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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24. 2019

뿌리 내리기

생각하고, 고민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PC로 읽으신다면 더 편안하실 거예요. :-)




어떻게 이 곳에서 버티며 살아내야 할지 어렴풋이 알아가는 기분이었다.

나의 마음과 현실의 괴리는 여전히 존재했지만

내 생각을 흔들고 깨우치게 한 가장 큰 자극제는 남편의 묵묵한 성실함이었다.


내 남편은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과정과 그 안에서 오는 부수적인 감정들이 중요한 나에 비해

결론이 중요한 그는 최종적으로 내뱉는 말의 무게를 그 누구보다 무겁게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나에게 힘든 내색 없이 그의 삶을 살아냈다.


주 6일 새벽 4시 반 기상, 늦은 오후 퇴근.

아프지도 못하는 미련한 이 사람은 나에게 그저 무거운 가장의 삶을 느끼게 했다. 어쩌면 말하지 않아서 더욱 간절히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미안할 정도로 나에게 바라는 게 없었다.


어떤 생각으로 어떤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는지 따위는 그 당시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믿고 이 낯선 곳까지 와 준 부인에게 그는 우리 형편에 비해 좋은 옷, 비싼 음식, 쓸데없는 낭비 등을 제외한 내가 바라는 거의 모든 일들을 지지해주었다.


긴 하루를 보내고 항상 피곤에 찌들어 잠드는 그의 옆에서 더 이상 가만히 주저앉아 울고 있을 수 없었다.


아무도 나를 이 곳에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었고, 내가 선택한 곳이었고, 내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선택한 삶이었다. 나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해내고 싶었고 그 선택이 잘못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씩 배제시키고 싶었다. 나는 생각하고, 고민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선택한 이 삶을 위해서.




새로운 일을 구할 때 우선순위가 정리되었다.


- 전제: 힘들 때까지 하지 않는다. 아르바이트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일한다.

           먹고사는 돈을 버는 것은 남편이 책임진다고 했다.

           내가 버는 만큼 우리의 미래가 조금 더 편해질 수 있다.

           내 직업은 주부이다.


- 시급: 높은 시급보다 일의 강도가 반영된 시급으로 rate를 매기는 곳.

           물론 편한 일을 하고 높은 시급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런 곳이 있을까 싶다.

           힘든 일을 하고 높은 시급을 받기에는 내 체력의 한계를 무시할 수 없었다.

           난 워킹홀리데이를 위해 호주에 온 젊은 20대 청춘이 아니었다.


- 근무: 일요일에 문을 열지 않는 샵 혹은 일요일 데이 오프를 요청할 수 있는 곳.


- 시간: 시급이 높지 않더라도 안정적이고 주기적인 로스터를 받을 수 있는 곳.

           저녁 타임엔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는 곳.


- 영어: 업주의 국적과 상관없이 호주 로컬들을 상대로 영어를 쓸 수 있는 곳.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나의 조건에 맞는 것이 정말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점점 굳혀져 갔다.




쇼핑센터 푸드코트 안에 있는 스시샵에서 캐셔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주문을 받고 주방에서 만들어놓은 초밥을 바로 포장해서 계산을 해주는 간단한 일이었다. 남들에겐 하찮을 지 몰라도 그때 그 상황에서의 나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이었다. 생각이 너무 많았다. 일이라도 단순해야 했다.


- 시급: 크게 힘쓸 일이 없었고 일이 고되지 않았다. 예전 초밥 레스토랑에서 일했던 경력으로 사장님이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높은 시급으로 시작해주셨다. 몇 달 지나지 않아 시급이 꽤 많이 인상되었다.


- 근무: 일요일에도 문을 여는 샵이었다. 첫 몇 주는 격주로 일요일 근무를 했었으나 같이 일하던 친구가 그만두고 새로운 직원이 왔을 때부터 사장님께서 편의를 봐주셔서 일요일 근무를 제외시켜 주셨다.


- 시간: 이 곳 쇼핑센터는 오전 9시-10시 사이에 오픈해서 쇼핑데이인 목요일을 제외하고 오후 5시 정도에 문을 닫는다. 아무리 들쭉날쭉 이어도 쇼핑센터 운영 시간 안에서 일을 할 수밖에 없다. 남편과 매일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몇 달 지나서 또 다른 직원이 오게 되었을 때부터 사장님께서 로스터를 조정해주셔서 고정적으로 오픈 조로 일할 수 있었다. 월-토 7:30-14:30.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해졌고 소득의 예측도 대략 가능해졌다. 쇼핑센터 안에 샵이 있었기 때문에 일을 마치고 장을 봐서 집에 돌아오거나, 은행, 우체국 등의 업무를 처리하기가 용이했다.


(남편은 주 6일 오전-오후 근무를 해야 하는 사람이라 은행, 부동산, 우체국, 회계사, 법무사 미팅 등 거의 대부분의 일을 내가 혼자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남편의 비서, 홈 오피서 업무를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분업이었다.)


- 영어: 사장님과 직원들은 한국인이었지만 대부분이 호주인, 외국인이었다. 아시안계 외국인이 밀집해있는 곳의 쇼핑센터 안에 있어서 다양한 나라 출신 이민자들의 영어를 만나볼 수 있었다.

 



일도 안정적이었고 사장님도 좋으셨다. 문제는 전혀 다른 곳에서 발생했다. 어린 친구들의 오해였다. 이  곳에 와서 어떤 아르바이트의 일을 하게 되건 직장생활을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을 걸고 하는 것이기에 어떤 사소한 일이든 정말 최선을 다했다. 절대 지각하지 않았고, 핑계 대지 않았고, 시키는 일은 물론 찾아서 일을 했었다.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저 그런 식으로 일을 대하는 게 몸에 익어있는 어리지 않은 사람일 뿐이었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땐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정중하게 요청했고 권리를 내세우기보다는 묵묵히 의무를 다했다. 보이는 사람 눈에만 보이는 그 차이들을 사장님께서 고마워하시고 같이 오래 일할 수 있는 많은 배려들을 하나둘씩 표현해주셨다.


어린 친구들이 종종 오해하거나 서운해했다. 사장님이 누나만 좋아하고 누나 말만 옳다고 생각한다고 말이다. 사장님께는 죄송했으나 나는 다른 일을 구하기로 마음을 먹고 그만두었다. 호주 법정 시급으로 페이 하는 또 다른 쇼핑센터의 스시샵에서 바로 연이어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어린 친구들의 오해가 며칠간 속상하긴 했지만 더 좋은 조건의 일을 찾아가게 되었다. 언제나 이 패턴이었다. 새로운 일을 찾을 때마다 아주아주 조금씩이나마 나아지고 있었다. 마음에 감사가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의 전 회사에서 트레이닝 비자 이야기가 오갔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오해가 생겼고, 남편의 자존심이 많이 상하는 일이 있었다. 속으로는 불안하고 걱정이 가득했지만 처음으로 남편을 위해 용기 있는 척 말을 내질렀다.


"회사 당장 그만둬. 우리가 지금 있는 게 자존심뿐인데. 그것까지 없으면 어떻게 해. 내가 돈 벌 테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 아직 비자 많이 남았어. 다른 회사 찾아가면 돼."


남편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렇지만 그는 몇 달간 묵묵히 참고 일을 나갔다. 가장의 무게였다.




이래저래 고민이 많았다. 퍼스(Perth)로 지역 이동까지 생각했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고 남편은 다른 도시로 움직이지 않고 이 곳 골드코스트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게 되었다. 회사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그는 일하기로 한 마지막날까지 마무리하고 와서 돌아오는 주 월요일에 새로운 곳으로 첫 출근을 했다.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 사람들이 실수하는 부분이 있다. 여기가 낯선 곳이라 아무도 자기를 모를 것이라 여기는 점이다. 되려 한인 커뮤니티는 좁아서 건너 건너 다 아는 사이다. 일, 특히 기술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데모도인데 중간기술자라며 스스로 몸값을 뛰어 이직을 한다던지 중간기술자인데 기술자라며 좋은 대우를 원한다던지. 그런 거 다 부질없다. 기술자는 현장에서 일해보면 바로 안다. 얼마짜리 사람인지. 어디부터 어디까지 커버리지 가능한 사람인지. 핑계를 댈 수 없는 부분이다. 스스로 얼마를 받고 싶은 건 중요한 일이 아니다. 내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얼마짜리인지만 중요할 뿐이다.


- 옆에서 지켜보면 처음 타일 시작하는 친구들도 실수를 많이 한다. 워킹홀리데이로 짧은 기간 내에 일을 하고 돌아갈 예정이라면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지금 당장 일당 10불, 20불 더 주는 회사 가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일반 사무직이면 고려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술직이다. 지금 당장은 조금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우선 배울 수 있는 게 많은 곳, 안정적이고 큰 현장이 많은 곳, 이미 여기에 자리 잡고 사시는 좋은 선배들이 많은 곳의 회사를 추천한다.




이직 후 우선 남편의 웨이지가 많이 달라졌다. 예전 회사에서 당연히 스폰서 영주비자를 진행할 줄 알았는지 남편은 하는 일에 비해 정말 터무니없이 적은 웨이지를 받아왔었다. 생활도 마음도 정말 많이 안정되었다. 학생비자 기간을 1년 정도 남겨놓고 우리는 한 달 반 만에 추가 서류요청 없이 457 취업비자를 승인받을 수 있었다. (취업비자 취득 2년 후 스폰서 영주비자를 신청할 수 있다.) 전 회사에서 제시했던 트레이닝 비자 후 취업비자로 가는 코스보다 2년의 시간이 절약됐다. 전화위복이었다.


기나긴 터널 끝에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막연하고 막막했던 그 시절이 끝나고 2년이라는 한정된 시간이 주어졌다. 2년이라면 버틸 수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걸음 또 나아갔다. 힘든 일이 생겼을때 그저 회피하거나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조금이나마 나은 모습으로 변해있는 나 자신을 시간이 흘러 느낄 수 있었다. 감사했다.


우리가 너무 힘에 부치고 선택의 옵션이 많이 없었을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간을 벌어보자며 지혜로운 마음을 주신 분들이 있다. 이런저런 조언 없이 따뜻한 떡국을 끓여내 주셨다. 그 감사한 마음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쉽게 간섭하거나 조언하는 것보다 말없이 지켜봐 주고 함께해준다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깨닫는다. 그분들 같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에는 오해가 있었고 서운한 점도 있었지만 또 시간이 흘러가 보니 남편의 전 회사에도 고마운 것들이 생겼다.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일도 꽤 많은 듯하다.




속도는 아주 느렸지만 하나하나 우리가 바라는 대로 변해가는 상황이 신기했다.

성취감과 자신감이 조금씩 느껴졌다.

남편과 나 사이에 서로 신뢰의 파트너십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천천히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점점 더 씩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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