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조각
요즘은 세후 소득을 이야기하지 않고, 카후 소득-전월 카드값을 내고 난 후의 소득-을 이야기 한다지. 마침 오늘은 카드값이 나가는 날이라 잔돈푼이 짤랑거리는 계좌를 보고 있자니, 문득 신혼 초 받았던 보이스 피싱 전화가 생각난다.
참 신기하게도 보이스피싱은 경황이 없을 때 온다. 마치 알았다는 듯이.
나와 남편이 전화를 받았던 것은, 급작스레 할머니의 소천 소식을 듣고 장례를 치른 후 장지에서 막 돌아와 쉬려던 때였다. 평소 나는 보이스피싱 같은 것에 절대 당할리 없다고 자신해 왔는데 어이없게도 당하더라. 그리고 그 당시로서 좀 새로운 수법이었다. 지금에야 익숙히 알려진 방법이지만.
정확히는 내가 아닌 남편에게 전화가 왔고, 나도 함께 있었다. 전화 상의 남성은 완벽한 한국어를 구사하고 있었고 그 어디에도 연변 사투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어디어디지부 소속 검찰 수사관이라 소개한 전화상의 남성은 빠르고 확고한 목소리로 남편의 신상정보를 확인 후,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사용되었다고 알려주었다. 이쯤 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남편은 스피커폰으로 나도 함께 듣게 해 주었다. 그러면서 @@@씨를 아냐고 물어봤다.
“아뇨 모릅니다만.. ”
“농협 통장이 있으신가요?”
가슴이 철렁했다. 마침 남편은 학자금 대출을 갚아나가던 중이었기에 농협 통장이 있었다. 남편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수사관은 “농협 통장에 잔고가 얼마나 있습니까?”라고 심각한 목소리로 물어봤다.
남편은 조심스럽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한 통장이라 평소에 잔고가 있진 않습니다."
평소 잘 안 쓰는 계좌라 대포통장으로 쓰였나 보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르고 있었나 봐요 하고 나는 남편만 들리게 속삭였다.
그러자 수사관은 “혹시 다른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을지 모르니 타 은행의 계좌와 잔액을 알려주십시오. 하나도 빼지 말고”라고 명령했다.
다행히도 그 질문에 답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확실하진 않은데, 신한은행 계좌에 한 5만 원 정도가 있습니다."
상대는 한 오초쯤 침묵하더니 "5만 원이 전부입니까?"하고 되물어왔다.
우리는 틀림없는 수사관님이라 믿고 있었기에, 최선을 다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자 “네 아마 5만 몇천 원쯤 있을 겁니다”라고 신중하게 대답을 했다.
당시 남편은 결혼 후, 모든 통장과 돈을 나한테 맡겼기에 모든 현금은 모두 내 명의로 되어있었고, 남편은 그냥 용돈정도 본인 카드에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는 유학준비를 하며 직장을 다 관둔 때여서 돈도 없었다. 게다가 남편은 성직 자니까-심지어 목사도 아니라 세속적으로 따지자면 수습 내지는 인턴에 가까운 전도사였으니까!- 우리는 한층 더 돈이 없을 수밖에. 그래도 저 5만 원은 무려 남편의 한 달 용돈이었다.
여하튼 이런 구구절절한 사연을 남편이 간략하게 설명하자, 상대방은 잠시 침묵 후 “알겠습니다”하더니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렇게 다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고 우리는 순진하게도 대포통장으로 쓰였을 농협통장을 간간히 걱정하며 며칠이 지나갔다.
그러다 한 인터넷 기사를 통해 우리가 받았던 전화가 신종 보이스 피싱 수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남편 통장에 돈이 더 있었으면, 가짜로 만든 검찰청 페이지에 접속하게 유도해서 계좌정보를 입력하게끔 하여 통장의 돈을 빼가는 수법이었다.
지금도 가끔 궁금하다. 그때 그 보이스 피싱범은 왜 우리를 포기했을까. 통장에 다해봐야 꼴랑 잔고가 5만 원 밖에 없는 우리 남편이 불쌍해서 그냥 봐준 걸까. 우리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만큼 수사관님을 신뢰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우리는 그의 입장에서 보이스피싱을 하기에 가성비가 맞지 않는 피해자였지 싶다. 이미 투자한 통화시간과 노력을 날리더라도, 거기서 그만두고 다른 사기금액이 큰 피해자를 찾는 편이 낫겠다는 계산을 했겠지. 왜, 낚시도 너무 잔챙이가 걸리면 도로 놔주지 않던가.
돌이켜보면 그 보이스피싱범이 우리에게 매긴 이 신용평가등급이야 말로, 그 어떤 은행이 우리에게 부과한 등급보다도 가장 정확하고도 신랄한 평가였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보이스피싱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쩌면, 보이스피싱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것이 아닐까.
보이스피싱범조차도 우리에게 그런 온정(?)을 보였는데 이놈의 카드사는 어쩜 이다지도 냉혹하게 계좌를 쓸어간 건가 잔고를 보며 구슬픈 생각해 보는 겨울 저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