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본다'
옛날,
아주 훌륭한 가르침을 전하는 한 현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에게 제자가 되고 싶다는 두 남자가 찾아왔다.
현자는 그들에게 닭을 하나씩 쥐여주며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가서 이 닭을 죽이고 오너라.
그렇게 닭을 죽이고 온 단 한 사람만,
제자로 받아들이겠다.
첫 번째 남자는 곧장 숲 속으로 들어갔다.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자,
닭의 목을 치고 곧장 돌아왔다.
그는 말했다.
현자님, 아무도 없었습니다.
두 번째 남자는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의 품에는 아직도 닭이 살아 있었다.
현자가 물었다.
왜 아직 죽이지 않았느냐.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온종일 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사람이 전혀 없는 곳을 발견했지요.
그런데 그 순간, 닭과 제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습니다.
저를 보고 있는 건 바로 저였습니다.
어디를 가든, 제가 저를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곳은 없었습니다.
저는 늘 저 자신과 함께 있었으니까요.
그 말을 들은 현자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진정한 제자는 너다.
신독은 혼자 있을 때의 태도를 뜻한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조차 나를 지키는 것,
그것이 인격이며, 그것이 곧 도다.
중용은 말한다.
군자는 그 은밀한 곳을 삼간다.
세상의 시선보다 더 깊고 예리한 눈,
그것은 바로 내 안의 눈이다.
타인과 마주하는 시간은 유한하다.
그러나 내면에서 나와 마주하는 시간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외부를 향할 땐 늘 무언가로 포장된다.
역할이든, 표정, 언어, 작은 행동들까지도 바꾸고, 의미를 조절한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는 시간이다.
그 두 시간은 전혀 다르다.
하나는 세상이 보는 나,
다른 하나는 내가 아는 나,
나만이 볼 수 있는 세상,
나. 그리고 결국,
그 둘의 간극이 클수록
인간은 힘들고 지쳐간다.
혼자만 알고 있는 일이라도
그 일이 부끄러운 일이라면
고요 속에서도 죄책감에 시달려
시끄럽고 요란한 마음속을 살게 된다.
누가 욕하지 않아도 스스로를 욕하고,
감옥에 가두지 않아도 스스로를 가둬 버린다.
벌을 주지 않아도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서
죄를 단죄받는다.
남은 몰라도 나는 안다.
내가 어떤 짓을 했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그 기억은 잊히지 않는다.
겉으론 웃고 살아가도,
양심의 그림자는 늘 마음 어딘가를 더럽힌다.
그게 죄책감이고, 그게 자책이고, 그게 진짜 형벌이다.
그러니 설령 지금까지
누구보다 나 자신을 속이며 살아왔다 해도
지금부터라도 멈춰야 한다.
세상을 속일 수는 있어도
나를 속일 수는 없다.
나는 언제나, 나를 지켜보고 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진짜 괴로움이 어디서 시작되는지도 알게 된다.
나를 속인 대가는,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가 치르게 된다는 것을.
그러므로 이제라도,
내 눈앞에,
내 마음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
신독은
스스로가 자신을 지켜주는
가장 좋은 비책이다.
외부의 시선이 없는 그 순간에도
혼자 있는 시간을 삼갈 줄 아는 태도는
내 마음을 지키고
내 삶을 무너지지 않게 해주는
가장 고요하고, 가장 단단한 수련이다.
군자는 보이지 않는 곳,
들리지 않는 곳에서도, 스스로를 조심한다.
왜냐하면 숨겨진 것이 더 잘 보이고,
미세한 것이 더 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군자는 혼자 있을 때 더욱 삼간다.
중용 1장 제7절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