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향에 매료되어
어릴 적 우리 집에 손님들이 오면 커피 타는 건 내 몫이었다. 인스턴트커피에 설탕과 프림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살살 저을 때의 행복감이란. 원래 못 먹게 하는 건 더 먹고 싶은 법. 늘 손님 수대로 잔을 맞춰 커피를 탔기 때문에 누가 한 모금 남겨 주기만을 바랐다. 좀 더 자라 커피가 허락 되었을 때, 쓰디쓴 아메리카노보다도 프림과 설탕이 잔뜩 든 커피를 마시고서야 비로소 내가 컸다고 느낀 건 아마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도 커피를 즐겨 마신다. 아침이면 카페에 모여 조막만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커피를 마신다. 주로 마시는 것은 연유 커피 ‘카페 쓰어 다’ 혹은 ‘카페 다’라고 하는 블랙커피. 여기서 ‘다’는 얼음을 뜻하는데 각 얼음이 아니라 잔의 2/3쯤 되는 큰 얼음을 사용한다. 그 얼음을 잘게 부숴 넣으면 사이공(호치민의 옛 이름) 식 커피가 된다. ‘카페 사이공’이라고 하여 메뉴를 따로 만들어 팔기도 한다.
젊은 사람들이 주로 찾는-문과 에어컨 있는-카페에 가면 작은 각 얼음을 넣어 준다. 하지만 보통의 현지 카페는 사방이 뚫려 있다 보니 덥고 습한 바람이 그대로 들어온다. 얼음이 금세 녹아버리는 걸 막기 위해 일부러 큰 얼음을 사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가만히 있어도 잘 녹지만 그걸 또 엄지 손톱만한 스푼으로 저어 가며 수다 떠는 것이 베트남 남자들이 아침을 여는 법이다.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바쁜 여자들과 잠이 많은 학생들도 커피를 즐겨 마신다.
간혹 어린 아이들도 커피를 마시고 싶어 하는데 연유의 단 맛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인스턴트커피가 좋다. 아메리카노가 맛 좋다고 느껴본 적은 없다. 다만 전부터 그 향을 좋아했다. 카페 앞을 지나거나 안에 들어서면 확 끼쳐 오는 원두 향. 맛도 맛이지만 그 구수한 향에 이끌려 어느새 커피를 주문하게 된다.
그런 내가 요새 아주 호강하며 산다. 베트남은 세계 2위의 커피 생산국이자 수출국이다. 오기 전에는 몰랐었다. 베트남하면 쌀국수만 유명한 줄 알았는데, 인스턴트커피는 물론 진하게 내려 먹는 커피까지 어디 하나 유명하지 않은 게 없단다. 베트남 커피는 향이 좋다. 가끔은 굳이 마시지 않더라도 그 향을 음미하고 싶어 핀에 커피를 내릴 때도 있다. 지난 우기도 그렇게 보냈다. 습기를 머금은 찬 기운도, 한여름의 더위로 커피 한 잔으로 인해 가시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