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뒤늦게 뱃멀미를 했던지 저녁때부터 두통이 심했다. 그동안 무리를 한 탓에 감기가 왔나 했지만, 감기라기엔 다른 증상 없이 머리만 깨질 듯이 아팠다. 아무래도 더 무리했다가는 큰 탈이 날 것 같아서 어제는 글도 쓰지 않고 9시에 아이들과 함께 잠이 들었다. 밤새 두통 때문에 몇 번 깨긴 했지만 아침이 되자 좀 나아져서 다행이다 싶었다. 두 아이를 혼자 데리고 온 여행에서 가장 최악의 상황은 보호자인 내가 아픈 것이다. 그러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내 몸은 내가 돌봐야 한다는 걸 다시 느꼈다.
이른 아침, 아이들과 10분 거리에 있는 런던베이글뮤지엄에 가서 베이글을 사 먹었다. 베이글을 처음 먹어보는 아이들도 잘 먹어서 아침부터 차를 몰고 나온 보람이 있었다. 그대로 오후까지 집에서 늘어져 놀다가 세 시가 넘어서야 김녕 미로공원에 갔다.
금방 탈출해서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자고 의지를 다지며 미로 탐험을 시작했다. 이번 미로 탐험에서 나는 철저히 빠져있겠다고 마음을 먹었기에 아이들 뒤를 따르기만 했다. 아이들은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각자의 감으로 방향을 정해 움직였다. 나는 아이들이 갔던 길을 또 가고 다시 가도 아무런 판단 없이 아이들 뒤를 묵묵히 따라 걸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30분쯤이면 탈출한다는 미로에서 50분째 헤매던 아이들은 드디어 “엄마, 너무 힘들어. 우리 그냥 포기할까?”라고 말했다. 아무리 그늘 진 곳이었다고 해도 아직 한낮 더위는 무시할 수 없었고, 같은 길을 가고 또 가던 아이들의 걸음은 이미 수천 보를 넘은 상황이었다.
“우리 지금까지 온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그래도 끝은 봐야 하지 않겠어? 엄마랑 같이 한 번 더 찾아보자! “
나도 이미 지칠 대로 지쳤지만, 아이들에게 성공 경험을 주고 싶었다. 미로에 갇혀 실패한 경험으로 기억되기보다는, 끝까지 도전해서 탈출에 성공한 경험으로 기억되기를 바랐다. 우리는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출발지에서 받았던 지도를 꺼내 찬찬히 살펴보았다. (아이들은 지도를 보지 않고 그저 자기 감만 믿었었다.) 길을 다시 잡고 오른쪽, 왼쪽을 판단해 가며 끝내 출구에 도착했다. 드디어 탈출!!!! 아이들과 나는 너무 신이 나 방방 뛰었다. 길치이자 방향치인 내가, 두 아이와 어떻게든 미로에서 탈출하겠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은 한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이들은 금방 출구를 찾았다면 얻지 못했을 성취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또 느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이른 잠자리에 들겠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지친 건 나 혼자고, 아이들은 여전히 생생해서 마당에서 또 킥보드를 타고 있다. 열 시 전에는 자려나… 하는 기대를 품고 오늘의 문장을 쓴다. ‘헤맨 만큼 크게 기뻐할 수 있다.‘ 미로를 헤매는 동안 아이들은 여러 번 포기하고 싶어 했다. 사실 나도 그랬다. 날씨도 덥고 다리도 아프고, 뭐 중요한 것도 아닌데 싶기도 하고, 그냥 입구로 다시 나가 놀이터나 가고 싶다는 말에 백 퍼센트 공감했다. 그럼에도 끝까지 갔다.
사는 동안 미로에 갇힌 기분이 드는 순간이 얼마나 많은지, 나는 안다. 가도 가도 같은 길 같고, 좀 다른 길 같다 싶으면 으레 막다른 길이고, 먼저 미로를 탈출한 사람들의 종소리가 딸랑딸랑 울리는데 내게는 도무지 나갈 길이 보이지 않고… 숨 막히는 기분. 정말 갇혀버린 기분. 그 기분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오늘의 경험에 비추어, 미로에 갇혔을 때 기억해야 할 열 가지를 정리해 본다. 내 마음대로 만들어본 미로 탈출 십계명이랄까.
1. 출발지로 되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 것
2. 지도가 있다면 지도를 먼저 살펴보고 갈 것 (없다면 갔던 길을 다시 가는 수고를 감내할 것)
3. 남들이 먼저 도착했다고 해서 초조해하지 말 것
4.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라가지 말 것
5. 끝까지 포기하지 말 것
6. 함께 걷는 이들을 믿고 마음을 맞출 것
7. 함께 가는 이와 의견이 다를 때는 충분히 토의하고 판단할 것
8. 가끔은 직감대로 행동해 볼 것
9. 함께 가는 이의 뜻대로 움직였다가 그 길이 아니더라도 상대를 원망하지 말 것
10. 오래 헤맬수록 탈출 후 기쁨이 더 크다는 사실을 잊지 말 것.
이 열 가지를 마음에 잘 새기고 있다면, 앞으로 어떤 미로를 만나더라도 좀 덜 당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는 동안 출구를 찾기 힘든 미로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가이고 기대 이상(?)이니까. 바라는 바가 있다면, 인생의 미로를 만났을 때 혼자는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물론 혼자 감당해야 할 미로도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소중한 누군가와 함께였으면 싶다. 그럼 아주 복잡하고 어두운 미로를 만난다 해도, 덜 겁내고 덜 슬퍼하며 잘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