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인 줄 알았는데 바람이더라
그녀는 좋았다. 다시 보살피고 지키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 사랑. 실체 없는 허상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누군가에게 몰입할 수 있음이 좋았다. 때론 감정이란 맑은 물이 아닌 흙탕물 같은 때도 있는 법이라 그 감정의 정확한 출처를 알기가 애매모호할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실체적인 감정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감정에 취해 그게 사랑이라는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말 그대로 연애하는 자신이 좋은 상태. 그녀가 그런 상태였다.
그는 비밀이 많은 남자였다. 오랜 시간 미국에 있다 왔다고 했다. 미국에 공부하라고 보냈는데 놀기만 해서 부모님이 화가 잔뜩 나 집으로 강제소환당한 후 지금은 대학을 다시 들어가기 위해 영어점수를 따려고 평일엔 스파르타식 영어학원 종일반을 다니고 밤에는 부모님 몰래 노래방도우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코인 투자로 많은 빚을 져서 부모님이 아시기 전에 몰래 돈을 벌어 갚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뭔 삼류소설 같은 이야기냐, 하며 한쪽 볼이 씰룩거리며 어이없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돌아서 버릴 이야기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비련의 부잣집 도련님이구나. 지켜주고 싶다. 내가 잘 키워서 제대로 된 사람을 만들어 함께 해주고 싶다. 그녀의 평강공주병이 다시 도지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와의 생활이 그녀에겐 일상이 되었다. 집 비번을 공유하고 반동거를 시작했다. 부모님께 비밀로 도우미일을 하는 그를 위해 그가 도우미 때 입는 옷들을 그녀의 집에 가져다 놓는 것도 그녀는 마다하지 않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잠자는 그에게 입맞춤을 해주고 나오며 출근했다 집에 오면 불 켜진 집에 그가 있었다. 날 기다려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았다. 그녀는 병적으로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출근해서도 그를 만날 생각뿐이었다. 점심시간만 되면 그녀는 그를 만나기 위해 집에 가서 그를 만났다. 함께 점심을 사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함께 잠자리를 가졌다.
하지만 불안 불안한 그녀의 반동거는 결국 파국을 향해 가고 있었다. 뻔한 결말임에도 불붙은 채 굴러가는 화차처럼 그렇게 그와의 연애도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그녀도 은연중에 알고 있었지만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그럴 때가 있지 않은가. 미친 줄 알지만 뿌연 탁한 상태에서의 환각처럼 취한 상태, 미치면 어때. 난 지금이 좋아.라고 놔버리는 상태. 아니, 오히려 썩은 동아줄임을 알면서도 꽉 잡고 매달려 깔깔거리는 상태. 그녀가 그런 상태였다.
처음에는 잘 자주던(?) 그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와 빨리 관계를 갖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 그는 자꾸 레슬링같이 요리조리 피하며 그녀를 지치게 했다. 심지어 계속해서 항문성교를 요구했다. 그녀는 그것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내 항문은 세상 무엇보다 소중한데!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였다. 항문 외에도 넣을 곳은 많지 않은가!! 항문에만 집착하는 그를 도저히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온몸의 구멍을 막은 다음 항문만 오픈하고 관계를 하면 최고의 쾌락을 느낄 수 있다는 그의 말에 그녀는 묘한 두려움이 느껴졌다. 그냥 그건 학대 아닌가. 원하면 그 옷이나 도구를 가져온다는 말에 그녀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난 그냥 네가 좋은 건데. 너랑 하는 게 좋은 건데 왜 자꾸 그 딴 소릴 해.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급격하게 줄어가는 통장의 잔고만큼이나 그와의 모든 것이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