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생에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알람 소리를 듣는다. 비몽사몽 정신이 든다. 아침을 알리는 빛이 커튼 사이로 새어들었음을 본다. 몸을 일으키려니 온 몸이 두드려 맞은 것처럼 피곤하다. 아 회사 가야 할 텐데. 몇 시지? 불길함이 엄습한다. 핸드폰 시계를 본 순간 오늘은 토요일 아침임을 깨닫는다. 직장인 10년 차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저녁형 인간인 건 불치 기질이라 아침에 개운하게 눈을 뜨기 어렵다. 게다가 육신에는 평일의 피로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 몸을 이끌고 주섬주섬 수영복을 챙긴다. 그렇게 동네 수영장에 간다. 물에 입수할 때 아찔하게 몸을 감싸는 차가운 청량함이 잠을 깨운다. 움직일 때 팔다리가 만들어내는 물살과 흐름, 스트로크를 할 때 나를 에워싸는 기포들을 느끼며 50분을 주행한다. 자유수영이 끝나고 샤워하고 나오는 길은 신기할 정도로 가뿐하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메리카노 하나 물고, 요즘 꽂힌 음악을 들으며 돌아가는 길은 평범한 동네 길목임에도 아름다워 보인다. 핸드폰을 꺼내 동네 느티나무에 서린 햇빛을 담고 싶어진다. 잔잔한 꽃과 풀이 피어있는 단독 주택들을 유독 찍어댄다. 서걱서걱한 너의 말소리를 듣고 싶어진다. 주말의 시작이 수영이 되는 일은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어쩐지 이국의 수영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뛴다. 수영장이 딸린 집은 모두의 로망일 수 있겠지만 나에게 수영장이란 건 더 각별하다. 옥상 루프탑에 하늘과 맞닿아 있는 혹은 지상에 야자수를 드리우고 있는 야외 수영장, 통유리창으로 그린그린한 자연이 보이는 실내 수영장에 떠있거나 가볍게 평영을 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온화하다. 썬비치에 누워 차가운 맥주를 마시거나 책을 읽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호사스러운 평온한 장면이다. 물론 바닷가 해수욕장이나 호숫가에서도 수영할 수 있지만, 오직 인공의 수영장만이 내는 싱그러움과 여유가 있다. 저명한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수영장 연작들에서 왜 수영장에 주목했을까. 다이빙한 직후의 분출하는 물살, 오후의 빛과 달빛이 자아내는 물결 모양은 자연을 따온 인공 건축물의 고즈넉함과 싱싱한 에너지를 보여준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Bigger spalsh>와 프랑소와 오종의 영화 <Swimming pool>도 수영장이 메인 소재다. 수영장에서 오후의 햇살을 즐기고 저녁 파티를 여는 등장인물들은 자유분방하고 거침없어 보이며 영화의 리듬은 경쾌하다. 바스티앙 비베스의 그래픽노블 <염소의 맛>은 실내 수영장에서 만나게 된 남녀를 그린다. 수영장에서 우연히 말을 섞게 된 그들이 이렇다 할 사건 없이 오직 수영을 통해 교감한다. 대화와 사건을 배제하고 물안경의 흐린 시야, 떠있을 때의 감각, 팔과 호흡 동작, 턴을 정물의 컷으로 그려 그 정밀한 감각과 정서를 세밀하게 담았다. 수영하는 사람만이 느끼는 특유의 동질감이다. 그렇다. 내가 현생에서 하나를 가질 수 있다면 너른 야외 수영장을 갖고 싶다.
그러나 어린 날 수영에 관한 기억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 어린이 수영강좌에 갔다. 발차기를 배우던 중 다리로 첨벙첨벙하던 나에게 무릎을 구부린다며 내 양다리를 쥐고 옆 레인으로 던져버린 강사가 떠오른다. 그 뒤로 나는 까닭 모를 뇌수막염에 걸려 이주간 병원 신세를 졌고 한 달간 학교를 나가지 않았다. 그 뒤로 물속에서 다니는 일은 내게 정지해있었다. 그러다 중학교 정규 체육과목에 수영 수업이 있었다. 단 한 학기만 이례적으로 시도한 수영이었는데 자유형을 배워 50m를 완주하는 것이 최종 지점이었다. 어렸을 때 수영 강좌로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떠올랐지만 자유형을 마스터하겠다는 일념으로 진도를 따라갔다. 집에서조차 허공에 팔 동작을 연습하다가 어깨가 한 움큼은 넓어진 것 같았다. 수행평가는 그야말로 속도 순으로 초 단위로 점수가 매겨졌는데, 아주 어릴 때부터 수영을 배웠던 친구들은 별로 노력하지 않아 보이는데도 물개같이 수영했고 아주 빨랐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그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올바른 자세도 아닌 단지 속도로 점수를 매긴다는 건 어쩐지 불공평했고 명백한 차별이라고 느꼈다. 이상한 자괴감마저 들었다. 따지고 보면 선행학습이 올바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수영에서만큼은 뒤쳐진다는 사실이 분했던 것 같다.
성인이 된 나는 무엇을 바라 다시 수영에 매달렸는가. 인간은 물속에서 편히 유영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호흡할 수 있는 아가미도 없고 귀는 물의 깊이가 조금이라도 깊어지면 압력을 버티지 못한다. 처음 수영을 시작한 때는 물에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비롯된 이상한 습관을 마주하고 놀랐다. 수영이란 건 태아 때 엄마의 양수에서 유영했다고 해도 이족 보행을 하게 된 인간이 신의 메시지에 반하는 가학적인 행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수영을 하다 보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오로지 물과 공존하기 위한 내 몸짓에 고도로 집중하게 된다. 이때 번잡한 생각들은 말끔히 사라지고 순수한 육체만 남는다. 방금 전 회사에서 나를 날카롭게 만들었던 보고서, 끝을 모르고 나의 뇌리를 공전했던 부모님의 잔소리, 인간관계의 복잡한 감정 소모 같은 것들이 내 혈액을 돌 기회 같은걸 주지 않는다. 사사로운 번뇌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조금만 상체에 힘을 빼봐.
숨이 가빠진다고 해서 고개를 많이 돌리면 오히려 가라앉아 온몸에 힘이 들어갈 거야.
한 템포 호흡을 더디게 쉬어도 돼.
숨을 쉴 때 최대한 입을 크게 벌려 많이 쉬어.
지금 물에 빠질 것 같은 건 느낌일 뿐이야. 괜찮아. 힘을 빼면 뺄수록 앞으로 나아가질거야.
수영할 때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 수영을 하다 보면 주변의 성급한 동작들이 자주 보인다. 물에 가라앉을까 봐 상체에 힘을 주고, 숨쉬기 위해 반박자 빠른 템포로 어깨 일부까지 상체를 일으킨다. 그럴수록 하체는 가라앉게 되고, 가라앉은 몸을 인식해 더 많이 힘을 주고, 지쳐버리는 악순환이다. 머리가 물속에 있을 때 여유롭지 못하니 팔 동작은 정확하지 않고 급하게 물속으로 떨어진다. 호흡할 때나 스트로크를 할 때나 언제나 한 템포 여유로워도 된다. 힘을 빼도 가라앉지 않는다. 이를 체득하며 물에게 몸을 맡기는 것이 키포인트다. 힘을 빼면 뺄수록 얻어진다는 것, 급하면 급할수록 한 템포 여유로울 것. 이 것은 삶의 방정식에도 적용되는 가르침인 것도 같아 섬찟 놀란다.
그러나 동작을 머리로만 해석하려 하면 아무것도 되어가지 않는다. 꾸준히 반복된 연습만이, 이 원리가 자연히 육체로 스며올 때만이 열리는 경지가 있다. 어느새 절대로 되지 않을 것 같아 포기 직전이었던 동작들을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는 물에 저항하는 과정이 아니라 물의 흐름을 타는 이치임을 알게 된다. 물을 적으로 여기고, 뒤로 밀어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물이 제안하는 타이밍에 자연스럽게 몸을 태워 물을 가르는 것이다. 평영만 해도 발차기를 한 후 손동작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힘껏 발차기를 하고 정지된 자세로 상체가 표면으로 떠오를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몸이 떠오르는 신호를 받으면 그제서야 두 다리로 포물선을 그린다. 자연스레 물살이 나를 앞으로 밀어주고 있음이 느껴진다. 꾀를 부리지 않고 오로지 정자세를 연마해 이 절묘한 타이밍을 익혀가는 과정에는 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
일상에서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 힘이 들어갈 때도 나는 수영의 우아한 태도를 기억한다. 수영을 하는 내가 좋다. 그렇게 오늘도 나는 수영장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