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조각
“엄마 나는 멸종위기종이야.” 뜬금없이 딸이 말했다.
환경 얘긴가.
인간이 멸종위기에 도달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 싶어 “그래?”하고 관심을 보이니 “어. 나는 하나밖에 없잖아. 그러니까 나는 멸종위기종이야. 엄마도 멸종위기종이야.”란다.
멸종위기종이라는 말을 어디서 듣기는 했는데 대충 배워온 것 같다.
“멸“종”이잖아, 종이 멸망하는 거야. 생물의 분류가 종속과목강문계이고 아무리 종이 최소단위라 한들 남민하 너보다는 범위가 넓어, 종이란 말이야….”하고 말하고 싶어서 입술이 달싹거리는 것을 간신히 참는다.
딸은 아빠에게 가서도 멸종위기를 선포하더니 다시 내게 와 “엄마, 현재는 멸종위기종이야”란다.
현재는 계속해서 없어지고 있으므로 멸종위기종이란다.
“그 멸종위기종인 현재를 사실 엄마가 많이 잡아 죽였어. 대량학살을 했지.”라고 말하고 싶어서 또 입술이 간질거린다.
지금 이 순간도 나의 현재가 계속해서 죽어 나가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댔는데, 내가 구국의 영웅이었다면 어땠을까.
전군 전진하라!!! 하고 달려나가는 내 주위로 수많은 현재가 초개처럼 목숨을 던져가며 “대장! 함께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희가 길을 열 테니 부디 뜻한 바를 이루소서!!”하고 피를 토하며 죽어갔을지도 모른다.
혹은 세기의 사랑을 하는 로맨티시스트였더라면 “수현, 나는 너를 만나 행복했어. 이제는 네가 그 사람과 행복해지길 바라”하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죽었겠지.
혹은 암흑가의 보스였다면, “거 딱 죽기 좋은 날이군” 하며 시가 연기처럼 사그라들 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안수현 씨의 현재는 인스타 릴스를 보면서 증발하였고, 소파에 누워서 낮잠을 자다가도 쓸려나갔고, 설거지가 하기 싫다며 방에서 뒹굴며 발악하는 몸뚱이에 깔려 죽어 나갔다.
어떻게 보더라도 여러분의 죽음을 의미 있다 하기는 힘들겠습니다. 미안합니다.
“내 죽음이 개죽음이라니! 이렇게 죽을 순 없어!”하는 현재의 분노 섞인 비명이 들릴 것만 같다.
약간의 미안함을 느끼며 온몸에 약 먹은 개미 떼처럼 붙어있는 현재의 시신들을 툭툭 떨어낸다.
자그마한 산처럼 쌓인 현재의 시신들을 한가운데 모아놓고 보고 있자니, 이 작은 더미만큼 내가 없어진 것 같다.
깨어진 유리병에 담긴 모래알들이 흩날리며 빠져나가듯, 탯줄을 자르며 생긴 그 구멍으로 내게 주어진 현재들이 새어나가고 있다.
현재의 잔고가 얼마인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지만 그건 아무도 모르니까.
흥청망청 써재끼며 러시안룰렛을 돌리는 도박사가 되어볼까.
혹은 스크루지처럼 아까워하며 흩날리는 모래알들을 부질없이 잡고자 애써야 할까.
태어난 그 순간부터 꾸준히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깨달아지며 나름 뭐라도 꾸준히 한 게 있구나, 나 제법 부지런했구나 싶어 대견할 지경이다.
멸종위기종 안수현.
현재를 뿌려가며 죽음을 향해 달리는 것이 삶이라니.
빨간 정지신호라도 띄워 잠시라도 이 길을 늦춰주면 좋겠건만, 안타깝게도 모든 신호등은 청신호.
직진, 직진입니다.
무엇도 당신의 질주를 막을 수 없습니다.
현재의 흐름이 멀미 날 것만 같아 가만히 책상에 앉아 생각해본다.
명예로운 죽음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현재를 떠나보내야 그 죽음이 호상이 될 것인가.
말랑콩떡같은 딸의 볼을 주무르며 세상을 떠난 현재들은 얼마나 만족스러웠을까.
피곤하다고 쟁쟁거리는 아이를 팔베개해주고 잠든 속눈썹을 구경하며 떠난 현재들 역시 여한이 없겠지.
남편과 손깍지 끼고 펑펑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산책나갔던 날의 현재들은 우리의 체온에 달콤하게 녹아 사라졌을거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으며 생각을 곁들여 한 장 한 장 갈피갈피 껴놓은 현재들은 그렇게 바싹 말라가는 자신을 뿌듯해할 테다.
부모님께 쓰는 사랑도, 남미와 아프리카에 있는 후원 어린이들에게 보내는 축복도 모두 만족스러운 현재들이다.
갓생을 살겠다며 부지런 떠는 인물은 되지 못하기에 모든 현재들에게 의미 있는 죽음을 주지야 못하겠지만, 되도록 호상을 안겨줘야겠다.
그래야 그 현재들의 종말에 따라올 나의 장례가 평안할 것 같다.
하지만 지금 당장 저 쌓여있는 설거지가 문제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현재를 희생시켜야 저 대업을 이룰 수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으니 큰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