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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05. 2024

엄마, 나는 흉터가 소중해.

"아고, 우리 봄이 온몸이 흉터네. 봄이 흉터들 보니까 엄마가 속상하다."

"엄마, 나 여기 턱에 흉터가 제일 크지?"

"그래, 거기가 제일 선명하긴 하지. 다른 흉터들은 다 옅어질 것 같은데, 턱에 흉터는 커서도 남아 있을 것 같아."

"엄마, 근데 나는 흉터가 소중한데?"

"왜? 왜 흉터가 소중해? 보기 싫거나 속상하지 않아?"

"아니야, 엄마. 흉터가 있으면 볼 때마다 '아, 다음에는 그렇게 위험한 행동하지 않아야지.' 생각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속상할 필요가 없지."

"세상에. 맞아. 맞다. 정말. 흉터는 소중한 거네."


뛰어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은, 여섯 살 난 둘째 딸을 씻기다 보면 숱한 상처와 오래 묵은 흉터들을 마주하게 된다. 거침없이 높은 곳에 오르고, 숲을 달리고, 모래사장과 흙바닥에 주저앉아 종일 땅을 파는 딸에게 상처가 없기를 바라는 건 욕심임을 안다. 그래도 엄마 된 마음에 깊은 상처가 결국 흉터로 남은 것을 보면 속이 상한다. 그중에서도 돌 무렵 생긴 턱의 흉터는 생각만 해도 아찔한 사고의 흔적이다.

 

식탁 의자에 서서 첫째와 장난을 치고 놀던 둘째가 의자에서 툭, 떨어졌다. 내가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아무런 대처를 할 수 없을 만큼 사고는 순간이었다. 서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떨어지면서 식탁 모서리에 턱을 찍었는데, 당시에는 그렇게 깊은 상처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턱 부분에 일 자로 피가 맺혔지만 육안으로 보았을 때 찢어졌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피가 고여있었을 뿐 흐르지도 않았다. 주말 늦은 밤이었고 생각보다 아이가 빨리 진정하고 음식을 먹는 데도 이상이 없어서 응급실에 갈 생각은 안 했다. 연고를 발라주면 아물겠거니 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오래갔다. 주말이 지나고 소아과에 가서 보였을 때에도 크게 찢어진 것도 아니니 연고만 꾸준히 발라주라고 했는데, 결국 그날의 흔적은 흉터로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그 흉터가 대표적이긴 하지만, 딸의 몸 곳곳에는 어디서 생겼는지도 알 수 없는 상처들이 숱하다. 그중에 몇은 옅어질지언정 사라지지 않을 흉터가 되어가고 있다. 잊고 있다가도 눈에 띄기만 하면 괜히 마음이 아리던 흉터들. 그런데 딸이 '흉터가 소중해'라고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네, 정말 그렇다. 흉터는 소중하다. 흉터를 볼 때마다 아팠던 순간들이 떠오르지만,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할 수 있고, 같은 사고를 두 번 겪지 않으려 조심할 수 있다. 겨우 여섯 살 아가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멋진 여섯 살 언니로 자랐다니.


흉터(네이이라 와히드)

흉터가 되라.
어떤 것을 살아낸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 <마음챙김의 시>(류시화 엮음) 중


흉터는 어떤 것을 살아낸 흔적이다. 마흔이 넘고 보니, 몸과 마음 여기저기에 꽤 많은 흉터가 있다. 어떤 흉터는 왜 이런 곳에 이런 흉터가 생겼는지 기억조차 아득하고, 어떤 흉터는 여전히 마주하고 싶지 않을 만큼 생생하게 아리다. 아직은 선명한 생채기이지만, 곧 흉터로 남을 상처들을 볼 때면 하루빨리 시간이 흘렀으면 싶기도 하다.


오늘 딸의 ‘흉터는 소중해!'라는 말을 들으며, 내가 살아낸 흔적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한다. 어떤 흉터도 미워하지 않기를. 살아온 모든 순간에 최선을 다했기에 상처도 입었을 것이다. 주저하고 머뭇거렸다면, 조심하고 피했다면 덜 다치고 덜 상처 입었겠지. 주저 없이 뛰어들고, 머뭇거리지 않고 움직이고, 상처 입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많은 흉터를 품은 내가 되었겠지.


흉터는 소중하다.


딸, 정말 고마워. 네 덕에 엄마는 오늘도 조금 더 나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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