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2. 수도 레이캬비크. 아침과 밤의 양면을 보다.
두둥. 바퀴가 멈췄다. 두 발이 레이캬비크 육지에 닿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무려 아이슬란드라니 장기 비행으로 피로한 몸에도 양 어깨에 한 줌 뽕을 넣은듯 으쓱한 기분이 되었다. 비행기 통로석을 좋아하는 나와 창가석에 앉는 sunnyi는 비행기와 케플라비크 공항 연결 통로에서 만나 초췌한 얼굴을 들이밀고 씨익 웃어보였다.
킁킁 일명 ‘북유럽 더듬이’ 예민한 촉수를 지닌 나는 처음 맞닥뜨린 공항부터 이 곳은 북유럽임을 눈치챈다. 특유의 연한색 목재로 꾸민 널찍한 공항, 렌터카 샵에 아무렇게나 놓였지만 모던함이 뿜뿜하는 커피 자판기, 시내 화장실 세면대에 무채색 사각 형태 표면에 곡선형 입체감으로 단조로움을 피한 아름다운 세정제 케이스를 보며.
아 여기도 북유럽이었어!
탄식했다. 아이슬란드라 장대한 자연을 볼 생각만 가득했는데 이게 웬 꿀이람!
왜냐하면 난 북유럽 도시들에 홀려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나의 북유럽 여행기는 2014년으로 거슬러간다. 당시엔 북유럽 인테리어가 막 한국에 도착해 인기 절정이었다. 자취할 집에 그럴듯한 트렌디한 조명이라도 둘까 온라인을 뒤지던 나는 인테리어만 검색하면 유사 북유럽 인테리어 사이트가 쏟아지는 경험을 했다. 호기심이 생겨 북유럽 국가들을 찾아보니 UN의 세계 행복지수 1-5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2018년 기준 아이슬란드는 4위다.) 말로만 들었던 소득 절반을 기꺼이 세금으로 내고 의식주 수혜를 누리는 복지국가들, 탄소 무배출과 에너지 자급자족을 위해 자전거를 밟고 풍력을 쓰는 선진 환경 국가들, 겨울엔 유난히 해가 짧고 추워 지구 북쪽의 신비한 거인 트롤이 등장하는 설화가 가득한, 멀고도 가까운 나라도 아니고 그저 대놓고 ‘먼’ 나라들. 인테리어 정보는 많아도 여행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는 것도 놀라웠다. 북유럽에 다녀온 블로그 후기 사진들을 보면 서유럽보다 단조로워 보이고 구름 낀 하늘이 대부분이라 살짝 우울해 보이는데 말야. 도대체 이 나라들 뭔데? 어떻게 하면 그렇게 행복한데? 질투와 호기심이 뒤섞인 심산으로 밟은 2014년의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가 어느새 최애 유럽 도시가 되어 작년 덴마크와 스웨덴을 한번 더 밟게 되었던 것이다.
코펜하겐을 비롯한 헬싱키, 스톡홀름, 오슬로의 매력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있고 내부에는 금붙이가 다닥다닥 붙어있는 휘황찬란한 성당을 그대로 복원한 것도, 세계적인 전통 회화 컬렉션을 보유해서도 아니다. 주요 관광지의 화려함엔 당연히 로마, 베니스, 파리를 따라갈 수 없다. 그보다는 아기자기하게 색감을 맞춘 조경을 자랑하는 도심 곳곳에 정원, 조도가 밝지도 어둡지도 않게 적당하며 기하학적으로 아름다운 조명, 안온한 표정의 사람들과 silent zone을 가진 지하철, 미술관 외벽을 회색 파스텔 필기체 하나로 완성하는 심플한 과감함, 거실과 욕실 구석구석 장착된 가구들의 단색으로 칠한 직선, 곡선형의 디자인들을 보다보면 깨닫게 된다.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들도 올블랙 패션을 자랑하는 곳- 그들은 어린 날부터, 일상 속에 디자인을 장착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레이캬비크에 입성한 다음날 아침, 우리는 끼니를 구하러 나온 승냥이처럼 구석구석 시내를 탐색했다. 흐린 날이라던 기상 정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이른 아침부터 해는 쨍쨍했고 스타일리시한 그림이 얹힌 건물 외벽이 우릴 감각적으로 들뜨게 했다. 빵 냄새가 솔솔 나는 집을 따라 올라간 문턱에는 주먹 두 개를 합친 것 만한 크로아상이 우릴 반겼다. 호기롭게 사진을 찍어도 된다고 허락해준 아리따운 점원이 물었다.
“아이슬란드엔 며칠이나 있나요?”
일주일 남짓이라고 하자
“지난주 내내 비가 내렸어요. 이번 주는 내내 sunny 해요. 당신들은 운이 좋은 거예요.”
하하. 그래서 이름 잘 짓는 게 중요한가. 점원의
대화에 여행 메이트로 sunny를 대동한 우리는 더욱 세로토닌을 주입한 듯 흥 고조가 되었다. 날씨도 여행의 중요한 팩터임을, 특히나 이 대자연 아이슬란드에선 무시 못할 소명임을 알고 있었기에.
다시 조금 오르막길을 올라서자 도시의 가장 높은 꼭대기에는 레이캬비크의 명물 교회(할그림스키르캬)가 넓은 품으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고 발걸음을 돌려 아래로 내려가자 키가 작은 건물들 사이로 바다가 반짝 고개를 내민다. 이렇게 아름답게 조성된 도시라니. 보통 감각이 아니다 이 나라.
그렇게 한산하고 평화로운 레이캬비크의 아침을 만끽하던 우리는 여행 하수처럼 미리 예약한 실프라 빙하 스노클링에 늦고 만다. 띠로리. 어떻게 지각을 극복했는지는 다음 편에서 확인해보길 바란다.
다시 이 날 저녁. 우리는 레이캬비크의 밤을 엿보기로 했다. 오후 내내 빡빡한 일정이었음에도 도시의 밤만이 내뿜는 바이브를 놓칠 수 없다. 거리에 나서자 다람쥐 새참처럼 두 볼에 비축해두었던 흥이 몰려온다. 대자연을 보러 와서도 도시가 좋은 나란 사람 어찌하리오. 토요일 밤을 맞이한 레이캬비크는 강 같은 평화였던 아침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둠칫둠칫했다. 모두 어디에 숨어있었는지 마치 하루를 방금 시작했다는 결연한 꾸밈으로 도시의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이슬란드에서 기대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음악이었다. 아이슬란드하면 대자연의 황홀함을 오롯이 추상적으로 응집시킨 음악이 아닌가. sigur ros를 탄생시킨 그곳의 음악을 듣고, 이에 이끌려 몸이 들썩거리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일단 명성이 자자한 클럽과 bar들은 모두 만석이었고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반면 국내 블로그 정보를 믿고 찾아간 bar는 텅텅 비어있었다. 최종적으로 우리가 택한 곳은 우연찮게 발견한 숙소 근처 허름한 bar. 역시 여행지는 즉흥적으로 골라가는 게 제 맛이다. 레게 머리를 한 흑인 디제이가 일렉트로닉을 자기 입맛에 변주한 음악들로 선곡을 하고 쿨하게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다시 선곡을 했다. 열기만큼은 웬만한 클럽 못지않은 곳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들어간 bar에서 우리는 앉은 채로 자진방아를 돌리며 리듬을 맞췄다. sophia와 나는 서로 춤추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자연스레 음악에 몸을 내맡겼고 그 모습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우리가 평소에 듣는 국내 가요는 비슷한 인디 계열들이고 사전에 GMF와 dassut의 콘서트를 다니며 서로의 취향과 흥을 확인했으므로.
한 구석에 동양인들이 어깨춤을 추는 게 신기했던지 레게머리 디제이가 우리 곁에 와서 어깨동무를 하며 말을 걸었다.
“헤이 프렌즈. 어디에서 왔니?”
우린 서울이라고 했고, 그는 서울에 와본 적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그는 일본에 머물렀고 서울은 경유 도시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도 우리 여행 첫날 일과의 마지막을 장식한 고마운 stranger인 것을.
“Bon voyage!”
조그만 bar의 디제이가 전한 인사를 들으며 레이캬비크의 밤은 익어갔다.
그렇게 레이캬비크의 아침과 밤의 양면을 확인한 날, 모두 다 어두워지지 않는 백야에 가까운 새벽, 아침의 빛을 품은 레이캬비크의 새벽 공기를 마시며 우리는 귀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