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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켜나가고 싶은 가치. 사랑과 책임 그리고 성실

by 진아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걸까. 언제부터 이런 고민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따금 삶이 흘러가는 방향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태어남에는 어떠한 목적도 없지만, 살아가는 과정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어차피 죽을 거 왜 사나’라는 허무하고 비관적인 질문이 들어설 때마다, 내 삶이 나아가는 방향과 그 끝에 닿고 싶은 것들을 그렸다. 어떤 날은 어렴풋했고, 어떤 날은 조금 선명하기도 했던 것들. 내가 지키고 싶은 것, 내가 귀히 여기는 것을 조금 거창하게 '내 삶의 3대 가치'라 명명해 본다. 그것들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매번 조금씩 달라졌으므로 영속성은 없으나, 오늘의 나는 이것들을 삶의 길목마다 놓아두고 살아간다.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의 '무엇'에 해당하는 것들이 계속해서 바뀌는 동안, 언제나 변함없이 바탕이 되던 것은 사랑이다.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삶. 그게 내 삶의 오랜 목적이었다. '자기 앞의 생(에밀 아자르)'의 주인공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에게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부모에게 버려져 로자 아줌마에게 양육되는 모모는 버려졌다는 슬픔에 기대기보다 곁에 있는 로자 아줌마를 사랑하는 마음에 기대어 살아간다.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책 속의 작은 아이를 마주하며, 나도 하밀 할아버지처럼 "얘야,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단다"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알고, 곁에 있는 이를 사랑할 줄 아는 너는 이미 충분히 사랑스럽단다”라고도.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모든 순간에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 감각으로 숨을 쉬고 잠이 든다. 먹고 마시고, 걷고 웃는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고귀하지 않고 평범한 것. 특별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 삶에 사랑이 없다면 숨 쉴 수 없고 잠들 수 없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걸을 수도, 웃을 수도 없다. 나는 한부모가정에서 자랐지만 외가 식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덕분에 정서적 결핍 없는 어른이 되었다. 내가 하는 말들, 행동들을 사랑으로 품어주고 믿어준 그들이 있어서 나는 사랑을 신뢰하는 어른이 되었다. 때때로 사랑받지 못하는 순간이면, 내가 먼저 사랑할 줄도 아는. 그리하여 사랑받지 못해도, 사랑하는 것으로 사랑을 곁에 두는 단단한 어른. 그런 어른이 되었다.


요즘 내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책임이다. 사랑이 부드럽고 따뜻한 카스텔라 같다면, 책임은 거칠고 단단한 바게트 같다. 때론 외면하고 싶고 자주 투정 부리고 싶은 책임이라는 가치가 현재 내 삶의 이끄는 가장 큰 동력이다. '달과 6펜스(서머싯 몸)‘는 ‘달(이상적 가치)‘을 좇아 ‘6펜스(현실적 가치)‘를 모두 저버린 한 남자-스트릭랜드-의 이야기이다. 한 가정의 가장이자 중산층의 안정적인 직장인 스트릭랜드는 어느 날 문득(정말로 갑자기!) 모든 것을 버리고 ‘그림을 그리는 삶‘을 선언한 뒤 집을 떠난다. 그리고 평생을 현실적 책임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산다. 물론 그는 꿈을 좇았고, 그 꿈에서 대가를 바라지 않았기에 과정 자체로도 충분한 삶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처음 읽었을 때는 그 정도로 강렬하게 갈망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트릭랜드의 삶을 동경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축복이 아닌가. 내가 원하는 것을 분명히 알고 그것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자유와 의지. 스트릭랜드는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의 표본 같았다. 최근 이 책을 다시 읽으며, 내가 전에 읽었던 책이 맞나,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그가 ‘6펜스‘를 버린 것은 자유 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아름다운 결론으로 치환하기 어려웠다. 그의 선택에 의해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은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의 삶은 그로 인해 불행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 무언가를 오롯이 책임진다는 것의 무게를 하루하루 깨닫고 있다. 내가 없이는 먹지도, 자지도, 씻지도 못하는 생명을 키우며 책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행복인지 새삼 알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생존에 대한 책임은 덜해졌지만, 이제는 이 아이들을 어떤 어른으로 무사히 키워낼 것인가라는 더 무겁고 거대한 책임 앞에 서있다. 아이들이 자라 성인이 되더라도, 나는 이들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내 생이 끝나는 그날까지 나는 그들의 행복과 무탈을 비는 책임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부모가 된 이상, 내 안에 우주를 품었던 이상. 그래서 스트릭랜드의 삶에 그토록 화가 났을 것이다. 꿈을 좇아 책임을 버린다는 것을 납득하기 어려워서.


마지막 한 가지 가치를 무엇으로 삼아야 할까 오래 고민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숱한 가치들 중에 딱 하나를 더 고르라면 무엇을 골라야 할까. 지금의 내가 내린 답은 성실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성실과 그다지 가깝지 않았다. 물론 지각을 한 적이 없다거나, 해야 할 과제를 한 번도 누락한 적이 없다거나, 대학생이 되어서도 9시 수업을 고수했다거나 등을 보면 성실의 씨앗이 없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시험공부는 늘 벼락치기였고, 무언가를 계획해서 꾸준히 하는 일보다 즉흥적으로 시작하고 맺는 일이 많았던 것은 분명 성실과 거리가 먼 모습이었다. ‘스토너(존 윌리엄스)‘의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는 아주 평범한 인물이다. 소설은 이 인물이 대학에 입학하던 때부터 삶의 마지막을 맞이할 때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다룬다. 스토너의 삶은 소설 속 주인공의 삶이라기엔 너무나 심심하고 고요하다. 그의 삶이 아무 사건 없이 무료하게만 흘러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 속에서 스토너의 태도만은 그저 유유히 흘러간다. 분노하고 다퉈야 하지 않나 느껴지는 순간에도 그는 그저 매일 자신의 몫을 하는 것으로 삶에 답한다. 그가 삶이라는 질문에 쓴 답은 오직 성실이었다. 지금의 내 삶은 스토너와 매우 닮았다. 성실한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매일 해야 할 일을 결코 미루지 않고, 내 몫을 꾸준히 조용히 해내는 것에 작은 기쁨과 성취를 느낀다. 그것이 대단한 보상으로 돌아오지 않아도 괜찮다. 나의 성실함을 내가 알고 있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이 글을 쓰게 된 것은 이번 학기에 고3을 대상으로 하는 교양 논술 수업에서 내가 낸 과제 때문이었다. 이번 과제는 고3들에게 내는 마지막 과제라,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내고 싶었다. 고민을 거듭하다 ‘자기 삶에서 중요한 가치 세 가지를 밝히고, 그 가치가 중요한 이유를 지금까지 읽어온 책 내용을 근거로 논하시오.’라는 과제를 내었다. 그랬더니 아이들이 “선생님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세 가지는 뭐예요?”라고 묻는 게 아닌가. 문득 생각해 보니, 나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는 어려운 과제였다. 아이들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시작한 글쓰기가, 내 삶을 돌아보는 성찰로 이어졌다. 내 글은 지나치게 문학적이라, 아이들이 써내야 하는 논술과는 거리가 먼 글이 되어버렸지만, 내가 살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 세 가지를 자각하게 되었으니 내게도 꽤 의미 있는 글쓰기 과제였다.


실로 오랜만에 공개적인 글을 쓴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 앞으로도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은 예측 가능하지만, 어떤 일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자주 무너지고 때마다 다시 일어서야 할 것이다. 그때 내가 붙잡고 갈 단어 세 개를 찾았다. 성실과 책임, 사랑. 그것이면 되었다. 성실히 사랑하고, 책임 있게 사랑하며,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된다. 그것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늘의 두려움은 내일의 나에게 미뤄본다. 내일의 나는 반드시 어제의 두려움 따위!라며 가볍게 털고 일어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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