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게으름

두 번째 조각

칙칙한 도시에 추적추적 장맛비가 내리자 끈적한 공기가 온몸을 휘감아 오른다.

건물 밖으로 내쫓긴 에어컨 실외기들은 뜨끈한 황색 열기를 토해낸다.

차도 옆 하수구에서는 습하고 구릿한 온기가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걸을 때마다 차박차박 신발에서 튕겨 오른 검은 물방울들이 자살골마냥 내 발끝으로 돌아와 엄지발가락을 핥아댄다.

축축해진 발가락들 사이사이 먼지와 모래알들이 자글거린다.

욕심 사납게 바닥에 고인 구정물을 들이킨 청바지는 배가 불렀는지 축 늘어져 운동화 뒤축에 자꾸 씹힌다.

허리춤을 치켜 올려보지만, 우산이 미처 가리지 못한 팔뚝에 빗물이 튀어 미끄덩거리기 시작했다.

시장 좌판에 깔린 생선들의 허연 배때기처럼 번들거리는 비린내가 나는 듯하다.


땀에 젖은 미적지근한 등판이 자꾸 뒤를 잡아채고 목덜미에 들러붙은 잔머리들은 실지렁이마냥 꿈틀거린다.

레드로드에서 늘상 들리는 뜻 모를 외국어들이 귓가에 경적처럼 울린다.

지나가는 사람의 뜨뜻 미끄덩한 살갗이 스치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진다.


이런 날 산책이라니. 최악이고 죄악이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 젖어버린 나를 껍질 채 벗어 빨래통에 던져넣고 보드랍고 보송보송한 몸이 되자 비로소 살 것 같다.

발가락은 축축하지 않고 사이사이에서 신경을 긁어대던 먼지 알갱이도 없다.

에어컨 바람이 길거리부터 나를 괴롭혔던 누런 습기를 살라 먹자 숨통이 좀 트인다.

가지런히 배 위에 손을 모으고 소파에 누워 눈을 감으며 노랫말처럼 맨발로 기억을 거닐어본다.

황금빛 햇살이 줄기줄기 드리워진 기억 속 바닷가.

백사장을 맨발로 내디디면 발가락 사이로 따스하게 차오르던 금빛 충족감.

손아귀에 느껴지는 아이의 보드랍고 작은 손.

우리는 그렇게 손을 꼭 잡고 파도가 백사장을 쓸어가며 혹시나 선물처럼 바다 유리를 놓고 가지 않았을까 열심히 찾았더랬다.


아이의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색색의 바다 유리들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결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바다로부터 밀려 나온 해초며 그물 잔해들, 스티로폼과 각양의 잡동사니들이 물결을 그리는 파도의 끝자락을 찬찬히 살피다 보면 한 번씩 바다 유리가 보인다.

너무 빨리 발견된 바다 유리는 특유의 반짝이는 투명한 재질감이 살아있기도 하고, 깨져나간 끄트머리가 날카롭기도 하다.

아직 고통의 기억이 선연해 ‘이 또한 감사한 일이었다’며 추억하기에는 너무 날 것인 조각들.

이런 것들은 힘껏 던져 파도를 넘어 바다로 돌려보낸다.

바다야 잘 부탁해, 더 많이 굴리고 굴려 아름다운 바다 유리로 만들어 주렴.

헌 집 줄 테니 새 집 달라는 두꺼비네 악덕 계약자처럼 쓰레기를 주며 보물로 돌려달라 몰염치한 부탁을 내밀었는데도 바다는 하나 싫은 기색 없이 받아들인다.


어느 하나 같은 모양, 같은 색이 없는 바다 유리들을 손바닥 위에 늘어놓고 딸과 머리맞대어 이건 무슨 병이었을까 고민해 본다.

초록색 바다 유리들은 아마도 사이다병, 혹은 소주병이었을 것이다.

갈색은 분명히 맥주병이었을 테고, 하얀색은 아마도 환타 같은 유리병들이었겠지.

딸아이는 보라색 바다 유리를 찾고 싶어 했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

다음에 바다에 가면 꼭 보라색 바다 유리를 찾아야지.


그렇게 파도가 남기고 간 낙서들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길고 긴 백사장의 끝에 다다라있다.

그러면 오늘의 바다 유리 채집은 끝.

우리의 산책도 여기까지.

산적한 집안일들을 모르는 척하고 소파에 가만히 누워 펼쳐놓았던 나의 황금빛 게으름도 다시 접어들여야 할 시간이다.


그래야 불쾌한 바깥 날씨에 시달리며 들어올 남편도 아이도 나처럼 황금빛 게으름을 즐길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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