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안경

세 번째 조각

by 시골쥐의 풀방구리

그럼 엄마는 칠리가 보이지 않아요?


보이지. 보이는데, 민하가 보는 것과는 다른 모습으로 보여.

칠리가 말하고 움직이고 노래하는 게 엄마한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아.

그냥 엄마에게는 가만히 있는 것만 보여.


왜요?


안경 때문인가 봐.

엄마가 민하처럼 안경을 쓰지 않았을 때는 엄마도 그런 게 보이고 들렸는데,

이제는 안보이고 안 들려.

동그란 나무토막에서 곰실곰실 달팽이의 얼굴과 뿔이 돋아나와 기어 다녀서

너희 삼촌과 달팽이 경주도 하고 그랬는데.

길섶에 숨겨져 있는 보물도 많이 발견했었어. 그런데 이제는 안 보이네.


엄마 안경 벗어요.


음…. 엄마는 이제는 안경을 벗으면 아무것도 안 보여.

너무 흐리게 보여서 안경이 없으면 살 수가 없어.

잘 때만 안경을 벗을 수 있어.

그래서 가끔 꿈에서는 오랜 친구들이 보이기도 해.

엄마도 민하가 보는 것들을 보고 싶은데.

민하가 엄마한테 이야기해줘. 그러면 밤에 꿈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알았어요!


그리고 딸아이는 나에게 분홍색 수수깡으로 새로운 안경을 만들어 주었다.





만화 인사이드 아웃에 나온 아이들의 상상 친구 빙봉은 코끼리 몸과 코, 너구리의 꼬리를 가지고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낸다.

오리너구리처럼 코끼리너구리고양이랄까.

거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분홍 솜사탕. 분홍솜사탕코끼리너구리고양이인 셈이다.

수많은 인형을 선물해봤으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딸아이는 다섯 살 되던 해, 이웃집 책장 구석에 처박혀있던 하마 인형을 얻어와 칠리라고 부르며 사랑하기 시작했다.

비록 나는 살아있는 칠리를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오 년동안 세 번이나 그의 개복수술을 집도하여 죽은 솜을 꺼내고 폭신한 산 솜으로 교체해줬다.

사랑스럽게볼품없는회색하마까만눈칠리.

부디 오랫동안 내 사랑하는 작은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