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진아야, 포도주 한 모금도 마시고 가라잉.”
“할머니! 나 지금 학교 가요. 술 마시고 학교 가라고?”
가방을 메고 집을 나서려는 나를 붙잡는 할머니의 말에 동그래지던 내 눈.
가장 가까운 기억은 고등학생 때였다. 이전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고 단언하기 어려운 것은 첫 기억 속 할머니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해서다. 만약 내 기억이 할머니가 술을 권한 첫 기억이라면, 고등학생쯤이면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등교하는 손녀에게 술이라니?
학교 갔다 와서 먹겠다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등교하는 나를 기어이 붙잡아 포도주를 한 모금 먹였다. “대보름에 이걸 먹어야 귀가 밝아진다!”라며. 대체 얼마나 밝은 귀를 가지라고 학교 가는 학생한테 아침부터 술을 먹이나 싶었다.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아, 할머니! 쫌!” 외쳤지만, 이미 포도주는 입술을 타고 입안을 달게 물들였다. 짜증을 냈던 마음과 달리 입술에 묻은 포도주의 맛은 솔직히 꽤 달콤했다.
정월대보름은 아침부터 과식을 해야만 현관문을 열 수 있는, 대표적인 날이었다. 오곡밥, 생선, 각종 나물은 물론이고, “부럼 깨자!”라고 씩씩하게 외치며 견과류를 깨 먹어야 했고(안 외치고 먹으면 다시 깨야 했다), 귀밝이술까지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날의 의식이 끝났다. 할머니는 내가 아침밥을 먹는 내내 곁에 앉아 나물을 종류별로 다 먹었는지 확인했고, 부럼 깨자는 소리가 우렁찬지 평가했다.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싶다가도 이렇게까지 하는 할머니의 정성을 모르지 않아서 외면하기 어려웠다. 설이 지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새로 장을 보고 정성껏 재료를 손질해 그 많은 음식을 해내는 할머니의 수고로움을 외면하는 것은 어쩐지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아침부터 든든히 배를 채우고, 포도주까지 한 모금 머금은 채 집을 나서면 늦겨울 추위도 별로 매섭지 않았다.
이렇게 또 새로운 한 해가, 이내 새봄이 오겠구나 짐작했다.
여름
햇살이 흐드러지던 봄을 지나고 나면 삼복이 차례대로 돌아왔다. 초복, 중복, 말복의 순서대로. 세 번의 복날은 그리 넓지 않은 간격으로 뜨거운 여름날을 차지하고 있었다. 초복을 시작으로 중복을 거쳐 말복에 이르기까지, 우리 식구들이 매년 먹은 닭을 모두 합하면 과연 몇 마리나 될까.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 복날마다 삼계탕을 먹어야 했다. 삼복더위에, 에어컨도 없던 작은 집에서 식구들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뜨거운 삼계탕을 먹고 있자면 없던 더위도 새로이 먹을 판이었다. 그 당시 내가 가장 싫어했던 사자성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열치열이었다. 시원한 물, 시원한 수박, 시원한 아이스크림. 시원한 것을 먹고 또 먹어도 금세 몸에 열기가 돌아 후끈거리던 계절에 뜨거운 삼계탕이라니.
온갖 불만을 다 표하며 삼계탕을 후후 불어 먹었으나,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삼계탕 한 그릇을 비우면 확실히 뭔가가 달라져 있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켜 찬물에 샤워까지 하고 나면 어쩐지 온몸에 기운이 도는 게 느껴졌다. 그 시절, 몸이 약했던 내가 한 번도 더위를 먹지 않고 매년 돌아오는 여름을 무사히 보낸 것은 할머니의 삼계탕 덕분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고작 뜨거운 음식 앞에서도 투정을 부릴 만큼 덥던 여름날, 뜨거운 불 앞에서 닭을 삶고 죽을 끓이던 할머니의 사랑 덕분임을 부정할 도리가 없다.
할머니의 삼계탕은 복날 하루치가 아니었다. 온 식구들이 먹고,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도 큰 통 가득 남아 이후 며칠은 더 닭죽을 먹어야 했다. 석 달 정도의 여름날에, 복날이 세 번. 복날 이후로 며칠 후까지였으니, 우리 집의 여름날 냄새는 필히 닭 냄새였을 것이다. 삼복 중 마지막인 말복이 지나고 한 솥 가득 끓여둔 할머니의 삼계탕도 바닥을 보일 때쯤이면, 아침저녁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가을
가을은 할머니가 모두를 먹이는 일에 가장 진심이었던 때다(어느 계절인들 진심이 아니었겠냐마는). 하다 하다 죽은 조상들까지 가세해서 할머니를 부엌데기로 만들었던 계절. 우리 집은 제사가 정말 많은 집이었다. 가을이 아니어도 한 계절에 몇 번씩은 제사가 있었지만, 추석을 기점으로는 사나흘에 한 번씩 제사가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믿을 수 없을 만큼 제사가 많았다.
요즘처럼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몇 개의 제사를 합쳐서 지낸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 하던 시절, 할머니는 그 많은 제사 음식을 매번 새로 했다. 매번 새로 나물을 무치고, 산적을 굽고, 탕국을 끓이고, 튀김을 튀기고, 전을 부치고……. 그래서인지 가을은 할머니의 뒷모습을 가장 많이 본 계절로 기억한다. 가을날의 할머니는 늘 부엌에서 등을 돌린 채 제사 음식을 만들고 있었으니까. 정작 자신은 절 한 번 하지 않는, 이름조차 모를 남의 집(시댁)의 조상들을 위해서 한 계절을 기름 냄새로 보냈을 할머니.
제사가 워낙 잦고 음식도 많이 하다 보니 가을에는 유난히 동네 사람들이 집에 오는 일이 많았다. 제사 음식을 나눠 먹고, 그러고도 남은 음식을 여기저기 싸주기도 하면서 할머니는 누군가를 먹이는 일에 사력을 다했다. 얼마 전 할머니를 만났을 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 갑자기 그때 생각이 나셨는지 “내가 그때 진짜 많이 베풀고 살았다. 동네 사람들 중에 우리 집에서 내 밥 한 번 안 먹고 간 사람이 없었지.”라며 자랑하듯 말씀하셨다. 정말이라고, 내가 다 기억한다고, 할머니 밥 안 얻어먹은 사람이 없었다고 맞장구를 쳐드렸다.
“그래가 느그들이 다 잘 사는 거다. 베풀고 산 게 느그한테 다 돌아오는 거다.”
할머니가 먹인 사랑의 마음들이 고스란히 내게로 돌아오고 있다. 복을 지은 사람은 할머니인데, 복을 받는 사람은 나인 것이 가끔 죄스럽지만. 그 마음까지도 할머니의 마음인 것을 알기에 감사히 받기로 한다.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갚아야지.
겨울
눈 구경하기 어렵던 남쪽 도시에서 자란 내게, 겨울의 하얀색은 팥죽에 들어 있던 새알이었다. 일 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가 가까워지면 할머니는 좋은 팥을 사고 새알을 빚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두 손바닥 사이에서 동글동글 고르게 굴러 만들어진 새알. 동화책 속 눈은 언제나 동글동글 동그란 모양이었기에, 새알을 볼 때마다 흰 눈이 떠올랐다. 저 눈을 뭉치고 굴려 눈사람도 만들고 저 눈을 던지며 눈싸움도 하는 거겠지. 현실감 없는 상상을 하며 할머니가 빚어내는 새알을 보던 어린 날이 있었다.
집에 있던 쟁반마다 눈송이 같은 새알이 질서 있게 채워져, 더는 빈 쟁반도 쟁반의 빈자리도 남아 있지 않을 만큼이 되면 할머니는 큰 솥에 팥죽을 끓였다. 붉은팥이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동안 할머니는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젓고 또 저었다. 너무 빠르지도 너무 느리지도 않게. 정성껏. 천천히. 그리고 고요하게. 오래도록 뭉근하게 끓인 팥죽은 짙은 자줏빛을 띄었다.
기름값이 비싸 충분히 따뜻할 만큼 보일러를 돌리지도 못하던 겨울날이었다. 작은 상에는 식구의 숫자대로 팥죽이 놓였다. 설탕과 소금 종지도 함께. 단 게 좋은 사람들은 설탕을 듬뿍, 짠 게 좋은 사람들은 소금을 듬뿍, 심심한 게 좋은 사람들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로. 저마다의 취향대로 완성된 팥죽을 후후 불어먹었다.
팥죽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어쩐지 동짓날에는 팥죽을 꼭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춥고 시린 겨울날, 핏줄을 타고 온몸 구석구석까지 온기를 전달하던 할머니의 팥죽을 기억해서다. 길고 긴 겨울밤이 꽤 견딜만하게 느껴질 만큼, 따듯했던 그 기억.
글을 쓰며 하나 더 떠오른 기억이 있다.(전혀 감각하지 못하고 있던 기억인데 별안간 떠올랐다.) 할머니는 매년 동지 팥죽을 아주 조금씩 떠서 집안 구석구석에 뿌렸다. 아마 귀신을 쫓는 의식이 아니었을까. 집안에 드리울지 모를 불운을 미리 막고 길운만 가득하길 바라던 할머니의 마음. 어릴 땐 집구석에 팥죽을 뿌리던 할머니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흰 벽지에 붉은 팥죽이 말라붙어 있는 걸 보며 지저분하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마흔이 넘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에 와서야 할머니의 마음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한다. 팥죽을 뿌리는 마음에 할머니 당신을 위한 기도는 없었으리라는 것도. 그 마음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
할머니가 나를 비롯한 우리 식구를 먹이는 일에 사력을 다하는 동안, 네 번의 계절이 차례로 왔다가 갔다. 그러는 사이, 네 번의 계절이 이루는 한 해도 새 모습으로 왔다가 저무는 모습으로 갔다. 할머니가 먹여주는 계절 음식들을 꼬박꼬박 받아먹다 보면, 마침내 나이까지 한 살 먹게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 식구들에게 한 해 한 해의 세월을 먹여준 셈이다. 체하지 않도록, 때와 시를 고르게 나누어.
할머니가 먹여준 나이 덕분에 나는 무사히 어른이 되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는다.
할머니가 계절을 잊어가는 지금에 와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