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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아직은 괜찮다

첫 번째 노랑

by 진아


커피를 좋아한다.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 아주 큰 부분이 바로 커피일 정도로. 대단한 애호가라서 특별한 커피의 향이나 맛을 음미하는 것은 아니다. 커피를 좋아한다고 말하면서도 커피 원두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모순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도 좋아하는 마음이 진짜 좋아하는 마음이 아닐까. 나는 커피를 모르지만, 커피를 좋아한다. 이 문장은 참이다.


엄청난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발자크가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면 모든 것이 술렁거리기 시작한다."라고 말했다는데, 그 말의 의미를 피부로 느낀다. 정말이다. 커피가 위 속으로 떨어지는 순간, 몸속의 세포가 깨어난다. 하루에 50잔 이상의 커피를 마셨다는 발자크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나도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하루를 시작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일의 시작은 커피다. 대체로 드라이브 스루에서 커피를 사서 출근하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면 내 컴퓨터 전원 버튼보다 공용 커피 머신의 전원 버튼을 먼저 누른다. 이잉, 기계음이 들리고 쪼르륵 물이 빠져나가고 나면 커피를 내릴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신호다. 커피 머신 아래 얼음을 가득 담은 머그잔을 놓고 커피 버튼을 누르면 교무실 가득 커피콩 가는 소리가 울린다. 은은하게 퍼지는 커피 향은 덤이다. 아, 오늘 하루도 무사히 시작했구나. 눈과 귀, 코가 동시에 저마다의 감각을 느끼며 깨어나는 기분.


커피를 마신 이래로 커피를 끊었던 때가 딱 세 번 있다. 두 번은 두 아이의 입덧 시기였고, 한 번은 비교적 최근에 위에 탈이나 커피를 끊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때였다. 입덧 시기에는 거짓말처럼 하루에도 몇 잔씩 마시던 커피가 전혀 당기지 않았다. 아니, 그걸 넘어서 커피 향만 맡아도 속이 울렁거려서 카페에도 갈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괴로움도 모른 채 수 달간 커피를 멀리했다.(이건 타의인 걸까, 자의인 걸까.) 최근에 커피를 끊어야 했을 때는, 첫 며칠은 굉장히 힘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는 잠도 더 잘 오고 속도 덜 쓰려서 이걸 정말로 끊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딱 두 달의 시간이 지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마자 어쩌다 한 입 마신 커피에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기 전까지는. 커피에 인격이 있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끊다니,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우리가 함께 한 세월이 얼마인데! 헛소리 말고 앞으로도 함께 갑시다!”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설득됐을 것이고.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을까.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학생이 된 직후였다. 벌써 이십여 년 전이다. 좋아하던 선배와 학교 앞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선배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실 때, 내가 꽤 근사한 여대생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뜬금없지만 그 선배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까만 커피를 앞에 놓고 홀짝홀짝 시간을 마시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은 참으로 길고 누군가와 함께 하는 시간은 참으로 짧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곱씹을수록 커피가 좋아졌던 게 커피 향과 커피 맛 때문이 아니었던 게 확실해진다.


커피를 마셔온 이래로 달달한 커피를 좋아해 본 적은 없다. 원래도 단 음식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음료는 더더욱 달지 않은 것을 선호하는 터라 커피는 처음부터도 아메리카노였다. 그 쓴 맛 안에 고소한 맛, 신 맛, 향긋한 맛, 깊은 맛 같은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그것을 알기 전까지 나에게 커피는 그저 어른의 맛이었다. ‘나는 더 이상 생과일주스를 마시지 않아, 체리콕도 유치하지. 나는 이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물처럼 마시는 어른이 되었어.’ 그런 기분에 압도되어 쓴 맛을 감내하고 마시던 날들. 더는 아메리카노의 맛을 쓴 맛이라고 말하지 않게 된 지금에 와서야, 어른의 맛이라기에 아메리카노는 너무나 고소했음을 깨닫는다. 진짜 어른의 맛이란. 흠. 커피가 명함도 못 내밀만큼, 강렬하고 진한 씁쓸함이라는 것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삶은 그렇게 최악은 아닌 삶이다. 매일 커피 한 잔을 사 마셔도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을 월급이 있다는 것, 하루에 커피 한 잔 정도는 마실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 “커피 한 잔 할래요?” 물어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 “언제 커피 한 잔 할 수 있어?” 물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모두 내 삶의 노랑이 아닌가.


최악이라고 하는 순간이, 사실상 그렇게 최악이기만 했던 날은 없다. 그 순간에도 내 책상엔 커피가 놓여있었고, 그렇다면 이미 최악은 아닌 셈이다.


내일도 막막한 하루가 시작될 참이었는데, 내일 출근길에 커피를 사갈 생각을 하니 얼른 아침이 되었으면 싶다. 이렇게 오늘도 내 삶의 노랑을 하나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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