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3. 책벌레 아이슬란드인들의 서점과 무지개
아이슬란드는 책의 나라다. 출간되는 책의 수는 천명당 2.8권으로, 독서 강국인 영국(0.6권), 독일(0.8권)에 비해 훨씬 높다. 34만 명의 인구 중 10분의 1의 해당하는 인원이 책을 발행한 작가로 등록되어 있을 정도란다. 어디에다 눈을 돌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 얼음 빙하, 언제라도 활활 타오를 수 있는 화산을 가까이 보고 살면 그렇게 창작의 영감이 샘솟나 보다.
우리는 책모임에서 친구가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나는 각종 실용서와 사회/기술 서적들이 가득한 시류에서도 요즘 사람답지 않게 문학 편식 인류다. 더군다나 포털이나 유튜브 검색을 통해 쏟아지는 산발적인 정보를 광속으로 획득하고 영상을 고속 재생하기보다는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순서대로 읽고 마지막 장을 덮을 때가 되어서야 진가를 마음에 곱씹는 것을 진정하게 여긴다. 하나의 메시지로 완결된 책과 느린 독서는 뇌근육을 단단히 하고 인지 방식에 깊이를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다 보니 좁은 자취방에 필요한 물건만 두자고 다짐하면서도 책에게는 관대하다. 형형색색의 책이 키를 삐죽삐죽하게 가득 꽂혀있는 책장 로망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독서모임에서 만나 함께 온 만큼, 작가의 나라에 입성한 만큼, 이 곳의 서점을 가보는 건 의미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짧은 일정상 자연풍경과 액티비티 만으로도 위시리스트가 빼곡하여 서점을 찾아가 볼 시간이 있을까 싶었다.
이 날은 레이캬비크를 떠나는 날. 광대한 폭포들과 검은 해변 레이니스피라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야광 연두색 이끼로 덮인 언덕과 평야들이 켜켜이 쌓여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졌다. 사방을 빙글빙글 360도 돌아봐도 움직이는 형체란 우리밖에 보이지 않는 드넓은 이 자연뿐인 게 기가 막혔다. 조금 후에 우리는 Selfoss라는 조그마한 마을에 다다랐다. 정차할 일은 없겠지 스윽 지나치려던 찰나 조수석에 탄 나의 방향으로 두 눈을 스매싱한 가게가 있었다. 희끄무레한 건물이었지만 예뻐 보였다. 게다가 어렴풋이 책장의 형상을 본 것 같았다. 촉이 왔다!
저긴 들어가봐야 해!
다음 일정은 빠듯했지만 즉흥 제안에 약속이나 한듯 일행들은 유턴에 동의했다. 그렇게 우리가 이 곳에서 한 번은 들르길 소망했던 곳, 아이슬란드의 한 서점에 우연찮게 들어갔다.
주변 경관을 간섭하지 않을 정도의 은은한 파스텔 글씨 색과 책 사이에 김이 솔솔 나는 커피를 형상화한 그림 간판이 시야에 들어온다. 유리창 너머로 빼곡한 책들이 보인다. 규모도 꽤 큰 서점이다. 한쪽 구석에는 현지인들이 커피 한잔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 방망이질한다. 지구 북쪽 지성의 나라의 서점에도 와보는구나. 우연히 찾은 서점이 멋져서 더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서점에 들어서자마자 받은 첫인상은 아늑함이었다. 여기 어딘가에 난로가 있나 싶을 정도로 따사로운 기분이었다. 책방 안으로 발을 내딛자 목재 바닥이 삐걱댄다. 교실 바닥 이후로 오랜만에 밟아본 바닥이다. 사방에 목재 책장과 테이블도 아늑한 분위기에 한 몫한 것 같다. 책들이 겉멋 없이 정직하게 진열된 것도 어딘가 신뢰가 간다.
이 곳은 책을 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리에 앉아서도 책을 읽을 수 있고 독서와 함께 곁들일 커피와 와플을 판다. 구글 리뷰를 찾아보니 이미 다녀간 사람들 평이 하나같이 좋다. 서점 주인마저 한없이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어 이 분위기의 일부가 되었다.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셨던 나는 할머니 손에 자랐다. 대낮에 먹구름이 몰려들고 우르르 쾅쾅 천둥 번개가 치면 할머니방으로 쪼르르 달려가 검붉은 담요 안에 몸을 웅크리곤 했다. 담요 속 할머니의 물컹한 품 안에 내 몸을 밀어 넣고 안정을 찾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강아지를 달래듯 나의 성긴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하셨다. 그럼 혈중 온도가 데워진 듯 포근함이 밀려와 솔솔 잠이 왔던 기억. 아이슬란드의 서점에서 어린 날의 온기가 떠올랐던건 왜일까.
어쩌면 1년의 절반이 겨울인, 해는 극히 짧아지고 수시로 우지끈 부는 강풍과 나부끼는 폭설에 모든 액티비티가 통제되는 날, 유일하게 살아남는 일은
‘독서’ 일지 모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 오는 날 만화책과 새콤달콤한 귤이 그리운 것처럼, 궂은 날씨가 잩은 아이슬란드인에게 동네 책방에서 책을 읽는 건 ‘할머니의 담요’ 같은 게 아닐까 하고.
서점 내부를 찬찬히 살펴보다 우리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아이슬란드 알파벳이 표기된 엽서였다. 국민들의 유별난 모국어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인들 대부분이 영어를 잘하지만 외국에서 고유명사로 들어온 물건들의 외래어 명칭도 신중히 들여오는 데다가 토종 언어로 표기할 방법을 먼저 궁리한다고 한다. 어쩐지 외래어가 넘쳐나는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것 같다. 고대부터 내려온 아이슬란드어 문법과 표현은 서기 900년쯤부터 그대로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어 언어 상의 화석이라 불린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글이 생기기 전인 신라시대의 언어가 유지되는 것과 같다. 천년 후의 실정으로 본다 하더라도 한글 소설 가운데 유려함을 자랑하는 조선 후기 김만중의 <구운몽>에 쓰인 한글 문법과 표현을 그대로 보존해온 것이나 다름없다니 더욱 놀랍다.
아까부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릴 지켜보고 계셨던 주인에게 엽서의 뜻을 물어보니, 영어로 mind(마음), faith(신념), kindness(친절) 세 단어의 조합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저 멋들어진 암호 같았는데 속뜻을 알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진다. 참 겉도 속도 예쁜 단어들이다. 아이슬란드인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자긍심과 낙천성이 동시에 느껴진다.
*이 엽서는 뒷면에 sophia의 한글 편지가 담긴 채로 다시 내게 돌아왔기에 더 의미가 크다.
하루 종일 서점에 머물고 싶었지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첫 번째 행선지 셀야란드포스
(Seljalandfoss)로 발길을 돌렸다. 한 시간 남짓 운전했을까. 저 멀리 뻥 뚫린 시야에 시원한 물줄기가 들어오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니 폭포 비가 쏟아져 그 광대함을 실감케 한다. (이 곳에서 우비는 필수다!) 용기를 내어 폭포 안으로 근접해 가니 무지개가 영롱하게 우릴 비춰주었다.
어쩐지 날씨가 험난해 한번은 곤경을 겪는다는 이 곳 아이슬란드에서 만난 무지개는 우리에게 행운의 부적처럼 느껴졌다.
*무지개 부적을 만난 이후로 우리는 강풍, 폭우, 추위 등 날씨의 심술로부터 비껴갔다.
셀야란드포스는 폭포의 뒤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는 어마어마한 체험을 해볼 수 있는 곳이다. 아니나 다를까 진가는 다름 아닌 폭포 뒷면에 있었다. 뒤에서 역으로 일렁이는 폭포수를 보았을 때 물결이 빚어낸 무늬와 그 사이사이로 비추는 아이슬란드의 대평원은 새롭게 아름다웠다. 집 안에서 창문 커튼 너머 비치는 바깥 풍경이 환영(illusion)같이 아련해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