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을 내뿜는 여름의 나무들에게서
새롭게 직장을 옮기고 다닌 지 어언 4개월이 지났다. 실수와 자책의 연속이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입술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내내 달고 살았다. 꿈속에서도 '죄송합니다.' 하는 걸 보면 말 다했다. 참 미숙했다, 모든 것들이. 당연하지만 전 회사와 모든 것들이 달랐다. 업무가 돌아가는 형식, 보고하는 형식, 기획하는 형식 모든 것들이. 새로운 것들에 금방 맞출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거만이었다. '겸손'을 가르치는 겸손 캠프는 없나. 나는 겸손 캠프에 1년은 들어갔다 나와야 정신을 차릴 거다.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동료들에게 잦은 실수로 신뢰성이 바닥을 칠 무렵, 여름이 오기 시작했다. 여름을 좋아한다. 시간만 준다면 좋아하는 이유를 수백 가지 댈 수 있지만, 여름이 가장 좋은 이유 중 하나를 꼽아보라면 초록으로 물드는 시야가 좋다. 초록잎으로 무성한 나무나 거리들을 보고 있자면 내 눈알이 아주 깨끗하게 씻겨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초록잎을 보고 있자면 나는 생각이 든다.
'살고 싶다. 그것도 아주 잘.'
초록잎을 파릇파릇하게 피워낸 나무들이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어 진다. 해가 쨍쨍한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저마다의 초록색을 띄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나도 날씨에 구애받지 않고 그 날씨에 묻어서 살아내는 그런 초록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전 회사에서 작가님과 함께 여름의 여의도 공원 숲길을 걸은 적이 있다. 작가님이 얘기했다. '신록이네요.' 하고. 나는 신록이라는 단어를 잘 몰랐으므로 실록으로 알아듣고는 '조선왕조실록이요? 갑자기 왜요?'라고 되물었고 작가님은 웃으며 대답해주셨다. '아니 그 실록 말고 나무의 신록 (늦봄이나 초여름에 새로 나온 잎의 푸른빛)이요.' 신록. 단어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되돌아보면 그때도 그러히 생각했었다. 산다면 신록처럼 살고 싶다, 하고.
'죄송합니다.' 하고 입에 달고 사는 나는 아직 신록을 맞이하지 않은 그쯤에 온 건 아닐까. 시간이 지나면 나의 계절에도 신록이 피지 않을까, 하며 내가 해야 할 일과 배워야 할 일을 노트에 다시 적는다. 초록을 보면 나는 살고 싶어 진다. 그래서 이 괴로움과 자책이란 물에서 허우적 대다가도, 물 위로 보이는 초록에 나는 살고 싶어 진다.
그런데 문득 신록을 맞이하지 않은 게 아니라 초록이 그려내는 여러 가지 색 중에 내가 초록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닐까, 하고 생각이 든다. 나는 초록을 보면 살고 싶어 지는데 나는 지금 살고 싶으니까. 그것도 잘. 그러니 내가 발견하지 못한 초록이 있는 건 아닐까. 겸손하게, 꼼꼼하게 찾아보기로 한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초록, 신록이 존재하는 그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