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때 선생님들이 일기장에 왜 매번 날씨를 쓰라고 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날씨가 사람의 기분에, 그날의 일과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크다는 것을 이곳 제주에서 체감하고 있다. 맑은 날과 흐린 날, 비가 오는 날과 바람이 부는 날, 그날의 날씨에 따라 여행의 하루는 얼마나 달라지는지. 오늘의 제주는 맑고 선선한 하루였고, 덕분에 마음에도 볕과 바람이 함께 드는 날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숙소는 한 달 이상 긴 기간을 살아보는 여행자들을 위한 곳이다. 최소 한 달부터 일 년 이상을 머무는 여행자들도 있다. 그렇다 보니 이곳 숙소에서는 함께 지내는 이들끼리 서로 이웃이 되고, 아이들끼리는 금세 친구가 된다. 용감한 척 하지만 사실은 겁이 많은 내가 두 아이만 데리고 먼 제주에 올 수 있었던 것은 이곳의 환경 덕분이었다. 이웃이 있어서 안전한 곳, 아이들에게 새로운 환경과 친구들을 만들어줄 수 있는 곳.
이곳에 온 지 보름이 넘도록 아이들은 친구를 만들지 않았다. 옆집에 또래들이 있었지만 남매끼리 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웠고, 매일 제주의 어딘가로 나다니기 바빴던 탓에 이곳의 장점을 활용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 어젯밤, 우연히 옆집에 사는 아이와 안면을 트고 잠깐 놀더니 오늘부터는 본격적으로 새 친구를 사귀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끼리 서로 어울려 함께 물총 놀이를 하고 캠핑 놀이를 했다. 킥보드 타기 대결을 하고 달리기 시합을 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노는 아이들을 보며, 아이들은 어쩌면 저렇게 금세 친구가 되는 걸까, 정말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형아, 이것 좀 도와줘.”
“어, 잠시만!”
“얘들아, 이것 좀 도와줄래?”
“응, 오빠 잠시만 지금 갈게!”
“형아 나도 갈게!”
친구가 된 아이들은 서로에게 도움 청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도움을 구하는 말에는 너 나 할 것 없이 도움을 주기도 했다. 어제까지 얼굴도 이름도 모르던 아이들이 친구가 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는 것이 참 부러웠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낮에 함께 놀았던 친구들과 밤에도 약속을 하고, 함께 별빛 아래서 킥보드를 타는 아이들을 보며 오늘 발견한 문장을 쓴다. ‘도움을 구하는 일은 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문장은 내가 굉장히 사랑하는 책,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 나오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도움을 구하려면 먼저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도움을 구하는 데에는 또 다른 용기를 내어야 했다. 도움을 구하는 나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모두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서지 않으면 선뜻 ‘도와줘’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도움을 구하는 일은 포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에서 이 문장을 만났을 때, ‘아!’하고 무릎을 쳤다. 나 혼자 해낼 수 없는 일을 미련하게 붙잡고 있기보다는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그것은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사실 이 문장을 만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하는 어른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어른. 도와달라고 말할 만큼 약한 사람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남들에게는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게 진짜 강한 거라고 말하면서 정작 나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못난 나란 인간…). 어떻게든 혼자 해내려고 낑낑거리다, 결국에는 포기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좀 도와줘’라고 말할 용기를 쉽게 내지 못했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아무런 고민 없이 ‘도와줘!’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나의 미련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도와달라는 한 마디에 저렇게 많은 일들이 단숨에 해결되는 것을. 혼자 들기 어려운 짐은 함께 들고, 혼자 끌기 어려운 카트는 함께 끌며, 혼자 만들기 어려운 구조물은 함께 만들면 되는 거였는데. 그러면 무엇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을 텐데.
도와줘. 포기를 거부하는 말. 아무렇지도 않게 저 말을 뱉는 아이들도 언젠가는 저 말을 마음으로 삼키며 낑낑거리는 어른이 될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그런 생각하니 괜히 코끝이 찡해진다. 학교에서 만난 십 대들 중 이미 그렇게 되어버린 아이들이 있었다. 도와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혼자 아파하던 아이들. 더는 먼저 도와주겠다는 손길마저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약해진 그 아이들이 떠오른다. 너무 빨리 도와달라는 말을 잊어버린 아이들이.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해 버리려던 아이들이.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오늘은 용기를 드리고 싶다. 지금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면, 힘들고 버거운 일을 혼자 감당하고 있다면, 잠깐 심호흡 한 번 하시고 곁에 있는 누구에게라도 ”도와줘“라고 말해보셨으면 좋겠다. 어쩌면 꽤 많은 이들이 당신의 외침에 선뜻 응답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