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마지막날. 이번 한 주도 월요일~목요일은 공부방을 운영하고, 공부방이 쉬는 금요일에 화실에 그림을 그리러 가는 것이 새로운 루틴이 되었다. 어제 금요일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첫 작품의 채색을 반 정도 칠하고, 날씨가 좋아 남편과 머체왓 숲길을 2시간 산행했다.
너무 알찬 하루를 보낸 탓일까. 남들에겐 불타는 금요일을 9시가 막 되자마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새벽 3시경에 잠깐 눈이 떠졌고, 숙면을 취해선지 다시 잠이 들질 않았다. 새벽의 온전한 시간. 아마 글을 쓰지 않는 사람도, 특히 쓰는 사람이라면 꼭 알 것이다.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세상이 모두 잠든 와중 나만 깨어있다면, 그때 핸드폰을 켜는 사람은 참 안타깝다. 세상이 마련해 준 '나에게로 걸어 들어갈 시간'을 놓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간이 와 준 것을 환영하며, 노트북을 편다. 그렇게 눈 감아있던 세상 속에 나 혼자 내면과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세상은 어스름풋 아주 서서히 눈을 뜬다. 어느덧 6시. 남편이 일어난다.
"엇! 벌써 일어난 거야? 아님 안 잔 거가?"
일찍 깬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라곤, 남편은 아이들이 깨기 전에 동네 조깅을 하러 나가려 한다. 그런 남편과 나는 바통 터치를 하고, 남편이 데워 논 이불속으로 풀썩 들어간다.
계절의 여왕 5월이 남기고 간 6월의 첫날. 새벽에 잠을 못 이루다 아침 6시가 되어 이부자리로 되돌아간 나는 주말아침을 한껏 늦잠 부려볼 참이었다. 허나 어김없이 방 안으로 쏟아 내려오는 창가 햇살은 그 꼴을 못 봐준다. 시계를 보니 8시다. 창밖엔 찬란한 햇살에 비추어 유난히 더 새파란 하늘과 그래서 더 대조를 이루는 흰색 구름이 약 올리듯 한껏 탄력 있는 건강미를 내뿜고 있다.
아침은 전날 포장해 온 접작뼛국을 가족 모두 나눠 먹고, 마당에 나가 햇볕을 쬔다.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는 동안 부엌에서 집에 있는 과일들을 한데 모아 화채를 만들어 나갔다. 웬일인지 모기도 없는 일 년 중 몇 없는 완벽한 날이다.
"거 참 행복하구먼."
날씨 탓일까. 남편과 나는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완벽한 기분을 함께 나누고 있었다.
"오늘 날씨도 좋은데. 조금 이르지만 해수욕 개시해 볼까?"
" 오 진짜?! 올해 첫 해수욕이네? 애들은 무조건 좋아라 하지 ㅋㅋ"
완벽한 날씨와 완벽한 기분은 아직 여름이라 부르기에 애매한 초여름의 첫날. 올해의 첫 해수욕을 개시할 용기를 심어주었다.
제주엔 바다가 참 많다. 당연히 섬이니까. 근데 동해면 동해, 서해면 서해 비슷해 보였던 육지의 바다와 다르게 제주의 바다는 조금만 가도 바다의 모습이 확확 달라진다. 깊은 에메랄드와 서우봉이 환상 조합인 함덕, 일몰 시간에 화려함이 극에 달하는 요부 협재, 20대 남자처럼 에너지틱한 파도의 중문, 그리고 광활한 모래사장을 얕게 덮은 은빛여린 표선(내 최애) 등 너무 많다. 그리고 오늘의 행선지는 '김녕 해수욕장'이다.
김녕을 처음 온 것은 아니지만 김녕 해수욕장을 택한 이유는 '아이와 오기 좋은 예쁜 바다'이기 때문이다.
첫째, 적당한 규모.
바다가 너무 크면 아이들을 케어하는 반경이 넓어지는데 은근 작지 않으면서 너무 크지 않아 딱 적당하다.
둘째, 가까운 편의시설.
대부분의 해수욕장은 주차장과 해수욕장의 거리가 길다. 그래서 짐이 많거나 아이를 데리고 해변까지 걸어 들어오는 길이 꽤 고행이다. 김녕은 해수욕장 바로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해수욕 전부터 힘을 빼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편의점도 바로 앞에 있어 미리 먹을 것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넷째, 잔디밭 캠핑장.
모래사장만 있는 대부분의 해변과 달리 해수욕장에 바로 인접해 살짝 높은 위치에 잔디밭 지대가 있다. 위에서 바다뷰를 내려다보면서 바닷물에 텐트가 오염될 우려도 없어 현지인들의 인기 캠핑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녕이 좋은 점은 이런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미적인 면에서 다른 바다에 조금도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넓게 펼쳐진 백사장의 흼은 눈이 부시다 못해 뿌옇게 산란해 몽환적이다. 저 끝 코발트블루빛 깊고 옅은 그라데이션 바다는 하얀 백사장과 조합을 이뤄 포카리스웨트를 연상시킨다. 이런 환상적인 바다의 미모와 다르게 바람은 꽤나 살벌하다. 초여름의 적당히 선선한 온도도 바다의 거침없는 강풍과 만나면 매서워지더라. 처음엔 별로 춥지 않다고 느끼던 사람도 그 은은한 강풍의 꾸준한 다발성 공격을 받노라면 어느 순간 맥이 금새 빠지곤 하는 것이다.
"허허. 살짝 서늘하긴 하네. 바람만 좀 덜 불었더라면... 쩝."
초여름. 조금 이른 해수욕. 그럼에도 바닷가는 우리처럼 한여름까지 기다리지 못한 해수욕객들로 벌써 북적였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한 텐트를 꺼내 펴는 동안 아이들은 이미 입수를 마쳤다. 첫 발에 살짝 몸이 부르르 떨리는 수온에도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텐트를 펴는 동안 바람 싸다구를 사정없이 맞아대다 텐트가 완성되자 나는 얼른 안으로 몸을 피한다. 텐트 안은 바깥의 강풍과 대비되 더욱 고요하고 평온하다.
텐트가 펴진 걸 보자 아이들은 벌써 콧물을 훌쩍이며 텐트 안으로 달려온다. 초여름의 서늘한 강풍이 젖은 몸의 체온을 금세 떨어뜨렸다. 놀땐 못 느끼던 오한이 뒤는게 밀려온 아이들. 지렁이 시체 빛이 된 푸르죽죽한 입술 뒤로 이빨을 '따다다다닥' 요란히도 떨어댄다. 그러곤 이제 물놀이가 시시해졌는지 배고프다고 짹짹인다. 나는 배달앱으로 가까운 치킨집에 배달 주문한다.
강풍의 공격에 벌써 에너지가 방전된 우리는 따뜻한 텐트 안이 알처럼 포근해 잠이 모락모락 피어난다. 치킨을 기다리는 동안 30분 정도 단잠에 폭 빠지자 전화벨이 울린다.
"헉! 치킨 왔다!!"
물놀이 후 치킨은 꿀맛이다. 어른이고 아이고 한참 치킨 미식에 푹 빠져 말도 없이 먹는다. 어느 정도 배가 채워지자 아깐 보이지 않던 텐트 밖 풍경이 보인다.
텐트 안은 알.
텐트 밖은 세상.
청록, 투명, 레몬빛의 은은한 파도가
마법의 문으로 윤슬에 일렁인다.
그 위론 하늘이 쌓여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해안선은
같은 색으로 서로 물들어 닮아졌다.
가장 아래 층엔 검은 현무암 위로
잔디와 모래가 군데군데 섞여있고
그 위를 강아지풀인지 갈대인지 모를 풀 무리가 바람의 지휘에 맞춰
이리저리 깃털 같은 잎을 저어대고 있다.
아, 아름다운 세상!
태양신이 저 위에서 굽어살펴 손수 구름을 열고
에스컬레이트 타듯 천천히 내려오신다.
등속으로
이런 신성한 풍경을 텐트 안에서
치킨이나 뜯으며 보고 있자니.
치킨도 알 밖으로 날아오르겠다.
초여름 해수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