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아몬드보다 빛났던 그녀의 삶 그리고 수련의 궤적
이 글은 9월 5일 요가레터에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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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님!
9월의 첫째 주, 어떻게 보내고 계신가요?
개학, 개강, 이직했다면 새로운 출근까지. 9월은 3월만큼이나 많은 것들이 처음부터 시작되는 달이지요. 저는 그간 썼던 요가레터를 처음부터 순서대로 다른 플랫폼에 올리고 있는 작업을 병행하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금 읽어보게 되더라고요.
첫 요가레터의 제목은 <당신이 몰랐던 요기: 스티브 잡스> 였는데요, 이 글에 대한 피드백 중에 <당신이 몰랐던 요기니>도 하나 써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이번 주에는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
오늘의 주인공, 마릴린 먼로입니다.
1926년, 화창한 6월의 첫째 날. 캘리포니아 LA에서 노마 진 Norma Jeane 이라는 여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24살의 엄마 글래디스는 폭행을 일삼는 남편과 이혼 후 두 아이의 양육권을 이미 빼앗긴 상태였어요.
아버지가 누군지 확실치 않은 이 아이, 노마 진만큼은 지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일을 해야했기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 2주된 아이를 맡기고 생활비를 조금씩 보냈지요. 그러길 몇 년, 산후우울증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일한 돈으로 집도 장만하고 딸도 데려오지만, 곧 글래디스는 곧 신경쇠약에 걸리고 맙니다.
그 이후 아주 오랫동안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요.
어린 아이 노마 진은 유년기 내내 12곳이 넘는 양육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하며 자랍니다.
누구도 온전히 책임지고 보호하지 않는 아이는 종종 성적으로 학대 당했고 집 밖으로 보내졌어요. 그 중 한 곳이 영화관이었죠.
위탁가족은 저를 집에서 나가게 하려고 영화관에 보냈어요. 저는 거기서 하루 종일, 밤새도록 앉아 있었어요. 어린아이였지만 커다란 화면이 앞에 있고 혼자 있는 게 꽤 좋았어요. 화면 안에서 움직이는 건 뭐든 좋았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놓치지 않았죠, 팝콘 하나 없었지만요. 1962년 인터뷰에서
영화와 연극, 글쓰기를 좋아하던 10대의 노마 진.
위탁 가정의 복잡한 문제로 고아원으로 다시 돌아갈 상황에 처하자, 16살에 결혼이라는 선택을 합니다. 대상은 다섯 살 연상의 연극부 선배였는데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때라 신혼생활을 즐길 새도 없이 남편은 태평양으로 파병, 노마 진은 시댁에 얹혀 살며 군수공장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노마 진의 인생은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군수공장에 촬영 왔던 한 사진 작가와 이어져 핀업걸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게 엄청난 인기를 얻었거든요. 당시 미국 군인들의 관물대에는 남성 잡지에서 오려낸 노마 진의 사진이 빠르게 나붙기 시작했어요. 이 참에 금발로 머리 색까지 바꾼 그녀는 꽤 성공적인 모델 커리어를 쌓아갔죠.
하지만 그녀의 꿈은 여전히, 어린 시절 커다란 화면 안에서 움직이며 빛나던 그런 배우가 되는 거였어요.
이제 갓 20살이 된 노마 진.
동경하던 여배우의 이름과 어머니의 처녀 때 성을 합쳐 '마릴린 먼로'라는 예명을 만들고, 본격적으로 배우라는 꿈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에 반대하는 남편과는 헤어졌고요.
바로 이 시기에 그녀가 요가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등장합니다.
영화 제작자나 광고주의 눈길을 끌기 위해서 조금 색다르게 접근한 건데요. 몸매가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정적으로 웃고만 있는 다른 배우들과 비교했을 때, 다양한 움직임을 통해 생기 있음을 강조한 먼로의 요가 프로필은 눈에 금방 띄었습니다.
먼로가 어디서 어떻게 요가를 배웠는지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기록이 없습니다.
요가레터 4편에서 소개했던 인드라 데비가 할리우드에 첫 하타요가원을 연 것이 1948년이니 시기적으로 겹치기도 하고 또 당대의 유명한 여배우들이 이 요가원을 찾았기 때문에 먼로 역시 데비의 제자였을 수도 있겠다고 미루어 짐작할 뿐이죠.
분명한 점은, 이 당시 미국에서 요가는 조금씩 피트니스로서 인기를 얻어가고 있는 중이었고, 그녀는 영리하게 프로필 촬영하는 데 요가 포즈를 활용했다는 겁니다. 요가 포즈는 먼로의 유연함과 건강미를 강조했고, 당시로서는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냈어요.
이 사진을 찍기 몇 년 전 그녀는 20세기 폭스사와 단기로 계약을 맺고 연기, 노래, 춤을 배웠지만 재계약이 불발되었습니다. 연기 선생님은 그녀가 배우가 되기에는 너무 수줍음이 많고 불안하다고 했죠.
그렇지만 먼로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배우에 대한 꿈을 더 키워갔습니다. 뮤지컬 백업댄서와 모델 일을 지속하면서 연기 학교를 다니며 인맥을 쌓은 끝에 드디어, 영화사 컬럼비아 픽쳐스의 간부의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 요가 시리즈 사진은 영화사에 지원하면서 제출한 것들이고요.
먼로는 같은 해 뮤지컬 <숙녀들의 합창 Ladies of the Chorus> 에 첫 주연을 따내게 됐죠.
먼로가 얼마나 열심히 요가 수련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녀는 요가 아사나를 하는 걸 좋아했어요. 카메라 앞에서도, 집에서도요.
비단 요가 뿐만 아니라, 몸을 움직이는 그 자체를 즐기는 젊은이였습니다.
(요가 사진을 찍던) 당시 먼로는 21살, 아직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피트니스 광신도였다. 사진 인화본 뒷면에 붙은 메모에는 "예쁘고 기분 좋은 모습. 컬럼비아의 Ladies of the Chorus에서 순진한 여주인공을 연기한 먼로는 운동으로 아름다움과 건강을 추구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The Subtle Body: The Story of Yoga in America』
이렇게 몸을 잘 쓰는 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춤추고, 섬세한 연기를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마릴린은 자기 몸매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여배우들처럼 너무 혹독하게 관리하지는 않았어요.
운동은 마음이 내키면 했고, 다양한 스포츠를 번갈아 즐겼다고 합니다. 아침에는 10분 정도 근력운동을, 섬에 가면 수영과 서핑을, 공원에서는 자전거를 타는 식이었습니다.
"매일 아침 양치질을 하고 세수하고 잠을 깬 후, 침대 옆 바닥에 누워 첫 번째 운동을 시작해요. 팔을 벌리고 5파운드 무게의 웨이트를 머리 바로 위 지점까지 들어올리는 간단한 가슴 강화 루틴을 해요. (...) 라디오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리드미컬하게 세지 않습니다. 규칙적으로 하는 건 좀 견디기 어렵거든요." 1952년 기사에서
또 다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는 "너무 마른 몸을 만들고 싶지는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도 했죠.
여기서 잠깐 먼로의 가족 배경을 살펴보면 그녀의 건강, 특히 정신 건강에 대한 맥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외조부는 알콜 중독, 정신 질환으로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했어요. 외조모 역시 조울증으로 아직 아기였던 먼로를 질식시키려고 한 전적이 있었고요. 어머니 역시 우울증과 조현병으로 고생했습니다.
나중에 먼로 역시 정신병원에 가게 되지만요,
적어도 젊은 시절의 그녀는 '움직임'이라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유전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불안함을 스스로 가라앉히는 방법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거죠.
움직임은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법의 핵심이다. (...) 감정을 춤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아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우리에게만 허락된 재능이자 저주인 '자각'을 가진 종으로서, 우리 사고를 살피기보다는 오히려 몸으로 주의를 돌림으로써 내면 세계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다.『움직임의 뇌과학』
1950년대 초반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하던 스타 먼로.
안타깝게도 195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며 소속사와의 불화, 가정 폭력과 두 번째 이혼 같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암페타민과 같은 각성제, 진정제, 수면제를 복용하며 약물에 의존하게 됐는데요.
이듬해 세 번째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새로운 작품 <뜨거운 것이 좋아>로 여우주연상을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그녀의 약물 의존도는 점점 심각해졌습니다. 아이를 낳기 위해 노력했지만 유산했고, 영화 제작자들과의 갈등은 그녀의 불안 증세를 더욱 악화시켰고요.
그 사이, 그녀의 아름다운 움직임은 점차 잦아들었습니다.
1962년, 36살이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난 마릴린 먼로.
너무 젊을 때 떠나서일까요, 이번 레터를 쓰며 먼로가 무려 1926년생이라는 걸 보고는 제 눈을 의심했어요.
영원히 화사한 젊음과 미소로 기억되고 있는 스타의 운명은 참 기구했습니다.
시대의 아이콘, 최고의 미녀, 최고의 배우, 모든 명예와 부, 음악, 패션, 미술, 영화, 장르를 가리지 않는 뮤즈, 사생아, 고아, 고독과 불안, 여러 번의 유산, 여러 번의 성착취, 세 번의 결혼과 이혼, 죽음을 둘러싼 미스터리까지... 이 모든 단어가 36년이라는 시간에 다 담길 수 있는 것인지, 일반인인 저로써는 가늠이 안될 정도로요.
저는 요가를 하고나서부터 다른 누가 요가를 한다고 하면 무척 반갑고, 마음의 빗장이 대책없이 풀리는 그런 약점이 있는데요. 영어로는 마음에 soft spot 이 있다고 표현하죠.
이 글을 쓰면서 그녀의 다사다난했던 인생사까지 더 자세히 알게 되니, 먼로에게 더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그저 몇 장의 요가 사진, 몸매 관리를 위해 요가한다는 몇 번의 코멘트가 전부지만, 그녀가 거의 100년 전 사람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먼로는 틀림없는 요기니였습니다.
나는 착하지만 천사는 아니야. 나는 죄를 짓지만 악마는 아니야. 나는 그저 이 거대한 세상에서 사랑할 사람을 찾으려고 애쓰는 소녀일 뿐이야. / 마릴린 먼로
대중이 원하는 "금발 미녀"를 연기하는데도 능숙했지만,
사실은 고전을 즐겨 읽었던 똑똑한 사람, 인종차별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던 용감한 사람, 배우로서 정상에 오르고도 다시 연기 학원에 등록했던 겸손한 사람, 그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고 싶었던 한 여자,
그녀에게 말랑해진 마음 한 켠을 내어주며, 오늘 요가레터를 마무리합니다.
제가 보기엔 당신은, 당신의 인생을 바람 속의 촛불처럼 산 거 같아요.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몰랐죠. (...) 잘가요 노마 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마릴린 먼로가 아닌, 성적 대상 그 이상의 존재로 당신을 바라보는 22번째 줄에 앉은 젊은이로부터 Candle in the Wind 가사 중 / 엘튼 존
이 글은 9월 5일 요가레터에서 발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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