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규시절 이야기
어느 덧, 저는 학교라는 시스템에 적응하고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수업하고 업무하고 상담하고 퇴근했습니다. 학교 내 생활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해야할 일을 제 때 해내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학교가 민주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민주시민을 육성해야 할 학교가, 민주적이지 않다니, 사회교과를 가르치는 제 입장에선 상당히 곤혹스러웠습니다.
보통 학교는 매주 월요일 아침 교무회의를 합니다.(지금은 명칭이 달라졌을 수도 있고 방식이 달라진 학교도 있습니다.) 일종의 업무 공유 시간입니다. 각 부 부장샘들이 마이크를 잡고 그 주 주요 업무를 안내하십니다. 모든 부장샘들 발언이 끝나고 나면 마지막에 교장선생님 훈화말씀(?)이 있었습니다. 사전적 의미로 '훈화'란 '교훈이 되는 말'입니다. 제 기억 속 교장샘 훈화말씀은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신규인 저에게 교무회의는 열심히 받아적기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체험학습(소풍)을 갔습니다. 전 학생들과 처음 가는 체험학습에 흥분했습니다. 학급회의를 소집하여 체험학습가서 뭐하고 놀지 학생들과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풍선, 손수건 등 약간의 준비물을 학생들 몰래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우리반이 기다렸던 체험학습을 갔고 우린 말뚝박기, 보물찾기, 손수건 돌리기, 장기 자랑 등을 하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참 아이들이랑 놀고 있는데 선배 선생님께서 저를 찾아 오셨습니다.
"용쌤, 지금 점심 시간이예요. 같이 와서 밥 먹어요."라며 저 쪽 큰 나무 아래 선생님들 모여계신 자리를 가리키셨습니다.
"아 선생님, 전 괜찮습니다. 학생들과 같이 김밥 먹을려구요. 고맙습니다."
전 학생들 김밥을 하나씩 먹었습니다.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뺏어 먹은 것이 아니라 각 집마다 다른 고유의 김밥을 시식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맛평가가 아니라 김밥만 먹고서도 그 집의 가정교육, 가훈을 알수 있다고 하면 약간의 거짓말일까요? 아무튼 전 여러 의미로 학생들 김밥을 하나씩 먹었습니다. 충분히 배가 불렀습니다.
다음 주 월요일, 어김없이 교무회의 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떤 부장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즘 젊은 교사들은 예의가 없어요. 밥을 같이 먹자고 부르면 와서 같이 먹어야지, 말을 안 듣고 자기 하고싶은데로 하고, 이러면 곤란합니다."
저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습니다. 예의 없이 대했던 것이 아닌데, 다만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억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땐 인성부장 선생님께서 마이크를 잡고 말씀하셨습니다.
"전 반대로 생각합니다. 체험학습 가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전 김용만선생님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 모습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엄청나게 든든했습니다. 그 날 교무회의에서 전 마이크를 잡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행동에 대한 선배교사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습니다. 모든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 말이죠.
저를 두둔해 주셨던 부장선생님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 분의 말씀이 없었다면 전 단지 상처받고, 주눅들어 추후 제 소신에 따른 교육활동을 못했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 말씀 덕분에 저는 '제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제가 나쁜 교사가 아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전 한가지 다짐을 했습니다.
'저런 선배교사가 되고 싶다.'
신규교사, 젊은 교사는 학교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 때 그 선생님 곁에서 지지하며 힘을 주는 선배교사가 필요합니다. 시간이 흘러 2025년 전, 중견교사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머릿속엔 선배다운 선배가 되어야 한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되새깁니다. 전 직장에서, 사회에서 알게된 모든 분들께 경어를 씁니다. 나이를 묻지 않습니다. 한 분, 한 분을 귀하게 대하려 노력합니다. 체험학습 사건은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시즌이 되었습니다. 당시 학생회장은 회장답지 못한 행동들을 해서 선생님들께서 걱정을 하셨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너무나 무례한 그 학생에게 상처를 받기도 했습니다. 졸업식을 앞두고 교무회의를 했습니다. 교무부장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학교는 전통적으로 학생회장에겐 수고의 의미로 상을 줍니다. 이번 회장에게 이 상을 주었으면 하는 데 어떻습니까?"
물론 의례적 질문입니다. 당연히 통과되는 분위기 였습니다.
저는 용기내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학생회장에서 상을 준 전통은 존중합니다. 하지만 올해 회장학생은 회장으로써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여러 선생님들께서도 아실 것입니다. 학생회장의 행실은 학생들에게 모범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선생님들한테도 함부로 했습니다. 수업시간 책상에 드러누워있고 바로 앉으라 하니 비웃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 관례에 따라 상은 준다면 상의 가치가 훼손될 것입니다. 아무리 회장이라고 해도 그 역할을 해내지 못했으면 상을 주는 것은 보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무실에 침묵이 흘렀습니다.
교무부장선생님께서 다시 마이크를 잡으셨습니다.
"그런 내용도 있으나 그래도 이 학생이 열심히 한 부분도 있습니다. 학생 어머니께서도 학교를 위해 많은 봉사를 하셨고 하니, 상 주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은 아니니 줍시다."
그 때 곧 퇴임하시는 선생님께서 일년간 교무회의 중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으셨습니다.
"저도 김용만 선생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 학교는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입니다. 제가 봐도 그 학생의 행실은 좋지 않았습니다. 교육자로서 잘하지 못한 학생에게 잘했다고 상을 주는 것에 우려를 표합니다. 학교가 당당하려면 우리가 기준을 명확히 보여야 합니다."
아무도 말씀을 하지 않으실 때, 이 선생님의 말씀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평소 저랑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관계도 아니었습니다. 전 당시 20대였고 선생님은 60대셨기에 제가 감히 편하게 대할 분이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선생님께서 제 말에 동의를 해 주시다니...큰 힘이 되었습니다.
결론은?
그 학생은 상을 받았습니다.
학교는 교육기관입니다. 교육을 하는 기관입니다. 선배, 후배가 있고 교육, 행정, 정치가 혼재합니다. 가장 옳은 것이 선택되는 것이 아니고 가장 공정하게 일이 처리되는 곳도 아닙니다. 전 단지 '학교는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했었습니다. 학교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르친다는 행위가 다를 뿐입니다.
학교가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명확합니다. 양심적으로 운영되는 곳입니다. 교사들의 도덕성은 가히 최고 수준입니다. 너무 힘들게 하는 학생에 대해 말을 할 때도 비판을 하고 나서 꼭 마지막에는 "애는 착한데~~~"라고 맺음하는 것이 교사들입니다. 아무리 속상한 학부님이라도 "아이는 착한데~~~"라고 맺음하는 것이 교사입니다. 아무리 이상한 동료교사라도 "사람은 좋은데~~~"라고 맺음하는 것이 교사들입니다. 상대에게 피해줄까봐 속으로 삭히는 것이 훨씬 많은 것이 교사집단입니다. 학생 측으로부터 고소를 당하더라도 학생을 먼저 고소하지 못하는 것이 교사집단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집단입니다. 그래서 속이 곪아 있는 사람이 많은 집단입니다. 교육부, 교육청에서 하라고 하면 그냥 하는 집단입니다. 동의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를 바꾸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해야 하는 수업, 학생지도, 민원처리, 행정업무만 해도 태산입니다. 그기에 교육정책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교육부 자체가 민주적인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새로 추진되는 정책 결정 과정이 불투명하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집단이라고 발표한 인물 중에 학교 교육과 무관한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일수도 있습니다. 학교의 새로운 정책을 교사들이 뉴스를 통해 알게된 적도 많습니다. 똑같은 뉴스를 보고 학부모님들이 문의 전화를 하시나 우리가 아는 것도 똑같은 뉴스이기에 답변을 제대로 못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과연 교사는 교육의 주체인가?라는 회의가 듭니다.
학생들과 지내며 잘 가르치고 소통하면 건강한 민주시민을 육성하고 싶었습니다. 민주적인 학교 공간에서 다양한 선생님들과 건강한 교류를 하며 스스로 성장하고 싶었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교육청에 도움을 청하고 싶었습니다. 현실은 대부분 그 반대였습니다.
그래도, 내가 수업하는 교실만은 민주적으로 운영하고 싶습니다. 학생들과 관계만큼은 민주적으로 소통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적인 학교는 모든 학생이 민주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는 의문이 듭니다. 학교는 어쩔 수 없는 통제가 필요합니다. 모두 다른 여럿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민주적이지 않은 공간에서 민주시민을 기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도 하지만 교사 한명 한명이 만나는 수많은 학생들에겐 민주적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 탓만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앗! 종이 쳤군요. 수업들어가야 합니다. 학교가 어떻더라도, 세상이 어떻더라도, 전 교실 속 우리 학생들을 만나는 순간이 좋습니다. 오늘도 유익한 수업 잘 하겠습니다.^^