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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딸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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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랑관장 Jul 21. 2018

위로는 늘 뜻하지 않은 곳으로부터 온다

이 글은 몸담았던 일터의 비민주적인 운영에 항의하고 싸우다 동료들과 사직한 직후에 썼습니다


 

매 순간 감정을 포착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요즘 내 감정의 기본 세팅은 차분함이지만, 그럼에도 찰나적으로 느끼는 기쁨, 고마움, 감동, 소중함, 감사함, 분노 등 다양한 감정들은 매우 에너제틱하다. 깊은 밤 잠에 빠진 이후 아침이 오면 다행스럽게도 우울함은 새로운 자신감으로 대체된다. 일종에 회복을 갱신하고 있는 셈이다.


그 와중에 친구 동생이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친구들은 말 그대로 일사불란하게 서울역에 집결하여 부산으로 향했다. ‘어찌 이런 일이 있느냐’고 한탄을 하다가도, 서로의 일상을 나누며 시시껄렁한 농담으로 이어졌고, 장례식장에 도착해서는 서럽디 서럽게 우는 친구를 보고 함께 소리 내 울었다. 친구는 ‘내 아까운 동생 어떻게 하느냐’며 슬피 울었고, 친구의 근원적인 슬픔에는 그의 모친에 대한 걱정이 자리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올해 초 내 외삼촌이 돌아가셨을 때 모친이 했던 그 말 “우리 오빠 아까워서 어떻게 해”하며 목놓아 울던 모친의 모습이 떠올랐다. 모쪼록 친구의 가족들이 자책도 원망도 없이 상처를 보듬으며 동생을 잘 추억하고 잘 보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숙소로 자릴 옮겨 친구들과 술 한잔을 이어갔다. 젓가락이 없어 촘촘한 참빗을 포크 삼아 라면 면발을 건져 올릴 땐 어쩔 수 없이 폭소가 터졌다. 한편 한달음에 달려와 준 친구들이 장하다 생각했다.


새벽녘에 친구들은 호텔에 두고 지근거리에 있는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한 달여 여행 간 모친 없이 홀로 지내는 부친 얼굴을 보지 않고 가는 건 너무했다 싶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부친은 꼿꼿하게 천장을 보고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가 잠든 방에서 푸른색 형광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 푸른빛은 깡마른 부친의 몸과 그의 대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착각을 일으켜 순간 외계 생명체와 같은 착시를 일으켰다. 나중에 알게 된 그 괴 물건은 모기를 유인해 전기 충격을 가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는 잔인한 기계였다. 모친이 없는 집은 썰렁했고 집은 과하게 넓게 느껴져 부친이 덩그러니 놓여 있는 느낌이었다. 모친이었더라면 내가 한밤중에 들어와도, 무거운 몸을 일으켜 내 잠자리를 한번 봐 줄텐데, 부친은 알은체를 한번 하더니 쭉 취침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이른 시간임에도 부친은 운동을 하러 나가고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땀에 흠뻑 젖어 들어온 부친은 “가원아”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존재를 확인했다. “아빠야?”라고 화답했다. “잘 먹고사나?” 하고 물으니 “밥 차리 주까?”라는 답이 돌아왔다. 텅 빈 집에서 부친과 단 둘이 먹는 그 밥, 그 어색한 밥이 어쩐 일인지 맛있었다.


기차역으로 배웅하는 부친의 차 안에서 우울증과 자살을 화두로, 잠에 관하여, 최근에 사촌 오빠를 만난 이야기, 20년 된 중고 렉서스와 허영심,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회 분위기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대체로 부친은 내가 어떤 사안에 둔감할 필요가 있다는 요지로 말했다. 그 말은 당부에 가까웠다. 역에 당도해 부친에게 만원만 달라고 했더니, 지갑이 없다고 했다. 부친 얼굴에 쓰인 안타까움에 내가 다 안타까울 지경이어서, 곧 부산역에 올 친구들에게 빌리겠다며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그 사이 서울에 친구 하나가 연락이 와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며 근황을 물었고, 그이와의 짧은 대화가 어쩐지 고마웠다.


얼마지 않아 부친이 전화해 다짜고짜 “니 돈 없나?”라고 물었고, “내 돈 있다”라고 답했다. 대화를 빨리 종료하기 위해 “돈 없으면 아빠한테 연락해”라는 말에 “그래그래”를 무한 반복했다.


그리고 최근 40년 직장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며 홀로 유럽으로 출국한 모친의 사진을 본다. 동반 출국했더라면 함께 불고 있을 병나발이 아니던가. 힘내라는 메시지는 이 사진 하나로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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