에 모여 앉았을 때만은 우리 가족은 정말 즐거웠다.



  

  어릴 때 할머니와 엄마의 일품요리를 먹고 자란 덕에 나는 절대미각 까지는 아니지만 여행을 가는 가장 큰 이유가 그 나라의 새로운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 될 정도로 맛을 추구하는 사람이 되었다. 혼자서 자취하면서도 대충 때우지 않고 나를 위해 한 끼를 정성스럽게 준비하곤 했다. 새로운 것을 먹어보면 꼭 집에 와서 내식대로 만들어보고 나만의 레시피를 추가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남편은 나에 비해서 그냥 있으면 있는 대로 먹고 대학과 대학원시절에는 거의 분식으로 때웠어도 크게 불만을 느끼지 않는, 맛에 조금 둔감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 내 자취방에 놀러 왔을 때 나는 나만의 필살 레시피로 된장국수를 끓여주었는데 남편은 그렇게 해 먹고사는 나를 보며 크게 놀랐다. 나의 맛집 탐방 욕구에 따르느라 나와 데이트를 하면서 처음 먹어본 음식도 많을 정도였는데, 남편은 신세계가 열린 기분이었다고 했다. 내가 요리를 해줄 때면 옛날에 아빠의 모습이 겹쳐 보일 정도로 칭찬 연발에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어주곤 해서, 그를 위해 요리하는 것이 내 가장 큰 낙이 되었다.



  외할머니가 9년 전에 돌아가시고, 더 이상 그 찬란한 명절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후 나는 명절마다 손만두를 만들게 됐다. 할머니가 암선고를 받고 한 달 만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시는 바람에 언젠가 꼭 배워두겠다고 다짐했던 수많은 레시피들을 묻지 못한 게 두고두고 한이 되었기에, 손만두만이라도 할머니 비슷한 맛을 따라가고 싶어서 내 혀에 남은 기억을 더듬어가며 만들곤 한다. 9년을 도전하고 있는데도 아직 나는 그 맛의 반도 따라가지 못했지만, 언젠가 재현해 낼 수 있을 날을 꿈꾸며 앞으로도 계속 도전할 생각이다.



 어떤 유산을 받아야 금수저라고 할 수 있을까? 최소 집 한 채는 되어야 할까? 나는 외할머니로부터 엄마를 지나 나에게 전해진 음식에 대한 열정과 내 음식으로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그것이 정말 위대한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산을 받았기에 나는 충분히 금수저라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살아간다. 오늘도 나는 무슨 요리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지 두근거리며, 그가 퇴근할 시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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