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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n 20. 2024

흘러가다 멈춘 오늘, 다시 편지를 씁니다.

피렌체를 떠올리며.

To. 밀라노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우리가 <쓰다 보면 보이는 것들>을 함께 쓰고 홍보하던 때 이후로 이렇게 자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지낸 적이 있었나 싶어요. 먼 밀라노에서도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나의 안녕을 기원해 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도 감사한 날들입니다.


잘 흘러가고 있느냐는 작가님의 질문에,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러하다고 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요. 요즘 꽤 잘 흘러가는 중이었거든요. 작가님께 원고 관련해서 우는 소리를 하고 또 했었지만 지난 화요일, 원래 출판사와 약속했던 마감 날짜보다 2주나 앞당겨 마감을 했답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요. 원고의 질은 작가인 제가 판단할 몫은 아니라 장담할 수 없지만, 정해진 날짜를 지켜서 써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어요.


원고 마감과 동시에 그날부터 실외 걷기 시간을 줄이고, 아파트 커뮤니티의 헬스장에서 러닝머신을 뛰기 시작했어요. 날이 너무 더워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이제 걷기는 어느 정도 몸에 익은 것 같아, 조금씩 달려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고요. 5분 걷고, 5분 뛰고를 세 세트, 마무리 걷기 10분까지 총 40분을 걷고 뛰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어요. 샤워를 하고 집에 와서 냉수 한 잔을 마시면, ‘아, 지금 나 살아있다!‘ 그런 느낌에 금세 사로잡혔답니다. 그렇게 며칠을 가볍다 못해 가뿐한 날들을 보냈어요.


어젯밤에 잠을 잘 자지 못했어요. 그게 이유라면 이유였을까요. 한 시간에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나는데, 정말 고역이더군요. 러닝머신 3일 차라 몸은 고단할 대로 고단한 상태였는데 말이죠. 깰 때마다 여러 생각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내밀었고 그럴수록 다시 잠들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이 개운할 리 없었지요. 아이들이라도 좀 도와줬다면 좋았을 텐데, 오늘따라 아이들도 왜 그렇게 예민하던지. 결국에는 아침부터 두 아이와 몇 번이나 부딪히고 말았어요.


혼자 있는 낮 시간 동안에도 잠시도 몸을 놀리면 안 될 것 같아, 운동을 하고 책장 정리를 하고, 독서모임을 위한 책을 읽고, 빨래를 개고, 청소기를 돌리고, 싱크대를 닦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잠이 쏟아져서 낮잠도 조금 잤네요. 아이들이 하교, 하원을 했고 오늘은 첫째가 축구 클럽에 가는 날이라 거기 동행했다 오니 하루가 저물었더라고요. 아이들의 식사를 챙기고, 투닥거리는 두 아이와 또 한 번 씨름을 하다가 겨우 잠을 재우고 나니 늦은 밤이 되어 있었습니다.


한동안 제가 울지 못했다고 말씀드렸었나요? 마음의 우울이 깊을 때에도 이상하리만큼 눈물이 나지 않더라고요. 너무너무 울고 싶은데, 가슴에 응어리가 맺힌 기분인데, 눈물이 나지 않으니 그것도 참 괴로웠어요. 저는 원래 눈물버튼이 있던 사람이라 누가 그 버튼을 살짝만 건드려도 폭포수처럼 눈물을 쏟아내던 사람이었거든요. 그런데 눈물이 씨가 말랐는지, 울 용기조차 잃은 건지 한동안은 울지 못하는 사람으로 살았어요.


작가님께 편지를 쓰기 전, 저는 실로 오랜만에 펑펑 울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갑자기 눈물버튼에 ON 신호가 켜진 것처럼 광광 눈물이 쏟아졌어요. 막 쏟아내고 흘려버리고 나니 조금은 마음이 후련해졌어요. 역시, 흘려보내는 것이, 흘러가는 것만이 답이다 싶습니다.


며칠 전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탈리아로 놀러 오라던 말씀이 잊히질 않아요. 저에게도 이탈리아는 매우 특별한 나라이고, 그곳에는 특별한 추억을 품은 도시도 있어요. 결혼 전, 친한 친구 두 명과 이탈리아 여행을 했었습니다. 그때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이틀을 머물렀는데, 그 이틀의 기억이 너무나 특별해서 로마로 이동한 후에 혼자서 다시 피렌체를 찾아가는 용기를 냈던 적이 있어요. 아마 피렌체가 첫 여행지였다면, 이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남은 기간을 몽땅 피렌체에서 보냈을지도 몰라요. 그만큼 제게는 특별한 도시였답니다. (안타깝게도 로마가 마지막 여행지였고, 제가 로마에서 다시 피렌체로 돌아갔을 때에는 여행이 불과 이틀밖에 남지 않은 때였지만요.)


제가 피렌체로 돌아갔을 때, 하루치의 짧은 여행에 동행해 준 분이 계세요. 피렌체에서 묵었던 한인민박의 주인 분이셨어요. 당시 우리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아서 동행했던 친구들이 모두 오빠 또는 형이라고 부르던 분이었지요. 그분은 피렌체에서 이미 수년 간 살아온 분이라 피렌체의 맛집도, 아름다운 거리도, 숨은 와인 상점도 잘 아시던 분이었어요. 그때 그분의 가이드를 받으며 하루동안 다시 돌아본 피렌체는 정말 아름답고 낭만적인 도시였어요. 그 거리를 다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을 걷던 그분이, 저를 작은 성당으로 안내해 주셨어요. 피렌체에는 두오모 같은 거대한 성당도 있지만 작고 아담한 성당도 꽤 많더라고요. 그 성당에서 그분이 저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는데요. 아직도 그 말이 잊히질 않습니다.


“앞으로 살아가다가 힘들고 버거운 순간들이 오면, 오늘을 기억해. 이렇게 아름다운 날, 아름다운 피렌체의 거리를 걷던 때가 있었다고.”


작가님이 이탈리아에 놀러 오라고 말씀하시는데, 왜 잊고 살던 그 기도가 떠올랐을까요. 그때가 제가 갓 서른이 되던 때였으니, 당시에도 그 나이만이 할 수 있던 여러 고민들로 꽤 복잡한 날들을 보내고 있던 때였어요. 그 복잡함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홀연히 떠난 여행이었지요.(그 당시에는 참 절박한 고민들이었을 텐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또 이렇게 어렴풋해졌네요.) 아마 그분은 제 나이를 이미 지난 분이셨으니, 그런 제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셨던 것 같아요.


그분이 해준 기도는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저를 구한 기도가 되었어요. 사는 게 팍팍할 때마다, 발 딛고 있는 이곳이 버거울 때마다 불현듯 떠올라 저를 위로해 주더라고요. ‘그래, 내게는 그런 시간도 있었지.’라고요.


이번에도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에, 작가님께 이탈리아 이야기까지 듣다 보니 그 기도가 더 간절하게 떠올랐나 봅니다. 피렌체는 참, 저를 여러 번 살리는 도시인 것 같아요. 참… 그렇네요.


작가님의 제안처럼, 작가님이 계시는 동안 제가 용기를 내어 다시 이탈리아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제는 홀연히 떠나기에 너무 많은 것들이 몸과 마음에 걸려요. 그래도 상상해 봅니다. 작가님이 계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상상이요. 상상만으로도 벌써 우울의 무게가 조금은 덜어진 것 같아요.


작가님, 이렇게 넋두리하듯 작가님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넬 수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 오늘 밤은 누구한테라도 ‘나 힘들어.‘라고 말하고 싶은 밤이었거든요. 혹시 멜로가 체질이라는 드라마를 보셨을까요? 거기에서 남자친구의 죽음으로 힘들어하던 전여빈이 함께 사는 친구들, 천우희와 한지은에게 처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비치는 장면에서 전여빈의 대사가  ’나 힘들어. 안아줘.‘였어요. 저는 지금 ’저 힘들어요. 제 얘기 좀 들어주세요.‘ 하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씁니다.


그래도 이렇게 한껏 쓰고 나니까 좀 나아지는 것 같아요. 어차피 단시간에 해결될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지금처럼 부단히 몸과 마음을 돌보며 또 한 번 흘러가보려고요. 누가 그러더군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라고 해서 우울감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우울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요. 지금의 제가 딱 그런 것 같아요. 제 삶을 지탱해 온 자존감이라는 동아줄을 쥐고 열심히 애써보는 중인 것 같습니다.


더는 우울이 묻은 편지를 띄우고 싶지 않았는데, 요즘 제 삶이 삶인지라 자꾸 그렇게 되네요. 다음 번 편지에는 반드시 햇살을 띄워보내겠어요!(못 지킬지도 몰라요.^^;;) 아, 그런데 문득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작가님께도 제게 피렌체 같은 그런 도시가 있나요? 떠올리면 위로가 되는 그런 도시요. 작가님은 저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삶을 사신 분이라 왠지 있으실 것 같아요. 있다면 다음 편지에서 들려주실 수 있나요? 어떤 도시가 작가님의 마음에 남아 있을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밀라노의 여름은 어떤가요. 대구의 여름은, 벌써 대프리카라는 말이 실감 날 정도입니다. 아무쪼록 무더운 여름날, 작가님의 몸과 마음은 무탈하시기를.


추신. 글의 제목에 첨부한 사진은 제가 피렌체에 갔을 때 두오모 꼭대기에서 직접 찍은 사진이랍니다.  :)


From.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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